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 화재경보’는 사진이 다큐멘터리적인 힘을 상실했는지, 여전히 유효한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해줄 책 중의 하나다. 벤야민이 이야기하는 회억(回憶)은 애도가 담긴 기억을 의미한다. 독일어 아인게덴켄(Eingedenken)은 ‘기억하다, 명심하다, 잊지 않다’는 뜻인데 단순한 기억 너머를 가리킨다. 조국의 식민지 전쟁에 얽힌 비극 뒤에 남겨진 기억은 여전히 유령처럼 떠돈다. 이동근은 사진과 인터뷰, 비디오와 아카이브로, 에티오피아 작가 웬디메겐 베레테는 16mm 비디오와 사진, 아카이브를 활용해 ‘회억’의 행위를 수행하고 있다.
이동근, ‘낡은 집: 요새사령부로부터(Old House:From the Fort Command)’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 ‘낡은 집 - 이용악’ 중에서
시인 이용악은 일제강점기 시대 고향을 떠난 유민들에 대한 시 ‘낡은 집’을 썼다. 이 시에서는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신산한 가족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1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이 시는 여전히 유효하다.
프랑스 미술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조르주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 1953~)은 ‘가스 냄새를 감지하다’(이나라 옮김, 문학과 지성사)에서 “실제로 ‘기억의 장소’의 합의된 행렬 속에서 과거의 파국을 기념하는 일과 일어날 화재의 관점에서 현재 상황을 조망하기 위해 과거의 파국을 복기하는 일은 같은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아울러 “위험의 움직임, 징후를 보이는 파국, 광산 갱도 안에 쌓이는 가스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는 일, 심지어 단지 보는 일 하나가 왜 이렇게 어려운가?”라고 묻는다.
사진작가 이동근은 아트아카이브리드모어(AARM)에서 진행 중인 개인전 ‘낡은 집: 요새사령부로부터(Old House:From the Fort Command)’(10월 9~26일)를 통해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복기할 것인지 질문한다. 이용악의 시에 등장하는 이주, 난민의 문제는 현재에도 지속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동근은 사진, 비디오, 아카이브 형식을 통해 아시아 결혼이주여성에 관한 작업 ‘초청장’, 북한의 소년궁전이나 예술선전대에서 전문적인 활동을 했던 이들이 탈북 이후 생계를 잇기 위해 공연을 해야만 하는 탈북민들의 모습을 담은 ‘아리랑예술단’ 등 사진연작을 진행해왔다.
이번 작품은 일제강점기 시절 러일전쟁 군사기지에서 가덕도 신공항 건설을 앞둔 현재까지의 역사적 장소인 가덕도와 지심도, 저도, 시모노세키를 추적했다. 현재 가덕도는 신공항 건설을 앞둔 공간으로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곳이다. 1945년 해방 후 일본군의 병사에 인근 대항마을의 주민들이 들어와 지금까지 거주 중이다. 작가는 특히 일본의 병참기지와 그 이후 마을로 다시 돌아온 진객인 주민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17점의 사진과 신공항 건설로 인해 이주 예정인 가덕도의 주민들을 인터뷰한 비디오 작품 ‘성냥간 집’(2024)과 ‘비 오는 집’(2024), 직접 일본과 각종 경로를 통해 수집한 일제강점기 시절의 다수 군 병영생활과 관련된 시각자료와 관광지로 전락한 조선의 풍경을 담은 사진과 관광엽서 등 아카이브도 볼 수 있다.
단채널 비디오 ‘성냥간 집’은 성냥간(대장간의 방언)에서 태어난 주민 김이문(1947년생) 씨가 어린 시절 가덕도 탄약고에서 놀았던 일, 일본에서 돌아온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득한 집’은 주민 이성태(1955년생) 씨가 낡은 집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았던 이야기를 독백하듯이 들려주는데, 안타깝게도 올해 가덕도 신공항 건설로 인해 곧 이 집을 떠나야 한다. 비디오 작품 외에 1970년대부터 가덕도 외양포에서 선표를 팔던 이야기, 군인들이 섬에 들어 온 일들을 회상하며 들려준 주민의 인터뷰도 읽어볼 수 있다.
작가는 러일전쟁 시기부터 120여 년의 시간차를 두고 도착한 옛엽서(편지)를 전달한다. 가덕도, 저도 등 평화롭게 살던 원주민의 집을 빼앗고, 군사시설로 만들었다가 패망 후 돌아간 일본군들의 막사, 탄약창고, 인공동굴 등은 이제는 주민의 거처가 됐지만 온전한 ‘옛집’을 찾을 수는 없었다. 당시 일본군은 집 한 칸을 2환 50전에 보상했다. 당시 맥주 10병 정도의 가격에 불과했다니, 당시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는 수치다.
일본은 1936년 태평양전쟁을 위해 ‘진해만 요새사령부’와 부산항 방어(1912년 설치)를 위해 지심도를 강제 점령하고 당시 지심도에 거주 중이던 13가구 주민들을 인근 지세포와 장승포로 강제 이주시킨다.
이 밖에도 ‘지심도 기지’ 사진에는 푸른 종려나무를 볼 수 있는데 그 아래 위치한 건물은 일본군 관측소였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국군이 들어와 사용했고, 몇 해 전까지 국방연구소로 활용됐던 곳이다. 작가는 이 사진 연작을 위해 부관페리호를 타고 시모노세키까지 과거의 여정을 밟았다. ‘시모노세키 히노야마 기지’ 사진을 통해 당시 부산, 진해만, 영흥만(원산) 외에도 일본 전역에 만들었던 요새의 형태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지금도 우리는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왕래하는 부관페리호를 이용할 수 있다. 작가는 오랫동안 일본군인과 당시 문화생활상을 알 수 있는 다양한 군과 일반인들의 사진자료와 당시 문화적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 관광사진, 요새를 볼 수 있는 요새지도, 조선의 지형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그린 ‘약진조선’(1930년대) 지도, 일본잡지 부록으로 나온 ‘만주사변지도’(1937), 제국과 식민지 지형도를 색깔로 구분한 ‘세계대지도’(1933)와 엽서, 책, 잡지, 일본병사들이 일본가족에게 보낸 편지(일어), 일본군 병사의 병영 생활을 알 수 있는 문서와 엽서, 러일 전쟁을 그린 석판화 등 방대한 아카이브를 공개했다.
작가는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이 말한 것처럼 ‘매번 파국적 힘을 냄새 맡고, 보고, 예견하고, 알아보고, 예측하기 위해 우리가 되돌아가야 하는 갱내의 가스인 것과 같이’ 사진을 찍고, 자료를 모으고, 보여주기를 반복하고 있다.
웬디메겐 베레테(Wendimagegn Belete), ‘베일을 벗기다’
현재 에티오피아와 노르웨이를 거점으로 활동 중인 웬디메겐 베레테의 ‘베일을 벗기다’(2017)는 현재 진행 중인 광주비엔날레2024 ‘판소리(PANSORI-모두의 울림)’(9월 7일~12월 1일) 본전시에서 만날 수 있다.
베레테의 작업은 에티오피아의 내러티브와 정체성, 역사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기록 사진, 글, 이야기, 비디오 프레임 등의 매체를 활용해 시각자료를 담고 있다. 세대를 거쳐 전승되는 기억이라는 개념, 즉 후성 유전에 관심을 갖고 있는 작가는 현재를 정의하는 과거 경험,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광주비엔날레에 공개된 비디오 설치작품 ‘베일을 벗기다’는 여러 출처에서 수집한 영상과 희귀한 16mm 비디오를 통해 제작한 것이다. 벽면을 가득 메운 거대한 비디오 설치 작품 안에 등장하는 인물초상은 에티오피아를 사랑했던 애국자 3000명이 들어 있다. 반복재생(Loop)되는 이 작품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만 같은 영속성을 갈구한다.
이 작품은 1935년부터 1941년 사이에 에티오피아에서 일어난 반식민지 전쟁과 저항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사건은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잊혀진 사건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베니토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식민지 경험이 없었던 에티오피아 시민들은 무기를 들고 저항했다. 전쟁이 이어지던 5년 동안 수십만 명이 학살당했다. 이런 저항과 연대는 아프리카 반식민지 운동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거대한 벽화처럼 설치된 비디오작품 ‘베일을 벗기다’는 알프레도 쟈의 ‘진정한 사진(Real Pictures)’(1995) 작품과 대조된다. 쟈는 르완다의 참혹한 실상을 보여줄 60장의 사진을 60개의 검은 상자에 담아 봉인한다. 상자 위에는 사진의 내용을 설명한 간단한 문장을 기록한다. 그는 인종학살을 목격했지만 재현으로서의 사진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반면 웬디메겐 베레테는 어딘가에 떠도는 사진(봉인됐을 수도 있는)을 부지런히 발굴해 실어 나른다.
또 다른 작품인 멀티미디어 벽화 ‘당신의 시선이 나를 만든다(Your Gaze Makes Me)’(2021)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과거를 들여다본다. 온라인 아카이브에서 수집한 민족지학적 초상화를 거대한 격자형 구성으로 배치해 에티오피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초상화 이미지에 보석, 도구, 가면, 종 등 인양된 아프리카 유물을 겹겹이 쌓아 올렸다. 아프리카 전통조각에서 보이는 얼굴을 쌓는 방식처럼 잊혀졌을 조상의 역사를 소환한다.
이 밖에도 암하라어 단어를 사용한 ‘순간’ 작업에서도 역사적 자료, 개인과 집단적 경험을 통해 문화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 있다. 에티오피아 문화유산과 정체성에 중점을 두고 작업하는 그는 신문기사의 사진, 편지, 녹음된 대화, 다양한 직물 등의 자료를 수집한다. 에티오피아의 흩어진 파편을 모으고 재조립한 풍경은 매우 복잡해 보이지만 아름다운 그들의 문화를 경험케한다.
작가는 과거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민족지학적 사진과 디지털 아카이브를 중요시하고 있다. 그는 사진 위에 오브제를 올려는 조합을 통해 내러티브를 발생시키는데 결국 관람자 한명 한명의 기억을 얹을 때에야 작품은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작가는 한 잡지 인터뷰에서 “노르웨이로 유학을 왔을 때 멀리서 조국의 역사와 정체성에 대해 바라보게 됐다”고 말했다. 이번 광주비엔날레에서 던지는 질문은 인류 공동체에 울려 퍼지는 연대와 성찰의 화음이다. 웬디메겐 베레테의 질문은 우리에게 정치적, 문화적 관계를 통해 잊힐 뻔 한 에티오피아의 역사 앞에 세운다. 우리 모두는 위대한 목격자일 수 있다.
<작가 소개>
이동근(LEE DONGKEUN, b.1966~)은 부산 출생으로 경성대학교 멀티미디어 대학원 사진학과 순수사진전공 졸업 후,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다큐멘터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북 아시아에서에서 진행되는 이산의 과정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난민에 주목하고 다큐멘터리 직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결혼이주여성과 가족, 탈북자 등 디아스포라에 관해 심층적인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초청장,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 2013 포함해 11번의 개인전과 PHOTOVILLE2018, 뉴욕, USA외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으며, 제10회 일우사진상 다큐멘터리 부분 수상, 제5회 KT&G 상상마당 한국사진가 지원프로그램 최종작가로 선정됐다. 부산대학교, 부경대학교, 부산교육대학교, 경성대학교, 부산시립미술관, 고은사진미술관, KT&G 상상마당에서 사진관련 강의했으며, 현재 경성대학교 사진학과 외래교수로 재직 중이다. 중국 핑야오국제사진페스티벌 한국전시 디렉터를 지냈다. 현재 ‘아리랑예술단’(PSS. 싱가포르. 10월), ‘가득한 가덕’전(한성1918, 12월)을 기획했고, 작가로도 참여한다.
웬디메겐 베레테(Wendimagegn Belete, b.1986~)는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출생했다.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및 노르웨이 오슬로 거주 중이다.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대학 미술디자인학부(AAU Alle School of Fine Arts and Design) 졸업 후 노르웨이의 트롬쇠 현대미술 및 문예창작아카데미 현대미술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베레테는 ‘코드스위치’, 크리스틴 엘레야데 갤러리, 영국 런던(2022); ‘이오데포지토’, 트라베소, 이탈리아(2021); ‘나는 이걸 예술이라 부른다’, 노르웨이 국립 박물관, 오슬로(2022); 예술 선두, 미국 마이애미(2021); 아세르노체 국제 비엔날레, 멕시코 오악사카(2022); 제6회 차세대 예술 상, 핀축 아트 센터, 키이우; 에티오피아 국립 박물관, 에티오피아; 방콕 비엔날레(2023)에 참여했다.
글: 천수림(사진 비평)
이미지 제공: 아트아카이브리드모어, 광주비엔날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