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림의 현대사진산책+] 시간의 색채, 공간의 초상

고은사진미술관 돌로레스 마라, 국제갤러리 칸디다 회퍼

천수림(사진비평) 기자 2024.06.03 10:21:51

현재 프랑스 아비뇽에서 거주하며 작업하는 돌로레스 마라는 프레송으로 알려진 오래된 목탄 인쇄 기법을 통한 생생한 색상, 강한 콘트라스트, 짙은 검정은 이제 그녀의 시그니처가 됐다. 마라가 우리를 몽환적이며 신비로운 세계로 이끈다면, 독일의 작가 칸디다 회퍼는 경이로움을 느끼게 만드는 공간 속으로 초대한다. 회퍼가 담은 박물관, 도서관 등의 장소는 다른 형태의 내적 관조의 장소로 기록된다.

고은사진미술관, ‘돌로레스 마라의 시간 : 블루, Dolorès Marat : L’heure bleue’

고은사진미술관, '돌로레스 마라의 시간 : 블루' 전시장 전경. 이미지 제공=고은사진미술관

아비뇽의 밤, 돌로레스 마라가 라이카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어렸을 때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됐습니다. 사진으로 저는 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When I was little, I never spoke. And that stayed with me for a very long time. Photography gave me a voice, really).”

대규모 회고전을 앞둔 프랑스 사진작가 돌로레스 마라의 아비뇽(푸른 시간의 아비뇽)에서부터 뱅투까지의 ‘시간’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 ‘돌로레스’(토마스 구필 감독, 2022)의 한 장면에는 그녀의 이런 고백이 담겨 있다. 아직은 깨어나지 않은 도심의 푸른 새벽을 누비는 사진작가 돌로레스 마라는 영화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진은 나에게 목소리를 가져다주었다’고.

돌로레스 마라, '마지막 상영'.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03. ©Dolorès Marat, 이미지 제공=고은사진미술관

돌로레스 마라는 독학으로 사진을 공부해 ‘로버트 델피어 2023 도서상’ 수상자로 선정되기까지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패션과 현대 미술의 변두리에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고독이 깃든 수많은 실내 풍경처럼 희미하지만 시대를 초월한 이미지로 각인됐다. 다큐멘터리는 아파트 스튜디오에서 ‘캐스케이드(Cascades)’ 전시회를 열기까지, 검소하고 대담한 작가의 여정을 담담하게 담고 있다.

다큐멘터리는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돌로레스 마라의 시간 : 블루, Dolorès Marat : L’heure bleue’(3월 8일~6월 7일)에서 함께 상영됐다. 이번 전시는 국내에서 열리는 마라의 최초이자 대규모로 진행되는 사진전으로 60여 점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자리였다.

사진은 어떻게 개인의 목소리가 될 수 있을까. 1983년 39세가 돼서야 비로소 개인 사진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프레송 프린트(Fresson print)로 컬러와 질감이 돋보이는 감성적인 사진 스타일을 구축했다. 프레송 프린트는 1952년 프랑스 프레송 가문이 개발한 프린트 기법으로 컬러와 망점 있는 입자가 강조되는 것이 특징이다.

돌로레스 마라, '파리 그레뱅 박물관의 여인'.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998. ©Dolorès Marat, 이미지 제공=고은사진미술관

1983년 프레송 프로세스를 발견한 것이 작가로서 그녀의 작업에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4색 목탄 프린트는 질감과 벨벳처럼 부드럽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담기 위해 끊임없이 탐구했다. 이어서 일본 종이에 안료 프린트라는 개인 기법을 개발해 계속 이어나갔다.

작가는 주로 사람들이 잠들거나 꿈꾸는 시간대에 작업했다. 마라는 평범한 일상이 경이로워지는 몽환적인 순간을 포착해 흐릿하고 거친 입자와 신비로운 컬러를 보여준다. 회화적인 컬러와 톤에서 드러나는 고독한 분위기는 마라 작업의 특징이다. 이러한 감성은 돌로레스 마라의 불안한 성장배경과 삶 전반에서 배어 나온 것이다.

마라는 수시앙브리에 있는 사진작가 클로드 프루아사르의 가게(초상화 제작과 사진장비를 판매)에서 견습생으로 지내면서 현상, 인화, 리터칭 등 사진 촬영의 기본을 배웠다. 그 후 1969년 파리에 있는 로레알의 보뜨레 보떼 매거진의 흑백 사진 연구소에 입사해 실험실 조수이자 인화 작업자로 기 부르댕, 헬무트 뉴턴, 장루프 시프, 사라 문과 같은 유명 인사들의 프린트 작업을 담당했다.

돌로레스 마라, '악어여인'.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00. ©Dolorès Marat, 이미지 제공=고은사진미술관

1985년부터는 잡지를 위한 제품 사진과 인물 사진을 촬영했다. 프리랜서로 독립한 후에는 에르메스, 라이카, 르몽드 등 다양한 브랜드와 일간지, 잡지와 협업했다. 1990년대 중반, 뉴욕을 처음 방문한 이래 7년간 뉴욕을 오가며 작업했으며 두 번의 사진전을 개최했다.

2023년 제1회 로버트 델피르 도서상은 만장일치로 돌로레스 마라에게 돌아갔다. 마라는 전 세계를 다니며 평범하게 지나칠 수 있는 장면을 포착했다. 고대 유적, 동물, 바쁜 도시인들을 촬영한 그녀의 작업은 세심하면서도 피사체에서 약간 벗어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흐림과 어둠을 사용한 몽환적인 이미지는 신비롭다.

국제갤러리, 칸디다 회퍼 개인전 ‘재생(RENASCENCE)’

국제갤러리, 칸디다 회퍼 개인전 ‘재생(RENASCENCE)’ 전시장 전경. 이미지 제공=국제갤러리

독일 쾰른에서 작업하고 있는 사진작가 칸디다 회퍼의 작품은 엘리트주의적이며 기념비적이다. 대중들에게는 화려하고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다. 독일의 유형학적 사진의 전통을 잇는 회퍼의 사진은 도식화돼 있고, 인위적인 면이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사진 속 붉은 커튼이나 카펫은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감정은 작가가 의도했다기보다는 감상자 개인의 경험이 일으키는 일종의 화학 작용일 것이다.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칸디다 회퍼 개인전 ‘재생(RENASCENCE)’(5월 28일~7월 28일)은 국제갤러리 부산점 개인전 이후 4년 만에 열렸다. 이번 전시에서는 팬데믹 기간에 파리에 위치한 카르나발레박물관, 베를린 신국립박물관, 스위스의 장크트갈렌 수도원 부속도서관 등 리노베이션 중이었던 건축물, 과거에 작업한 장소였던 공간을 재방문해 작업한 신작 14점을 만나볼 수 있다.

칸디다 회퍼, 'Stiftsbibliothek St.Gallen III 2021'. 잉크젯 프린트. 2021. © Candida Höfer / VG Bild-Kunst, Bonn 2021, 이미지 제공=국제갤러리

회퍼가 담은 문화적 공간은 문명의 궁극점에 위치해 있지만, 인간이 배제된 공간이 대부분이다. 일부러 배제했다기보다는 회퍼 자신이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고 밝혔다. 회퍼는 비물질적 가치에 대한 존중을 전제로 한 원칙을 가지고 작업한다. 회퍼의 창의적인 위치는 근대 초기, 특히 르네상스 스타일의 표현 방식과 건축에 대한 긍정적인 관계를 통해 형성됐다.

회퍼는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카르나발레 박물관의 리노베이션 이후 내부 공간을 촬영했다. 1880년에 개관한 박물관은 16세기에 지어진 르네상스 양식의 카르나발레 저택과 17세기 건축물인 르 펠레티에 드 생파르고 저택, 두 개의 건물로 구성돼 있다. 리노베이션을 통해 추가된 철제와 나무 재질의 나선형 계단을 촬영했다. 나선형 계단은 리노베이션 전후를 잇는 ‘시간성’으로 해석한 작업으로 공간의 변천사를 느낄 수 있다.

벤델 대저택의 무도회장을 위해 1925년 커미션으로 제작된 벽화 작업은, 1989년 박물관에 재설치된 이후 최근 복원 과정을 거쳐 새롭게 태어났다. 특히 이 작품들은 창문과 거울 테두리의 금색 프레임, 공간을 압도하는 자연광으로 인해 복원된 벽화의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증폭시킨다. 특히 붉은 장막이라는 시각적 요소로 강조되는 장식적이고도 연극적인 분위기는 베를린의 코미셰 오페라의 텅 빈 무대와 관객석을 담은 또 다른 연작과 연결된다.

칸디다 회퍼, 'Komische Oper Berlin II 2022'. 잉크젯 프린트. 2022. © Candida Höfer / VG Bild-Kunst, Bonn 2022, 이미지 제공=국제갤러리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설계로 지어진 베를린 신국립미술관은 2015년부터 6년에 걸쳐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지휘 아래 기존인테리어 자재의 보존을 원칙으로 한 보수 작업을 진행했다. 회퍼는 복원 직후인 2021년 이곳을 방문, 재정비를 거친 공간을 카메라 렌즈로 포착했다. 유리와 철재로만 지었기 때문에 사진 속에는 미술관 근처의 건물이 비친다.

이 밖에도 2001년에 작품화 한 스위스의 장크트갈렌 수도원 부속 도서관을 회퍼가 팬데믹 기간 중 재방문해 작업한 동명의 ‘Stiftsbibliothek St. Gallen 2021’ 연작도 함께 볼 수 있다. 새로 촬영한 2021년 작에서는 인물의 요소를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시간성이 교차하는 내부 공간을 조명하고 있다.

칸디다 회퍼, 'Musee Carnavalet Paris XX 2020'. 잉크젯 프린트. 2020. © Candida Höfer / VG Bild-Kunst, Bonn 2020, 이미지 제공=국제갤러리

1970년대 후반, 회퍼는 뒤셀도르프 국립 예술 아카데미에서 베른트와 힐라 베처와 함께 사진을 공부했다. 그녀는 토마스 스트루스,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토마스 루프와 함께 새로운 지형으로 불리는 ‘뒤셀도르프 학파’의 일원이 됐다. 이들 예술가들은 한 시대의 성격을 보여주는 모티프를 체계화하고, 목록화하고, 구조적으로 분석했다.

회퍼의 정면 촬영과 때때로 바로크 방식으로 기울인 방식도 포함한 정적인 샷과 구성은 매우 이성적임에 틀림없다. 돌로레스 마라가 영화의 미장센을 닮았다면 회퍼의 사진은 매우 엄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가의 사진 앞에서는 고독함과 숭고미를 느낄 수 있다.

<작가소개>

돌로레스 마라(1944년생)는 17세에 일 드 프랑스 지방의 작은 동네 사진관 청소부로 일하던 중 견습생으로 발탁되며 사진을 시작했다. 스무 살 무렵 파리에 정착, 길거리 사진사를 상대로 현상·인화 일을 했다. 1969년 뷰티 브랜드 로레알 산하 잡지 ‘보트르 보떼’의 흑백사진현상소에 취업, 필름 현상, 인화 업무를 담당하며 당대 유명 사진가인 기 부르댕, 헬무트 뉴튼, 장루 시에프, 사라 문 등이 의뢰한 작업을 함께 했다.
1985년부터 2023년까지 프랑스의 아를국제사진축제에 참여해왔고, 2024 벨기에 브뤼셀사 진축제 전시 참여 등으로 꾸준히 세계 관람객들을 만나고 있다. 프랑스, 뉴욕 등에서 여러 권의 사진집을 성공리에 출간했고, 2023년 사진사적으로 주요 작가를 소개하는 문고판 사진집 시리즈 ‘포토 포쉐’에 선정되며 특별 단행본(악떼 쉬드 출판사 Actes Sud)이 출간됐다. 2023년 11월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프랑스 리브르 로베르 델피르 상 최초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2024년 봄, 프랑스파리 유럽사진미술관에서 개최하는 기획전에 참여했으며, 3월 국내 최초로 고은사진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선보였다.

칸디다 회퍼는 1944년 독일 에베르스발데에서 태어났다. 1973년부터 1982년까지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첫 3년 동안 올레에게 영화를, 그 이후에는 현대 독일 사진을 이끈 베른트 베허와 힐라 베허 부부로부터 사진을 수학했다. 당시 수업을 함께 들었던 토마스 스트루스, 토마스루프, 안드레아스 거스키 등과 함께 ‘베허 학파’ 1세대로 일컬어지는 회퍼는 1975년 뒤셀도르프의 콘라드 피셔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를 시작으로 작가는 지난 50여 년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오며 공적인 장소, 특히 인간이 부재한 건축의 내부를 특유의 정교한 구도와 빼어난 디테일로 구현해왔다.
전 세계 유수의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수많은 개인전과 그룹전을 선보인 작가는 2002년에 제11회 카셀 도큐멘타에 참여했으며, 2003년 제50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마틴 키펜베르거와 공동으로 독일관을 대표했다. 2018년 소니 월드 포토그래피 어워드의 사진공로상을 수상했으며, 다가오는 9월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가 주최하는 ‘2024 케테콜비츠 상’을 수상할 예정이다. 작품의 주요 소장처로는 뉴욕 현대미술관, 파리 퐁피두 센터, 프랑스 국립도서관, 쾰른 루트비히 미술관, 스톡홀름 근대미술관, 마드리드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마이애미 루벨 패밀리 컬렉션, 취리히 프리드리히 크리스찬 플릭 재단 등이 있다. 작가는 현재 쾰른에 거주하며 활발히 활동 중이다.

글: 천수림(사진비평)
이미지 제공: 고은사진미술관, 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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