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9년 가을 25세 매월당은 철원을 떠나 보개산(寶蓋山)으로 향한다. 보개산은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보면 서쪽은 연천, 동쪽은 포천에 속하지만, 매월당이 살던 시대에는 철원도호부에 속한 산이었다.
철원에서 보개산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었다. 지금의 3번 국도와 대부분 겹치는 삼방로(三防路)를 따라 연천을 통해 오르는 길과, 지금의 87번 국도가 된 작은 길 철원로(鐵原路)를 통해 내려오는 길이었다.
매월당의 시가 실린 순서를 보면 아마도 매월당은 철원로로 내려왔던 것 같다. 이 길은 영평으로 이어지는데, 후세에 영평천에는 금수정이 세워졌다.
이 길을 내려오다 보면 관인면에서 맑은 개울을 만난다. 큰골(지장계곡)이라 부르는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이 보개산 오르는 길이다. 지금도 보개산 동쪽 등산로는 이 계곡을 따라 연결된다.
이 계곡은 물이 맑고 수량도 풍부하여 보개산을 찾는 이들에게는 사철 무릉도원 같은 곳이다. 봄에는 야생화도 다양해서 꽃을 찾는 이들에게는 한 번쯤 다녀오면 좋은 곳이다.
그러나 가을날 속세를 떠난 납자(衲子) 매월당에게는 무심천(無心川)이었을 것이다. 오르는 길에는 보개산성(보가산성) 터가 있는데 궁예의 가슴 아픈 마지막을 증언하는 곳 중 하나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다시 돌아온 큰 산, 보개산
보개산은 호락호락한 산은 아니다. 주봉(主峰)인 지장봉(地藏峰)은 고도가 877m, 옆 조금 낮은 화인봉은 805m나 되는, 이 지역에 척추가 되는 우뚝한 산이다. 우리 시대에 와서 남북이 분단되고 군부대가 자리 잡으면서 민간인 출입이 제한되니 산을 찾는 이들에게도 멀어졌던 국토 중앙부 명산 중 하나였다.
고려나 조선 시대에는 금강산 길에 오르는 이들에게도, 자연을 즐기는 이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유명세를 탔던 산 중 하나였다. 이제는 다시 우리 민간인도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산이 되었지만 대중교통 길이 없어 아직도 오지로 묻혀 있다.
기왕 산 이야기를 꺼냈으니 잠시 돌아보자. 강원도 평강 북쪽 백두대간의 식개산에서 한북정맥이 분기하고, 이어서 장바위산에서 산줄기 하나가 갈라져 평강의 서쪽으로 달린다. 아쉽지만 요즈음은 갈 수 없는 곳이다. 이 산줄기가 철원 동송에서 숨을 고르고 솟구친 것이 이름도 아름다운 금학산(金鶴山: 947m, 일명 외보개산)이다. 다시 서쪽으로 달려 신탄리에서 고대산(832m)을 일으키고 남으로 내달려 보개산(877m, 내보개산), 종자산(643m)을 일으킨다. 이윽고 이 산줄기는 한탄강에 이르러 고개 숙인다.
보개산은 옛 이름이 영주산(靈珠山)이었다는데, 무학대사가 흥림사(심원사) 주지를 하면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금학산, 고대산, 지장산(보개산) 산역(山域)을 한 이름으로 보개산이라 했었다. 금강산을 걸어 다닌 매월당에게 보개산은 오를 만한 산이었을 것이다. 그는 보개산에 올라 마음 한 자락 펼친다.
보개산
보개산의 산세는 푸르고
철원의 가을 색 짙은데
세월은 화살처럼 빠르고
인간사 비단보다도 얇구나
옛 골짜기 산 기운은 고요한데
긴 여로에 세월은 아득하다
무슨 因緣事(인연사)로 떠도는 것일까
닿는 곳이 곧 내 집인 것을
寶蓋山
寶蓋山容碧. 東州秋色多. 年光急似箭. 人事薄於羅. 古壑煙嵐靜. 長途歲月賖. 飄飄緣底事. 到處卽爲家.
그렇구나, 철원 평야의 가을 색은 그때도 노랗게 들을 덮었겠구나. 매월당은 보개산에서 철원 평야를 내려다보며 감회에 젖는다. 떠도는 그에게 세월도 인간사도 아득했겠지. 그저 발 닿는 곳이 그의 집이었겠구나.
그는 이제 화인봉(환희봉) 아래 자리 잡은 암자로 향한다. 석대암(石臺菴)이다.
석대암은 보개산 지장신앙(地藏信仰)의 중심지이다. 지금은 사라져 터만 남았는데 근래에 복원 불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어떤 인연을 지닌 절이었을까?
고려 때 민지(閔漬)의 〈보개산석대기(寶蓋山石臺記)〉에 근거한 이야기에 따르면, 신라 시대 어느 날 이순석과 순득(順得) 두 사냥꾼은 이곳 보개산에서 금빛 멧돼지에게 활을 쏘았다 한다. 멧돼지는 피를 흘리면서 관음봉 쪽으로 달아났다. 도망간 돼지를 쫓아 가 보니 샘물이 있는 곳에 멧돼지는 보이지 않고 어깨에 화살이 박힌 지장보살 석상(地藏菩薩 石像)이 있었다 한다.
이에 형제는 720년(성덕왕 19)에 출가하여 그 샘물 곁에 절을 지으니 석대암이라 한다. 지금도 샘에는 맑은 물이 흐른다.
동문선에 기록된 목은 이색(李穡)의 ‘보개산 석대암 지장전기(寶盖山石臺菴地藏殿記)’를 보면 고려말 이 절에 있던 비구(比丘) 지순(智純)이 목은에게 석대암에 계신 지장보살 석상에 대한 글을 부탁한다. 그때 쓴 글이 석대암 지장전기인데 그 글에는 “지장의 석상(石像)은 3척 남짓하고, 석실(石實)의 높이는 6척이며, 깊이는 4척이요, 넓이는 4척이라 한다. 이제 지순이 지은 집 북쪽 처마가 석실의 위를 덮어 비가 오면 항상 낙숫물이 석실 북쪽으로 흐르게 한 것은 대체로 석상을 비호하게 하기 위함이요, 또 정근(精勤)하는 자를 편하게 하기 위함이라 한다(地藏石像三尺餘. 石室高六尺. 深四尺. 廣四尺. 今純所作之屋. 北簷覆于石室之上. 每雨則簷溜流石室北. 盖所以庇石像. 且以便精勤者云)”고 하였다.
아쉽다. 이제 석실은 찾을 수 없고 지장석상은 어디로 간 것일까? 석대암 터에 오르면 불사(佛事)를 위한 가건물만이 위화감을 느끼게 한다. 다행히 확 트인 터와 깨진 기와편들, 풍상을 견딘 지장영험비(地藏靈驗碑)가 옛 절을 말하고 있다.
매월당의 석대암은 어떠했을까?
석대암
덩굴 잡고 절벽 더듬어 바람계단 오르니
옛 암자 뜰 소나무엔 학 한 마리 깃들었네
숲속 풍경 소리 바람 날려 애절하고
西峰(서봉)에 지는 햇빛, 찬 계곡에 떨어지네
石臺菴
攀蘿捫壁上風梯. 菴古庭松一鶴棲. 林下磬聲風外切. 西峯殘照落寒溪.
그렇다. 석대암 뜰에서 계곡 너머로 지는 오후의 햇살을 보면 아직도 애잔하다. 이제 심원사를 향해 산을 내려온다. 시멘트로 포장을 해 놓아 발바닥과 무릎에 전해지는 압력이 장난 아니다. 도대체 이 산중에 무슨 짓을 한 것일까?
기록이나 옛 지도를 보면 보개산에는 절이 많았다. 가히 불국토를 이루었다 할 만하다. 고려를 보면 수도 송도에서 남으로는 남경(한양) 삼각산이, 동으로는 동주(東州: 철원) 보개산이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송도 이외에 이 두 곳에 불국토를 이루고 싶었던 것 같다. 단순히 종교적 의미에 머문 것이 아니라 힐링의 공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 결과 삼각산과 보개산에는 고려의 명찰(名刹)이 많다. 보개산의 명찰은 심원사, 지장사, 용화사, 운은사, 석대암, 성주암, 세정암, 남암, 안양암 등으로 이어진다.
목은 이색의 ‘보개산(寶蓋山) 지장사(地藏寺)’라는 시의 한 꼭지를 보면,
산에 노는 맛이 사탕수수처럼 달달하니
가경에 들어가는 게 정말 좋다네
바라보는 구름과 함께 무심해지고
계곡 길엔 홀로 그림자와 짝하노니
游山如啖蔗 最愛入佳境 雲望共無心 溪行獨携影
그들은 이렇게 산과 절을 즐겼다.
이제 매월당은 심원사(深源寺)로 내려온다. 지장사, 석대암과 함께 보개산을 대표하던 절이다.
심원사는 금강산 유점사의 말사였다. 이제는 신흥사의 말사다. 647년(신라 진덕여왕 1년)에 영원(靈源)이 창건하였다 하는데, 당시에는 흥림사(興林寺)였다. 859년(신라 헌안왕 3) 범일(梵日)이 천불을 조성했고, 1393년(조선 태조 2년) 불에 탄 것을 1395년에 무학대사가 중창하면서 산 이름을 영주산(靈珠山)에서 보개산으로 바꾸고, 절 이름도 심원사로 고쳤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중건하여 건물만도 250칸이 넘는 대사찰로 발전했으나 1907년에 심원사가 연천 의병 중심지가 되자 일제에 의해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고 말았다.
기록에만 남은 250칸의 당우(堂宇), 32위의 탱화, 1609위의 불상, 탑 2기는 지금 어디에도 흔적이 없다. 다시 중창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또 잿더미로 변하고 군 통제 지역이 되면서 철원 동송으로 옮겨가서 다시 심원사를 개창하였다.
그 후 보개산 옛 골짜기에 심원사를 다시 중창하니 철원 심원사와 혼동 없게 원심원사(元深源寺)라 하였다. 이렇게 해서 현재는 두 곳에 심원사가 자리 잡고 있다.
심원사는 조선 시대에 왕실과도 관련이 있었다. 태종실록에 보면 왕위를 물려 준 태상왕(이성계)은 자주 절을 찾아다녔는데 회암사, 소요사, 심원사, 석왕사였다. 태종 1년 (1401) 3월에는, “태상왕(太上王)이 보개산(寶蓋山)에 행차하니, 임금이 이를 따라 마이천(麻伊川)에 이르러 악차(幄次: 임시 차양)에서 뵈었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숭인문(崇仁門: 동대문) 밖에서 전송하려고 하였었는데, 태상왕이 밤중에 나갔기 때문에 미처 전송하지 못하였다. 이에 갑사(甲士)와 대성(臺省) 각 한 사람씩을 거느리고 마이천에 이른 것이었다.(太上王幸寶蓋山, 上隨至麻伊川, 見于幄次. 上欲率百官, 送于崇仁門外, 太上王夜分而出, 不及送, 乃率甲士及臺省各一員, 至麻伊川)”
태상왕이 복잡한 심경을 풀어내던 곳 중 한 곳이 보개산 심원사였던 것이다. 매월당은 어땠을까? 그는 절집의 고요와 풍경을 감상하고 있다.
심원사
고목 드높은 아래
우뚝한 산속 절집
새는 지저귀고 절 마당 나무는 고요한데
재(齋) 끝난 손님 방 텅 비었구나
높은 산 저녁 볕은 옅어지고
실개천 단풍은 붉어졌다오
가는 곳마다 勝景(승경)인데
어찌 길 그친 곳이라고 슬퍼하리오
深源寺
古木千章下. 岑崟有梵宮. 鳥啼庭樹靜. 齋罷客廊空. 高岫夕陽薄. 小溪楓葉紅. 行行皆勝地. 何必哭途窮.
한편 후세에 보개산 절 벽(壁)에 시(詩)를 걸었다가 죽음을 맞은 이도 있었다. 어우야담(於于野談)을 쓴 유몽인인데 그는 광해군 때 이조 참판을 지낸 북인(北人)으로,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벼슬길을 떠나 초야에 묻혔다. 그는 경기 지방 암행어사도 지내서 보개산 승려 조순(祖純)과도 막역한 사이였다. 아마도 보개산에도 들어와 있은 듯한데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서인 정권에 붙들려 억울한 역모 죄로 처형당했다. 죽음의 빌미가 된 상부탄(孀婦歎: 과수댁의 탄식)이라는 시를 보자.
70세 늙은 과부
七十老孀婦
단정히 빈 방을 지키고 있네
端居守空壼
옆 사람 시집가라 권하는데
傍人勸之嫁
남자 얼굴이 무궁화 꽃처럼 잘 생겼다네
善男顔如槿
여자의 도리 시를 자주 읽어서
慣誦女史詩
여자의 교훈을 조금은 알고 있으니
稍知妊姸訓
흰 머리에 젊은 태도 꾸민다면
白首作春容
어찌 연지분이 부끄럽지 않을까
寧不愧脂粉
늙은 과수댁이 어찌 개가를 하겠느냐고 보개산 절 벽에 써 붙인 시(詩)가 역모의 근거가 된 것이다. 허허.
심원사는 아직 복원 중이다. 옛 사진을 보면 탑도 전각도 우뚝하다. 절을 벗어난 골짜기에는 부도탑들이 도열해 있다. 이곳에서 삶의 답을 찾다가 떠난 이들의 흔적이다. 무엇 좀 찾으셨습니까?
그 곁으로는 연천 지역 의병 활동을 기념하는 기념탑을 세웠다. 조선이 외교권을 잃고 망해가던 그때에 이곳 지방민 수백 명이 불같이 일어나 일제에 저항했다. 일제는 심원사를 비롯한 보개산의 절들은 불태우고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매월당은 후세에 일어날 일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이 길을 걸어 연천으로 갔을 것이다. 1459년 가을날에.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