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윤석열 대통령의 체포 뒤 KBS는 ‘해외 언론이 다룬 K 대통령 잔혹사’라는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 르몽드 등 세계 유수의 언론이 이승만,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로 이어지는 한국 대통령들의 비참한 말로, 법적 처분을 특집으로 다뤘다는 내용입니다.
해외 언론들은 이렇게 K 대통령들의 잔혹사를 쉽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K 대통령들에 대한 법적 조치 등 빅뉴스만 외신에 보도되고, 그 뒷면의 속사정, 즉 한국 언론의 문제에 대해선 그들이 잘 알 리 없기 때문입니다.
'참담할 대통령' 계속 생산하는 K 언론을 그들이 안다면…
K 언론의 잔혹사는 이런 식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이 뭘 잘해서 열린우리당이 표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다”고 말했고, 당시 야당은 이를 ‘대통령의 사전 선거 운동’이라고 문제 삼았습니다. 당시 선관위는 “사전선거운동 금지 규정에 위반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통령은 중립을 지켜달라”는 권고에 그쳤지만, 야당과 여권 내 반발 세력들은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작년 총선에서는 어땠나요? 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여당 대표를 계속 갈아치우며 당내 선거에 개입했고, 경합 선거구를 직접 찾아다니면서 23차례나 ‘민생 토론회’라는 것을 열고 무려 1천조 원대 재정 투입을 약속하면서 그야말로 노골적으로 선거운동에 나섰지만 K 언론들은 내용 보도에만 열중했지, 선거법 위반 따위는 거의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20세기 때의 ‘K 대통령 잔혹사’야 워낙 어려운 시절이라 그랬다고 치고, 21세기 들어 탄핵되고 투옥된 K 대통령들, 즉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의 사례를 보면, 그 전개 과정에서 언론들이 엄청난 기여를 했습니다.
진보든 보수든 '기성 언론'은 비슷한 행태를 반복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최후에는 공작 정치 차원의 ‘논두렁 시계’ 보도가 큰 기여를 했고, 검찰과 언론이 짝짜꿍을 주고 받는 이른바 검언유착이 직접적인 발화선이 됐습니다. 경향신문, 한겨레신문처럼 진보지로 통하는 언론들도 논두렁 시계 비판에 적극 나섰지요.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 때는 이른바 ‘BBK-다스’ 비리 문제가 크게 거론됐지만 당시 검찰은 “혐의 없다”는 결론을 내려줬고, 언론이 이를 받아쓰기하면서 ‘의혹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당선과 취임을 언론이 적극 밀어줬습니다.
2012년 대선에선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박근혜는 아주 칠푼이”라는 발언을 했지만, 언론들은 이를 가십 정도로만 다뤘고, 박근혜는 당선됐습니다. 국민들은 4년 뒤에야 YS의 이 발언이 아주 적확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손바닥에 왕(王) 자, 긴 흰 눈썹 부착 등으로 무속에 푹 빠져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냈고, 이른바 본-부-장(본인, 부인, 장모) 비리에 대한 문서가 돌아다니면서 당시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이 “윤 후보의 방어가 어렵겠다”며 대통령 불가론을 내놨지만 흐지부지되고 말았지요.
'무속, 주가조작 의혹' 후보가 구미 선거판에 나선다면?
2022년 대선을 앞두고 본-부-장 비리의 세세한 내용을 파헤친 ‘윤석열 X파일’이란 책이 출판됐고,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이 jtbc를 통해 보도됐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언론들이(이번에도 역시 경향-한겨레까지 포함하여) 검찰이 던져주는 뉴스를 성실히 옮겨 쓰면서 윤 대통령은 0.73%라는 아슬아슬한 표 차이로 당선됐습니다.
KBS 보도에 따르면 영국 BBC는 “한국의 정치적 위기는 끝나지 않았고, 한남동 관저 앞 시위대는 깊은 균열을 보여준다”고 보도했고, 프랑스 언론들의 윤 체포 기사에는 “한국은 불안정한 아침의 나라가 됐다” “요즘은 북한이 더 조용하다” “한국 법을 (프랑스에) 적용한다면 우리 정치인들과 의회 의원들 절반이 감옥에 가게 될 거다”라는 댓글이 남겨졌다고 합니다.
한국의 이런 정치적 균열, 불안정한 나라를 만든 주역 중의 하나가 K 언론입니다. K 언론이 이런 균열-불안정을 만드는 주요 기법은 ‘편들지 않는 보도 태도’입니다. 광화문에서 대통령 탄핵 찬-반 집회가 열리면, 그 집회 참여자의 숫자 또는 정당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찬성 집회도, 반대 집회도 열렸다”고 균등하게 보도하는 방식입니다.
정상 세포와 암 세포를 공평하게 다뤄주는 암 전문의?
K 언론들의 이런 ‘불편부당’ 태도에 대해 유시민 작가가 얼마 전 유튜브 방송에서 절묘한 비유를 했습니다. ‘암 환자 몸에서 싸우는 정상 세포와 암 세포에 대해 모두 옳다고 하는 태도’라는 비유입니다. 의사라면 정상세포를 살리고, 암세포를 죽여야 하는데, 한국의 이른바 리거시(기성) 언론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유 작가는 “리거시 언론은 발암물질”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박성제 전 MBC 사장도 지난 12월 31일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이 있고, 하나는 과학이고 하나는 주장인데, 학교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을 같은 비율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 등가성의 오류’”라고 꼬집었습니다.
K 언론들이 정말로 이처럼 ‘절대적 불편부당’ ‘등가성’을 지향한다면 한일 쟁점 사항을 보도할 때도 지금처럼 ‘한국은 옳고 일본 극우는 틀리다’ 식으로 보도하면 안 됩니다. 왜냐면 일본 극우들이 “한반도에 근대 국가를 세운 것은 일본” “대륙 공산 세력의 일본 침략을 막기 위해선 일본 군이 한반도에서 마음대로 활약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 등에도 모두 그들 나름의 근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K 언론들이 ‘절대적 등가성’을 지향한다면 앞으로 한일 쟁점들에 대해서도 절반씩 균등 보도를 함으로써 한국 독자들의 식견을 넓혀주길 바랍니다.
K 언론들의 ‘거짓 등가성의 오류’가 절대적 해악을 발휘하는 때는 선거 국면에서입니다. 한국 역대 대통령들이 계속 잔혹사를 겪는 바탕에 바로 ‘거짓 등가성의 오류’가 있습니다.
미국 주요 언론들은 선거 때가 되면 ‘인도스(endorse)’라는 걸 합니다. 경쟁하는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하는지 분명하게 밝히는 방식입니다. 윤석열과 이재명이 팽팽하게 경쟁한다면 선거를 앞두고 예컨대 뉴욕타임스는 이재명을, 뉴욕포스트는 윤석열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고 지지 이유를 기사로 써놓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편부당하지 않으면’, 즉 취임 뒤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후보를 공개 지지한 언론사는 사과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기사가 남아 있으니 “우리가 그렇게 잘못된 후보를 공개 지지해 나라가 이처럼 위기에 빠졌으니 통렬히 반성한다”고 밝혀야 할 것이고, 유권자들은 “그러니 너희는 폐간하라”든지 “엄청난 규모의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소송을 걸 수가 있게 됩니다.
'편들고 책임진다'는 미국의 인도스 시스템
반대로 K 언론의 불편부당 시스템에선 이런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이런 반론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언제 윤석열을 일방적으로 지지했냐? 윤에 도움되는 기사도 쓰고, 이재명에 도움되는 기사도 쓰지 않았나? 또 윤 탄핵 정국에선 윤에 대한 비판 기사도 쓰지 않았냐?”고 반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도 옳고 일본도 옳다’ ‘암세포도 씩씩하고 정상세포도 씩씩하다’ ‘진화론도 있지만 창조론도 있다’는 식의 보도 자세는 정치적 균열을 키우나요, 죽이나요?
프랑스의 댓글은 “한국 법을 (프랑스에) 적용한다면 우리 정치인들과 의회 의원들 절반이 감옥에 가게 될 거다”라고 했다지먄, 이 프랑스 독자가 모르는 게 있죠. 프랑스와는 달리 한국에는 감옥에 가게 될 만한 정치인들은 과감히 ‘불편부당하게’ 보도해주는 언론들이 수두룩하다는 사실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