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이후 서구열강의 아시아 침탈은 동아시아 지형도를 바꾸어 놓았다. 전통을 이어가던 소수민족, 특히 바다를 삶터로 삼았던 바다의 유목민들은 표류했다. 필리핀 타이완을 흐르던 쿠로시오 해류는 서로 교류하며 문명의 꽃을 피웠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2월 16일까지 열리는 ‘2024 제주비엔날레’에 참여한 작가들은 섬 지역의 국경 지대를 유목 공간으로 제시하고 표류하는 소수민족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이들의 문화 정체성은 여전히 불안정한 정세로 인해 여전히 흔들린다. 참여작가 중 특히 앤드류 테스타와 후이잉 오레와 완 오스만은 ‘바다집시’들을 조명했다.
“아파기(阿波伎):생몰년대 미상. 탐라의 왕자이다. 661년 당나라에서 귀국하던 일본 사신의 배가 풍랑을 만나 탐라국에 대피했다가 귀국할 때, 왕자 아파기(阿波伎) 등 9명이 이들을 따라 일본에 간 일이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남아 있는 단 몇 줄. 2024 제주비엔날레 ‘아파기 표류기:물과 바람과 별의 길’은 이 이야기에 출발점을 뒀다. 표류의 역사를 간직한 섬 제주는 그간 자연과 종교, 문화와 정치 등 제주도를 이룬 정체성을 ‘아파기’의 표류를 통해 조망한다.
제주는 쿠로시오 해류(북적도 해류가 태평양을 횡단해 서쪽으로 흐르며 그것이 필리핀, 타이완에서 굽어서 쿠로시오 해류가 된다)를 따라 형성된 남방문화와 칠성신화, 샤머니즘 북방문화가 서로 공존하고, 충돌하며 독특한 문화지형을 만들어냈다. 이번 비엔날레는 아파기라는 이야기꾼의 표류를 운한뫼(은하수를 끌어당길 만큼 높은 산), 네위디(노질하는 곳), 사바당(낙도), 칸파트, 누이왁, 자근태 등의 내러티브로 구성된다.
이번 전시에는 독일, 영국, 폴란드, 이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타이완, 캐나다, 미국, 한국 작가들 14개국 40명(팀)이 참여했다. 작가들은 다양한 배경에서 자국의 정치, 사회적 이슈를 다룬다. 특히 아시아 지역에 초점을 맞춘 사진과 영상, 다큐멘터리들은 국가시스템과 전통적인 정체성과 소속감의 문제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앤드류 테스타 ‘모켄족’
제주도립미술관에 설치된 앤드류 데스타의 흑백사진 연작 ‘모켄족(THE MOKEN)’은 대형 사진설치 작품으로 작대기를 들고 바다 속을 누비는 한 어린아이와 마주하게 된다. 바다 속에서도 눈을 뜨고 있는 모습을 통해 이곳이 그들의 생활터전임을 짐작케 한다. 절제된 흑백 톤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자유롭게 누비는 바다 속과는 상반되게 이들은 삶의 터전을 잃었다. ‘바다 집시(SEA GYPSIES)’로 알려진 모켄족은 태국서부 해안에서 60km 떨어진 수린 제도에 사는 원주민을 일컫는다.
모켄족은 태국 서부 해안의 무코수린 섬에 사는 약 200여 명의 바다 집시 유목민 부족으로 바다에서 어업을 하거나 해저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며 살아왔다. 오랫동안 미얀마와 태국 연안의 섬 사이에서 거처를 옮기며 생활해온 이들은 스스로는 시민권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법적으로는 태국에 속해 있다.
현재는 태국과 버마 국경을 넘는 일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태국의 국립공원인 수린제도에서 나무 벌채가 금지돼 있어 이동에 필요한 배를 만들 수도 없게 됐다. 관광명소가 된 이곳에서 모켄족은 생계를 위한 어업만 허용되고 산호나 해저에서 채취한 조개를 팔 수 없다. 현대문물이 밀려들면서 그들은 예전의 생활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됐다. 앤드류 테스타는 그들의 언어에 ‘원한다’는 단어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 연작은 2004년 지진 해일 발생 3주 전에 촬영한 것이다. 이들은 해일 이후 생활 터전을 잃었고 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후이잉 오레·완 오스만 ‘보더랜드’
바다 집시로도 알려진 ‘바자우족’의 전통가옥을 재현한 공간에 전시된 사진과 영상 작품 보더랜드는 싱가포르 사진작가 후이잉 오레와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인 완 오스만의 작품이다. 이 팀은 필리핀 남부의 술루해와 말레이시아 보르네오섬 사바주 경계에 위치한 외딴 지역인 ‘타위-타위’에서 표류하는 삶을 기록했다.
필리핀 민다나오 지역에 위치한 타위 타위와 사바, 술루는 무슬림 영토였다. 서구 열강의 약탈 이후 현대에는 분할돼 두 국가의 경계를 이루며 여전히 분쟁의 씨앗을 품고 있는 적대적이고 위험한 변경지대가 됐다. 필리핀 술루해와 말레이시아 사바주 경계에 위치한 타위타위 섬은 천혜의 자연을 품고 있어 아름다운 경관과 달리 여전히 이슬라믹 스테이트(ISIS) 단체인 ‘아부 사야프’의 영향력은 점점 커지고 있어 지역의 긴장은 한층 고조됐다.
바다 집시로도 알려진 바자우족은 생애 대부분을 어업과 무역으로 생계를 이어왔다. 마치 자생하는 술루 큰부리새처럼 바다와 국경을 넘나들며 살았던 이들은 이제 현대적 국가의 개념 안에서 예전의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은 불가능해졌다.
이들의 삶은 국경을 넘어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불법체류자로 살아가야 하거나 아부 사야프와 같은 단체의 전사로 유입되거나 국제 인신매매 조직의 표적이 되는 위험에 여전히 직면해 있다. 후이잉 오레와 완 오스만은 정착지를 잃고 떠도는 사람들과 고향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담았다.
이번 전시 설치는 타위-타위 지역의 전통적인 주거양식 안에 설치에 마치 이들의 거실로 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후이잉 오레는 싱가포르의 시골에서 자랐지만 도시 환경으로 이주했다. 이후 오레는 개발로 인해 영향을 받은 사람과 장소의 이야기에 매료됐고, 특히 동남아시아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오레는 2018년 라오스의 버려진 중국 카지노 마을 시리즈로 IPA 어워드의 최고 영예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오레는 런던에서 3년 동안 일하고 생활한 후 싱가포르로 돌아와 동남아시아 사회의 발전에 대한 조사에 집중해왔다. 보더랜드도 그 동안 관심을 기울여온 사람과 장소에 대한 이야기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번 제주비엔날레는 문명, 환경, 이주, 난민 등 동시대 이슈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에 대해 고찰한다. 앤드류 테스타나 후이잉 오레 외에도 인도네시아 웨스트 자바 지역의 전통 농경 공동체 마을의 우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아구스의 ‘트리탕투’, 태국의 예술영화 감독 자크라왈 닐탐롱의 영상작품도 만날 수 있다. 문명의 여정 속 표류로 인한 문화적 교차점 위에 놓인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 옛날의 아파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소개>
앤드류 테스타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30년이 넘는 경력 동안 영국, 발칸 반도, 중동 지역에서 분쟁, 인권, 환경 관련 이슈를 촬영하며 폭넓게 활동해 왔다. 1990년대 초 가디언과 옵저버 신문사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며 사진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0년 동안 그는 영국에서 성장하는 환경 시위와 동물 권리 운동을 기록했고, 1999년에는 코소보 전쟁을 취재하면서 발칸반도로 관심을 옮겼다. 1999년 말 코소보로 거점을 옮겨 동유럽, 중앙아시아, 중동 전역의 사건을 취재했고, 2005년에는 뉴욕으로 이주해 5년 동안 거주했다.
최근에는 브렉시트로 인한 정치적 격변과 이로 인해 영국과 아일랜드에 미칠 장기적인 영향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뉴욕 타임즈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으며 그의 글은 뉴스위크, 타임, 스턴, 지오, 파리 매치, 더 슈피겔, 선데이 타임즈 매거진, 인디펜던트 매거진, 마더 존스, 마레, 그란타 등의 잡지에 널리 게재됐다.
월드 프레스 포토상(1994, 2002, 2006), 게티 그랜트 편집 사진상(2006), NPPA 베스트 오브 포토저널리즘 어워드(2006, 2008), 앰네스티 미디어 어워드 올해의 포토저널리스트(1999, 2007), POYi 어워드(2001, 2005, 2006) 등 다양한 수상경력을 쌓았다.
앙코르 사진 페스티벌(2005, 씨엠립), 비자 푸르 이미지(2006, 프랑스 페르피냥), 노더리히트(2007), 아르테 포토 페스티벌(2008, 이탈리아 안코나), 양곤 사진 페스티벌(2012) 등에 참여했다.
후이잉 오레, 완 오스만은 사진작가와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으로 구성된 팀이다. 필리핀 남부의 술루해와 말레이시아 보르네오섬 사바주 경계에 위치한 외딴 지역, ‘타위-타위’에서 표류하는 삶을 기록했다.
오레는 2010년 영국 런던 커뮤니케이션 대학에서 포토저널리즘 및 다큐멘터리 사진 석사 과정을 마쳤다. 2018년 전 세계 6개 대륙에서 6명의 비주얼 스토리텔러를 발굴하고 홍보하는 ‘월드 프레스 포토 6×6 글로벌 인재 프로그램’에 선정됐다. 같은 해에는 라오스의 버려진 중국 카지노 마을 시리즈로 IPA 어워드의 최고 영예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2010년부터는 국내외 사진 페스티벌, 박물관, 갤러리에서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2013년에는 싱가포르 아이콘 드 마르텔 꼬르동 블루의 후보에 올랐다.
글: 천수림
이미지 제공: 제주비엔날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