[문규상 칼럼] ‘제2의 장영자’라 불린 희대의 사기꾼 변인호의 주가조작 전말

문규상 법무법인 대륙아주 변호사 기자 2023.09.26 09:58:21

(문화경제 = 문규상 법무법인 대륙아주 변호사) 

 

사기열전(史記列傳)과 대한민국 사기꾼 열전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열전(列傳)이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호걸 등의 생애를 보여주듯, 대한민국을 혼돈 속으로 몰아넣었던 희대의 사기꾼들에 대한 수사와 재판을 통해서도 당시의 시대상황을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필자의 개인적인 소견으로 이들을 시대별로 나누어 보면 1970년대에는 ‘박영복’, 1980년대에는 ‘장영자’, 1990년대에는 ‘변인호’를 꼽을 수 있을 것으로 보여 이들의 행적을 간단히 짚어보겠습니다.

△1970년대 초 박영복이란 사기꾼이 돌멩이를 위장수출하고 신용장을 위조하는 무역 사기를 벌여 7개 시중은행 등으로부터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금액인 74여억 원을 챙겨 희대의 사기꾼 반열에 처음 이름을 올렸고,

△1982년에는 당시 최고 권력자이던 전두환의 인척으로 독재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사채시장의 <큰손>으로 군림해온 장영자와 남편 이철희가 자기 자본력이 약한 건설회사와 접촉, 유리한 조건으로 자금을 제공해 주고 그 대신 담보 조로 대여액의 2∼9배에 달하는 액수의 어음을 받아내 사채시장에서 할인하여 자금을 조성한 후 주식투자를 하는 등 융통어음을 순차적으로 돌려쓰는 방법으로 약 6400억 원 상당의 어음 사기 행각을 벌이는 속칭 ‘이철희·장영자 사건’으로 사기꾼 반열의 맨 꼭대기를 꿰찼습니다.

△IMF 사태를 앞둔 1997년에는 정치권과 경제계가 극도로 혼란한 틈을 타고 변인호가 등장하여 박영복과 장영자를 뛰어넘는 무역 사기, 어음 사기, 주식 사기의 수법을 집대성하여 ‘경제범죄의 교과서’로 불릴 정도의 대담성을 보여주었고, 피해 규모 또한 약 4000억 원에 달해 언론에서는 이를 <제2의 장영자 사건>으로 부를 정도여서 변인호도 당당히 같은 반열에 오른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변인호에 대한 수사와 재판, 그 후의 경과를 통하여 당시의 급박했던 시대 상황과 그 사건의 의미를 돌이켜 보겠습니다.
 

1980년대를 뒤흔든 최고의 사기 사건으로 유명했던 장영자-이철희 부부의 구속 임박을 보도한 1994년 1월 24일자 경향신문 1면.

국가부도의 전조(前兆)

1997년은 김영삼 대통령이 이끄는 문민정부의 마지막 해이자 그해 12월에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우 어수선했습니다.

그해 1월에 발생한 재계 순위 14위 한보그룹의 부도로 인하여 한보그룹의 정태수 회장과 한보철강에 거액을 부정 대출해 준 전-현직 은행장 3명, 정 회장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비호해 주던 당시 여야의 거물 정치인 5명이 차례로 구속되었고, 급기야 5월에는 배후세력으로 의혹받던 ‘소통령’ 김현철(김영삼 대통령의 차남)이 구속되기에 이르렀으며, 7월경에는 위기설에 휩싸여 오던 재계 순위 8위의 기아자동차 그룹이 법정관리로 넘어가는 사태가 휘몰아쳤습니다.


이러한 경제위기는 인도네시아와 태국에서 시작된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와 맞물리면서 대한민국은 이른바 IMF 사태에 휘말립니다.

위기 상황으로 치닫던 1997년 10월 말경, 증권감독원(현 금융감독원)으로부터 ‘레이디가구 공개매수 관련 주가조작 사건’의 고발장이 서울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안대희 전 대법관)에 접수되어 수사에 착수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단순 주가조작 사건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으나 수사에 착수하자마자 레이디가구 주가조작 사건의 주도 세력으로부터 무역 사기와 어음 사기 피해를 입은 수많은 은행과 기업체들이 계속해서 피해 상황을 알려와 당시 특수1부 소속 검사 전체(6명)가 투입되었습니다. 수사가 진전될수록 그 사건의 전모가 속속 드러나 수사 종결 시까지 밝혀진 바로는 사기 피해액이 거의 4000억 원에 달해 <제2의 장영자 사건>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변인호의 주식 사기는 한탕주의식 증권투자와 유혹에 약한 증권사 직원, 시장감시기관의 무능이 어우러져 가능했고, 무역 사기는 반도체의 호황 속에서 컴퓨터 관련 품목이 수출검사 제외 대상 품목으로 지정된 제도적 허점을 악용할 수 있어 가능했으며, 어음 사기는 당시 극도의 경제난국 속에서 자금난에 시달리던 기업체들과 사립대학 등을 어음할인을 빙자하여 쉽게 속일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서, 당시 대한민국의 어려웠던 경제 상황, 즉 IMF 사태의 전조(前兆)를 쉽게 읽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변인호의 체포

변인호에 대한 증권감독원의 고발장이 접수된 후 그에 대한 탐문수사를 벌인 결과 그가 평소 명동 사채시장에 자주 드나든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정보망을 풀가동하고 있던 중 1997년 11월 초 그가 명동의 모 사채업자 사무실에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저와 함께 근무하는 J 수사관을 비롯하여 특수 1부 소속 수사관들과 파견 나와 있던 경찰관들을 현장으로 보내 긴급체포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당시 사채업자 사무실에는 변인호와 사채업자 이외에도 몇 사람이 더 있었는데 그들은 변인호의 소개로 유수한 대기업의 약속어음을 할인하려 하던 중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음의 소지 경위가 불분명하고 그들의 신분이 확실하지 않아 모두 긴급체포토록 지시하였더니 출동했던 수사관들이 변인호와 사채업자(여성), 그리고 어음할인을 부탁한 브로커로 보이는 2명의 남자를 대동하고 돌아왔습니다.

위기의 일선 기업 재무 상태

확인 결과 당시 자금난에 빠져있던 유수한 대기업으로부터 거액의 약속어음 할인을 부탁받은 2명의 브로커가 변인호를 통하여 사채업자 사무실에서 전주를 소개받기 위하여 기다리던 중 긴급 체포된 것으로 드러나 사채업자와 나머지 2명의 브로커는 돌려보내고 변인호는 구속영장을 청구하였는데 당시 변인호는 전주를 소개해주는 대가로 대기업으로부터 소개료로 10억 원을 받기로 했다면서 구속되는 순간까지도 전주를 만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당시 할인하려 했던 대기업 발행의 약속어음은 액면 5000억 원짜리 2장의 융통어음이었는데 필자도 지금까지 그런 천문학적 액수의 약속어음을 본 적이 없으며, 할인료가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전주 소개비만 10억 원에 달해 그 대기업이 얼마나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그 대기업은 IMF 사태 이후 그룹 전체가 부도로 해체되는 운명을 겪게 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당시의 경제 상황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당시 변인호와 함께 긴급 체포되어 왔던 명동의 사채업자는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는데 어음할인 과정을 확인하는 동안 하도 싹싹하게 굴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 그 인상이 뇌리에 깊게 박혀있었는데 필자가 포항지청에 근무할 당시인 2000년 10월경에 터진 국민의 정부 시절 4대 게이트 중의 하나인 <정현준 게이트>의 주범인 정현준의 사업 파트너로서 동방금고의 부회장이던 L씨였던 사실을 당시 TV 뉴스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보고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한국이 IMF 외환 사태로 인해 달러 부족에 시달리던 시기에, 불황을 틈타 수천억 대 사기를 친 변인호 일당의 범죄 사실을 보도한 한겨레신문의 1997년 11월 26일자 지면.

변인호의 사기 수법(무역 사기, 어음 사기, 주식 사기)

변인호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서울의 J 대학 경영학과를 중퇴한 뒤 재벌기업의 미주 지사와 한 중소기업에서 근무한 경력과 경매 브로커인 누나를 도와주면서 배운 어음할인과 수출대금 결제방식 등의 지식을 사기행각을 벌이는 데 활용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가 30대 초반이던 1990년대 초에 반도체 경기가 호황을 누리자 서울의 용산전자상가에 수출 대행 업체를 설립하여 반도체 칩 등 부품을 수출하면서 큰돈을 벌었으나 이후 반도체 가격의 급락으로 1500만 달러 상당의 큰 손해를 입게 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무역 사기에 손을 대면서 본격적으로 ‘금융 사기꾼’의 길로 들어섰다고 하였습니다.

변인호는 컴퓨터 주변기기 수출입업을 가장한 5개의 유령회사를 차린 뒤 미국과 홍콩에 거주하는 동생들과 짜고 반도체 칩 등 컴퓨터 관련 품목이 수출검사 제외 대상 품목인 점을 악용하여 쓰레기에 불과한 폐반도체칩이나 공테이프 등을 미국으로 선적한 뒤 은행이나 종합상사로부터 결제 대금을 미리 받아 썼고, 미국과 홍콩에서는 변인호의 동생들이 각각 유령의 수입회사들을 차려 국내 은행의 현지 지점으로부터 마치 16메가 D램 같은 고가의 컴퓨터 부품을 수입하는 것처럼 수입신용장을 받아내는 수법을 사용하다가 나중에는 한국과 미국, 홍콩의 유령회사 사이의 3각 무역 형태의 정상적인 거래인 것처럼 가짜 신용장과 수출환어음 등을 만들어 8개의 시중은행으로부터 약 200회에 걸쳐 네고대금(수출업자가 은행에 신용장과 수출환어음 등의 선적서류를 제시하고 미리 받은 수출 결제 대금)으로 약 2300여억 원을 가로챈 사실이 드러나기도 하였습니다.

변인호는 이처럼 미리 받아낸 저금리의 수출결제 대금으로 고금리의 사채시장이나 주가조작에 돌려썼다가 몇 달 후 결제기일에 되갚는 ‘금리차익 남기기’ 수법도 활용하고, 미리 받아낸 네고대금으로 다시 변제기가 도래한 네고대금을 돌려막는 방법으로 꾸준히 은행 부채를 갚아왔으나 약 400여억 원의 피해가 남은 상태에서 1996년 9월경 한보그룹의 융통어음을 할인해 주면서 배서하였다가 한보그룹의 부도로 260억 원의 빚을 다시 떠안게 되자 일거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주가조작을 통하여 한탕을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자금난을 겪고 있던 기업체들을 상대로 어음할인 명목으로 접근해 1천억 원 대가 넘는 어음을 받은 후 이를 시중은행과 종금사에서 할인받는 수법으로 주가조작에 필요한 자금을 축적한 후 당시 건실한 상장업체로 자산가치가 1천억 원 대에 이르는 레이디가구의 공개매수에 최대 승부를 걸었으나 결국 실패하게 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변인호의 사기행각은 갈수록 더욱 대담해져 처음에는 무역 사기에서 시작하였으나 1997년 2월경부터는 30대 기업인 2개의 수출대행업체를 상대로 “물품구입대금을 먼저 주면 수출한 후 대금을 수수료 1%와 함께 돌려주겠다”고 속여 현금과 어음 약 400여억 원을 받아내 그 중 약 350억 원을 가로챈 사실이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당시 자금난을 겪고 있던 대기업 계열사를 비롯한 2개 기업과 서울의 유명 사립대학교 등을 상대로 어음할인 명목으로 600여억 원 상당의 약속어음을 받아냈고, 레이디가구 공개매수 자금투자 명목으로 300여억 원을 받아 챙기는 등 그 범위가 점점 넓어졌습니다.

주가조작은 주식 거래의 사기 행위

통상 주가조작 행위는 부당한 재산적 이익을 얻으려고 하고, 그러한 이익을 얻고자 위장거래, 현실거래, 허위 정보 유포 등 위계행위를 하며, 일반투자자인 제3자의 착오에 의한 행위를 유도할 뿐만 아니라 사기죄의 법정형과 동일하고, 이익의 규모에 따라 처벌에 차등을 둔 점 등 사기죄와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따라서 자본시장법에서 규정하는 주가조작에 관한 규정을 형법상의 사기죄의 특별구성요건으로 이해하고 주가조작 행위를 ‘주식거래의 사기 행위’라고 보는 국내 전문가도 많으며 미국에서는 주가조작 행위를 자본시장법이 아닌 일반 형법에 규정해 놓고 있습니다.

주식 사기 (1) - 허위사실 유포를 통한 J사의 인수

변인호는 레이디가구 공개매수를 통해 그동안의 손해를 일거에 만회하기 위하여 공개매수에 앞서 당시 극심한 자금난을 겪고 있던 만만한 규모의 상장사인 J사의 대표에게 접근하여 일본의 알프스 전자 회사의 대리인이라고 속이고 주식 50여만 주를 담보로 경영지원금으로 20억 원을 빌려주고 신뢰 관계를 형성한 다음 J사가 일본 알프스전자에 피인수된다는 허위 소문을 유포하면서 J사로 하여금 관련 내용의 공시를 내게 한 뒤 주가가 급상승하자 담보로 받은 J사의 주식 중 37만 주를 팔아 단기매매 차익 7억여 원을 챙겼으며, 그 후 다시 피인수가 무산되었다고 허위 소문을 퍼뜨려 주가를 떨어뜨린 후 48만 주를 다시 재매집하여 J사의 경영권을 완전 장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증권감독원의 조사 결과 알프스 사는 1996년 6월 영업활동이 정지되어 청산절차를 밟고 있는 회사로 J사에 대한 인수 능력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인수계획도 세운 사실이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주식 사기 (2) - 레이디가구 공개매수를 통한 주가조작

1997년 11월 초경 증권감독원으로부터 고발된 레이디가구 공개매수를 통한 주가조작 사건은 ‘작전’의 전형을 보여주었습니다. 주도 세력인 변인호 일당은 증권사 직원, 기관의 펀드매니저, 상장사 임원 등을 끌어들여 허위 공시와 기업의 인수합병(M&A) 설을 퍼트리고, 마지막엔 공개매수까지 동원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들은 D전선과 레이디가구 주식을 미리 사들인 뒤 증권사 직원과 브로커, 기관의 펀드매니저를 동원해 의도적인 고가 주문과 통정매매 등의 소위 ‘작전’을 통해 주가를 끌어올린 다음 이를 매도 처분하여 단기간에 64억 원의 차익을 얻었고 그 대가로 증권사 직원과 펀드매니저들에게 합계 18억 8000만 원의 대가를 지급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장영자를 능가하는 수법으로, 그리고 ‘유명인의 손자’로 행세하는 멀쑥한 외모로 수천억 대 사기를 친 변영호 일당의 검거 사실을 보도한 경향신문의 1997년 11월 26일자 지면.

통정매매의 대가로 현금 10억원 지급

변인호 일당은 작전 세력들과 레이디가구의 주가를 띄우기 위해 10만 주의 통정매매를 약속하고 그 대가로 1주당 1만 원의 사례비를 지급하기로 한 후 먼저 계약금 1억 원을 지급하였고, 통정매매가 완결된 후 나머지 잔금 9억 원을 현금으로 일시에 지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당시는 5만원권 지폐가 발행되기 전이라서 모두 1만원권 구권 지폐로 지급하게 되었는데 9억 원은 1만원권 지폐 100장 묶음을 1개 다발로 계산하면 900개의 다발이 되어 이를 바퀴 달린 여행용 3단 가방에 꾹꾹 눌러 담아 가방 채로 건넸는데 당시 은행 앞 차도에 세워둔 봉고차에 실을 때 가방이 너무 무거워 장정 2명이 이를 들지 못하고 지폐 무게를 견디지 못해 가방의 바퀴가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하였으며, 현금을 인출한 은행에서도 갑자기 9억 원에 달하는 거액의 현금을 한꺼번에 준비하지 못해 다른 몇 개의 지점에서 빌려 오는 해프닝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주가조작을 통해 상장사인 J사를 인수한 이들은 이미 주가조작을 위해 사들였던 자산가치 1천억 원 대의 레이디가구 주식의 보유 비율이 20% 이상 되자 본격적으로 적대적 M&A를 통해 경영권을 장악하기로 마음먹고 1주당 8만 원에 공개매수하겠다는 공시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매수자금은 어음할인 등의 명목으로 기업으로부터 받은 수백억 원의 약속어음을 이용할 계획이었으나 공개매수신고서 상의 대금조달 계획에 첨부된 예금의 인출이 불가능한 것이라서 애초부터 공개매수금 지급이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나자 이를 눈치챈 레이디가구의 대주주들이 보유주식을 대량 매도하는 바람에 공개매수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6만 원대까지 올라갔던 주가는 1만 2천 원 수준으로 곤두박질치면서 공개매수로 차익을 기대하며 청약에 나섰던 약 1000명의 소액주주들은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되어 그 피해액은 1800억 원 대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었으며, 이에 소액주주 200여 명은 변인호 일당과 주관사인 대우증권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레이디가구 공개매수 사건>은 경기 불황으로 자금조달을 위한 어음할인이 거의 불가능해진 상장기업의 다급해진 심리와 악성루머에 쉽게 흔들리는 증권시장을 교묘히 악용한 전형적인 작전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유망 기업인 행세 및 유명인 친손자로 신분세탁

이런 과정에서 변인호는 상장사인 J사를 인수한 후 실제 사주의 자격으로 대한상공회의소가 주관하는 회의에도 참석하여 유망한 젊은 기업인으로 행세하였고, 그가 부천시 출신임을 기화로 역시 부천 출신으로 1950년대 초반 시절 외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바 있고, 시 ‘논개(論介)’로 널리 알려진 시인 수주 변영로의 친형이기도 한 변영태 씨의 친손자로 행세하고 다녔습니다.

또한 이를 믿게 하기 위하여 항상 검정색 양복을 즐겨 입었고 지갑과 007 가방 속에 30억 원 대의 채권과 어음·수표 등을 넣어 다니면서 은근히 자금력을 과시했으며 사채시장과 증권가에서는 자신의 어머니가 ‘7대 사채업자 중 한 사람’이라고 떠들고 다녔으나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부천에서 법무사(당시에는 사법서사였음)로 활동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하였습니다.

변인호는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얗고 풍채가 좋아 그가 즐기던 검정색 양복을 입으면 옷태가 나고 훤칠하게 보여 재벌집 자제로 보였고 언변이 좋고 머리도 비상하여 아무런 메모도 없이 수백억 원의 자금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줄줄 이야기하였는데 나중에 자금의 흐름을 추적해 보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정확한 것으로 밝혀져 그의 비상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주변 눈치를 보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꾸며 이야기하는 등 거짓말에 능하여 그의 이야기를 항상 조심해서 가려서 들어야 했고, 또한 항상 자료로 확인해야 했습니다.

변인호 사건의 수사 및 재판 결과

변인호 사건을 수사한 결과 변인호와 주가를 조작한 증권 브로커 등 9명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상의 사기죄와 증권거래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하고 해외로 도피한 변인호의 동생 2명 등 공범 4명을 지명수배하고 수사를 종결하였습니다. 그러나 1998년 3월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후 보직 이동으로 필자는 공판부에서 근무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변인호 사건의 공소유지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1심에서 변인호에 대해서는 징역 15년의 형이 선고되었고, 나머지 피고인들에 대해서도 모두 유죄가 선고되었습니다. 선고 직후인 1998년 9월경 필자는 서울지검에서 인천지검으로 전보되어 항소심 공소유지는 다른 검사가 담당하였습니다.
 

변인호 일당의 주가조작에 따라 레이디가구에 대한 공개매수가 지급불능 사태에 빠졌고, 주식 투자자들에게 거대한 피해가 예상된다는 조선일보의 1997년 10월 16일자 지면.

변인호에 대한 구속집행정지 결정과 도주

변인호는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항소심 재판을 받던 중인 1998년 12월경에 고혈압과 혈뇨 등 지병을 이유로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받고 한양대 병원에 입원 중 1999년 1월 13일경에 병원에서 도주하였습니다. 그 후 항소심은 즉시 변인호에 대해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취소하고 궐석재판으로 1심 선고형과 같이 징역 15년의 형을 선고하였습니다.


구속집행정지란 강제로 일정한 장소에 가두어져 있는 피고인에게 중병, 출산, 가족의 장례 참석 등 긴급하게 석방할 사유가 있을 때 법원의 직권으로 일시적으로 석방하는 제도입니다.

1998년 12월 초경 저와 사법연수원 동기생으로 서울고등법원에 근무 중이던 M 판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연수원을 다닐 때는 가깝게 지냈으나 연수원을 수료한 지 10년 이상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 번도 안부를 물은 적이 없었기에 매우 반갑게 안부 인사를 나누었는데 결국 그의 주요 관심사는 변인호에 대한 구속집행정지 결정에 대한 저의 의견이었습니다. 물론 형사소송법에는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하기에 앞서 검사의 의견을 묻도록 규정되어 있으나 현재 공판에 관여하는 검사에게 의견을 물어보면 될 일을 구태여 수사 검사로서 1심 재판의 공판관여 검사였던 필자에게까지 의견을 물어왔기에 한편으로는 의아하게 생각되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매우 신중하게 결정하려나 보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변인호에 대한 항소심 재판의 주심판사이던 M 판사에게 “변인호는 검찰에서 수사받을 당시에도 매우 교활하고 거짓말을 잘하였고, 구속되기 전에 숨겨둔 많은 현금이 남아있을 것으로 추측되어 도망갈 우려가 크므로 절대로 구속집행정지 신청을 허가해 주면 안 된다”라고 단호하게 의견을 말했습니다. 더구나 “변인호가 도망가면 M 판사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재차 강조했습니다. 그 후 아무런 연락이 없기에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1달쯤 지난 후 언론 보도를 통하여 변인호가 구속집행정지 중에 병원에서 도망간 사실을 알고 허탈한 마음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필자 또한 여러 가지 사건에 쫓겨 변인호의 도주 사건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가 2000년 6월경 포항지청의 부장검사로 재직 중일 때 변인호의 해외 도주 사건의 검찰수사 결과를 언론을 통하여 알게 되었는데 변인호는 1심에서 중형이 선고되자 그때부터 해외로 도주하려고 마음먹고 변호사와 의사, 경찰관, 사설 경호원 등을 고액의 수임료와 뇌물로 매수해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받아내고 중국으로 도주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뇌물로 얼룩진 도주 전모

수사 결과 밝혀진 바로는 변인호는 1심에서 징역 15년의 형을 선고받자 해외로 도주하기 위한 사전포석으로 구속집행정지를 받기 위하여 1998년 9월경 H 변호사에게 2억 원의 수임료를 주고 선임한 후 그를 통하여 의사에게 3000만 원을 주고 외래병원에서 진료받을 수 있도록 유리한 소견서를 받아내고, 뇌파 검사를 담당한 의료기사에게도 700만 원을 주고 검사 결과를 유리하도록 조작하였고, 1000만 원을 주고 교도관을 매수한 후 미리 짜둔 해당 의사가 속한 병원에서 진료받을 수 있도록 하여 ‘고혈압과 혈뇨가 심하다’는 등의 이유로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받아냈고, 다시 사설 경비업체의 경비원을 매수하여 도주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병원에서 도주 후 약 5개월간 은둔생활을 하다가 여행사 대표 K씨로부터 위조여권을 받아 1999년 6월경 중국으로 도피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경찰관 K는 1000만 원을 받고 변인호에게 추적팀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제공한 사실이 드러나 관련자들은 모두 구속되었고 그 후 모두 유죄판결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런데 변인호의 도주를 도와준 경찰관 K가 변인호 사건 수사팀의 일원으로서 변인호의 체포에 공을 세웠던 파견 경찰관 K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평소 범인을 검거하는 업무에 자주 투입되어 많은 성과를 올려 검사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던 사람이었는데 그 후 듣기로 가정사에 얽힌 많은 개인 채무 때문에 공직자의 양심을 팔게 된 사실을 알고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후 우연히 TV의 오락프로를 시청하던 중에 그 K가 출연하여 간단한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보고 그가 사회에 나가 조그만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어 이젠 범죄에 연루되지 말고 사업이 크게 번창하기를 마음속으로 빌어 주었습니다.

또한 변인호에 대한 항소심의 주심판사였던 M 판사도 2000년 변인호의 해외 도주 사건의 검찰 수사 무렵 갑자기 사표를 제출하고 변호사 개업을 하였는데 사표를 낸 정확한 사유를 알지 못하지만, 그가 법원 내에서 유능하고 평판이 좋아 장래가 촉망되던 판사였기에 사표를 낼 만한 특별한 사정이 없었던 점과 사표 제출 시기에 비추어 변인호에 대한 구속집행정지 결정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 아닌지 속으로만 짐작하였습니다.
 

경찰관, 교도관, 의사 등 온갖 관계자에게 뇌물을 주고 중국 도주에 성공했던 변인호가 중국에서 붙잡혀 ‘임시 인도’라는 절차를 거쳐 한국으로 송환된 사실을 보도한 KBS의 2013년 12월 20일 보도 화면.

변인호의 중국에서의 별건 중형 선고와 한국으로의 임시인도 송환

변인호는 중국의 선양으로 도주하여 호화생활을 하고 있다는 제보가 접수되기도 하였으나 우리 사법당국은 그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하던 중 2006년경 변인호는 중국에서 별건의 사기 범죄로 중국의 공안당국에 체포·기소되어 징역 12년의 형을 선고받았는데 그동안 우리 법무부는 중국에 변인호의 송환을 여러 차례 요청하였으나 중국 정부는 이를 거절하면서 중국에서 형 집행이 종료되면 한국으로 송환하겠다는 입장만 밝혀왔습니다.

그러나 변인호가 우리 법원에서 선고받은 15년의 형이 2014년 3월 2일 자로 시효가 만료되기에 중국에서의 형 집행 이후 송환될 경우 국내에서의 형 집행이 불가능한 상황(현행법상 징역형은 판결 확정 후 15년 안에 집행해야 하고, 수사기관이 대상자를 체포하면 다시 15년의 시효가 적용됨)이 벌어지게 되므로 법무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실상 사문화되어 있던 ‘임시 인도’ 카드를 꺼냈는데 법무부에 의하면 “임시인도는 양국 모두 전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중국 정부 내에서도 외교부, 검찰, 공안부 등의 동의가 필요해 성사 전망이 불투명했으나 우리 법무부, 외교부, 주중 대사관 등이 긴밀하게 협조한 결과 ‘임시 인도’가 성사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임시 인도’는 우리 법원에서 선고된 형의 시효가 만료되기 전에 우선 국내로 송환하여 형의 일부라도 집행하여 시효를 연장한 뒤 다시 중국으로 돌려보내 잔여형기를 채우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변인호는 양국의 ‘임시 인도’ 방침에 따라 2013년 12월 20일 국내로 송환되어 7일 동안 복역한 뒤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고, 2018년 4월까지 중국에서 잔여형기를 복역한 뒤 다시 국내로 재송환되어 현재 국내에서 잔여형기를 복역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무리 – 하늘의 그물망

변인호의 사기행각은 대담했고 치밀했고 한때는 화려했지만 말로(末路)는 비참했습니다. 2013년 12월 잠깐 국내로 송환되었을 당시 카메라에 찍힌 그의 얼굴에서는 1997년 11월경 처음 체포되었을 당시 훤칠하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가득한 주름과 힘든 구금 생활에 찌든 모습만 보였습니다. 더구나 그로부터 다시 10년 세월이 더 흘렀기에 그의 얼굴 주름살은 더욱 움푹 패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할 수 없다지만 그로 인해 힘든 세월을 보냈을 수많은 피해자를 생각할 때 하늘의 법은 참으로 엄중하고 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늘의 그물망은 넓고도 넓어서 성긴 듯하지만 놓치는 것이 없다(天網恢恢 疎而不失)”는 도덕경(73장)의 구절이 떠오릅니다. 사람은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이 세상에 내려온 그 누구도 하늘의 그물망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손바닥으로는 하늘의 눈을 가릴 수가 없기 때문이라 합니다.


필자 소개

법무법인 대륙아주 문규상 변호사는 1978년 서울법대 졸업, 1987년 검사로 임용되어 ‘특수통’으로서, 변인호 주가 조작 및 대형 사기 사건, 고위 공직자 상대 절도범 사건, 부산 다대/만덕 사건, 강호순 연쇄 살인 사건 등을 맡아 성과를 냈고, 2003년의 대선 자금 수사에서도 역할을 했다. 2009~2014년 대우조선해양의 기업윤리경영실장(부사장)을 역임하며 민간 부패에 대한 경험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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