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60부터!” 인생 후반전 당당하게 들어선 그녀들에게 찾아온 ‘다시, 봄’

세종문화회관 서울시뮤지컬단, LG아트센터 서울서 공연

김금영 기자 2024.05.13 15:46:43

뮤지컬 '다시, 봄' 공연 장면. 사진=세종문화회관

“인생은 60부터!”

밝은 미소로 외치는 그녀들의 목소리에 관객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동시에 환호성이 터졌다. 창작뮤지컬 ‘다시, 봄’ 현장 풍경이다.

세종문화회관(사장 안호상) 산하 예술단인 서울시뮤지컬단(단장 김덕희)이 ‘다시, 봄’으로 돌아왔다. 올해 세 번째 시즌을 맞은 서울시뮤지컬단 대표 창작 레퍼토리 작품 중 하나인 이 공연은 누군가의 딸, 엄마, 아내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여성이 서로 공감하고 연대하며 힘차게 인생 2막을 내딛는 이야기를 담았다.

각자 바쁘게 인생을 살다가 어느새 반 백살이 된 이들은 큰마음 먹고 간만에 나들이를 떠난다. 하지만 그렇게 떠난 나들이에서도 누군가는 보험 영업을 하려 하고, 누군가는 집에서 계속 엄마를 찾는 전화가 오는 등 일상의 의무와 책임들이 여전히 따라온다.

그러다 갑자기 버스 사고가 생기고, 저승사자로 추측되는 묘한 손님이 나타난다. 저승사자는 이들 중 한 명을 저승으로 인도해야 한다며, 자신이 계속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리고 싶으면 그간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이야기를 들려달라 한다.

 

굉장히 판타지적인 소재이지만 이 공연이 관객의 공감을 자아내는 건 7명의 그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바로 우리네 엄마, 아내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커리어우먼으로 살아왔지만, 갱년기로 인해 메인 앵커 자리에서 밀려나고 자식과도 갈등을 겪는 진숙, 보험설계사로 영업왕에 뽑힐 정도로 열심히 살았지만 건강이 많이 약해진 성애, 세탁을 맡긴 신발 하나도 못 찾아서 전화가 올 정도로 온 가족이 모든 집안일을 의존하는 주부 승희가 그렇다.

뮤지컬 '다시, 봄' 공연 장면. 사진=세종문화회관

경아 또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며 가족을 챙겨왔지만 가족은 그 노력을 그만큼 알아주지 않고, 본래 노래 부르기를 꿈꿨던 은옥은 사별한 남편 가족을 챙기느라 자신의 꿈은 뒷전으로 밀렸다. 독신으로 자유롭게 살아 친구들의 부러움을 살지만, 그 이면엔 혼자라는 외로움을 가진 골드미스 연미, 그리고 사고로 인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법조차 잊고, 그렇게 화가가 되고 싶었던 어릴 적 꿈까지 잊어버린 수현까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때 “내가 없으면 하루가 안 돌아간다”, “가족들은 내가 필요하다”, “매일 밥하고 빨래하고 정신없다” 등 하나같이 열심히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엔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일들을 했고,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 없다”며 하나같이 벙어리가 되는 그녀들의 모습은 가슴 한켠을 짠하게 만든다.

 

이는 공연이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의 인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향이다. 서울시뮤지컬단을 이끄는 김덕희 단장은 부임 당시 단원 24명 중 50대 여자 단원 7명에게 주목했다. 한때는 주역으로 공연의 중심에 섰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차 비중이 줄고, 때로는 맞지 않는 역할을 맡아 자존감이 떨어진 그들을 다시금 무대의 중심에 불러오고자 한 것.

이를 위해 작가가 써주는 대본을 그대로 연기하는 게 아니라 각각의 배우들과 인터뷰를 하고 맞춤형 대본을 작성하는 ‘디바이징 시어터’ 방식을 취했다. 2박 3일 워크숍을 떠나 배우들의 삶을 들어보고 교류하는 시간을 가졌고, 그렇게 다시, 봄의 대본이 탄생했다.

다시, 봄은 인터미션 없이 80분의 공연 시간에 이 이야기들을 촘촘하게 구성했다. 덕분에 공연이 지루하게 늘어진다거나, 이야기가 지나치게 함축됐다는 느낌 없이 깔끔하다.

뮤지컬 '다시, 봄' 공연 장면. 사진=세종문화회관

공감 가는 스토리 못지않게 각 배우의 특성에 맞춘 노래도 특별하다. 에너지 넘치는 성애, 승희, 경아가 무대 중심에 섰을 땐 통통 튀고 발랄한 매력이 터진다. 시댁 뒤치다꺼리로 쌓여왔던 울분, 갱년기로 우울과 분노를 동시에 내면에 품고 있는 진숙, 은옥이 각각 노래를 부를 땐 강렬한 에너지가 돋보인다. 특히 ‘갱년기’를 부르짖듯 부르는 진숙은 마치 록커처럼 보일 정도로 강렬하다.

고민 없이 살았을 것 같은 연미가 부르는 ‘돛단배’는 유독 애달프다. 누구나 가슴 한켠 간직하고 있을 외로움, 그 본연의 이야기를 끌어내며 발랄했던 공연의 분위기에 한 타임 쉬어가는 쉼표를 찍는 듯한 노래이기도 하다. 이 밖에 이번 공연 시작 도입부엔 새로운 노래도 추가돼 공연을 더욱 즐길 수 있다.

다시, 봄의 시작을 연 기존 배우들과 새로운 배우들의 합류는 공연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서울시뮤지컬단 단원들이 주축이 된 ‘다시 팀’은 왕은숙, 권명현, 오성림, 임승연, 박정아, 이신미, 한일경으로 구성됐는데 안정된 호흡이 인상적이다. 여기에 지난해 공연에서 새 활력을 불어넣었던 문희경을 비롯해 구혜령, 장이주, 김현진, 유보영 그리고 유미, 김현진, 박성훈으로 구성된 ‘봄 팀’은 톡톡 튀는 개성을 보여준다.

뉴 캐스트로는 황석정, 예지원이 각각 다시 팀과 봄 팀에 합류했다. 서울시뮤지컬단과 뮤지컬 ‘애니’를 함께 한 경험이 있는 황석정은 다시, 봄에도 바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황석정이 맡은 캐릭터 은옥이 생전의 남편과의 추억, 그리고 남편의 죽음 이후 악착같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는 ‘연애와 결혼과 이별’에서는 특히 매력이 폭발한다.

예지원은 이 공연을 통해 첫 뮤지컬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드라마 ‘또 오해영’, 연극 ‘홍도’ 등 여러 작품에서 개성 넘치는 캐릭터로 많은 사랑을 받아온 예지원은 극 속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열정이 넘치며 긍정적인 성애 캐릭터 또한 그녀만의 사랑스러움으로 표현해낸다.

뮤지컬 '다시, 봄' 공연 장면. 사진=세종문화회관

공연의 조화로운 구성을 위해 다시, 봄의 초연 작품 개발 단계부터 함께한 여성 창작진도 다시 한번 의기투합했다. 뮤지컬 ‘유진과 유진’, ‘비밀의 화원’, ‘오즈’ 등으로 주목받고 있는 김솔지 작가, 소리극 ‘체공녀 강주룡’ 등 매 작품 남다른 시선과 높은 완성도로 기대감을 높이는 이기쁨 연출, 밴드 눈뜨고 코베인의 멤버로 활동하는 한편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우리집’ 등 다양한 음악 활동을 펼치고 있는 연리목 작곡가가 다시 한번 뭉쳤다. 뮤지컬 ‘작은아씨들’, ‘다윈영의 악의기원’, ‘판’ 등 창작 뮤지컬에 최적화된 실력파 스태프로 손꼽히는 김길려 음악감독 또한 이번 시즌 함께한다. 이들은 2022년 초연 작품개발 단계에 배우와 시민들이 함께한 생애전환 워크숍 단계부터 계속 함께하며 작품에 남다른 공을 들이고 있다.

공연 초반 앞으로의 인생을 생각했을 때 좀처럼 입을 잘 떼지 못하던 그녀들은, 말미에 이르러서는 “인생은 60부터”라고 희망차게 외치며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바로 자신을 위한, 자신이 진정으로 주인공이 되는 삶을 살아가고자 이야기한다. 나이가 들었다고 인생이 저문 것이 아니라, 모든 게 꽁꽁 얼었던 겨울이 지나면, 다시금 꽃피는 봄이 오는 것처럼 바로 오늘이 내 인생의 봄이라는 이야기하는 공연은 올해에도 관객의 마음에 꽃망울을 터뜨린다.

김덕희 서울시뮤지컬단장은 “다시, 봄은 무대 위, 그리고 객석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가 50대 여배우들을 비추고, 객석은 중장년층 관객들이 차지했다. 지난해 함께했던 배우들이 다시, 봄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이번 시즌에도 함께 해주어 감사한 마음 뿐”이라며 “다시, 봄을 통해 뮤지컬 관객 저변이 더욱 확대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은 “지난해 많은 사랑을 받았던 다시, 봄이 이번 LG아트센터 서울 공연으로 서남권 관객들과 처음 만난다. 앞으로도 서울시예술단의 좋은 작품을 통해 자주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보겠다”고 말했다. 공연은 LG아트센터 서울 U+스테이지에서 다음달 7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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