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향 전남을 대표하는 전남도립미술관은 지난해 굵직한 전시로 그 위상을 뚜렷이 했다. 특히 지역에 머물러 있지 않고 국내외 교류를 활발하게 펼쳤다.
지난해는 연간 15만 명의 관람객이 찾아 공립미술관으로서 문화 예술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 모든 순간에 이지호 관장이 있었다. 2020년 취임해 지금까지 이 관장은 자신의 모든 것을 전남도립미술관에 바쳤다. 이 관장과의 인터뷰는 한 미술관이 성장하는 과정과 미래를 향한 비전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지난 한 해 좋은 전시와 콘텐츠가 많았는데, 애착이 가는 것이 있다면.
“벨기에의 젊은 작가 리너스 반 데 벨데의 <나는 욕조에서 망고를 먹고 싶다> 전시와 한국 만화계의 거장 허영만 작가의 <종이의 영웅, 칸의 서사> 전시는 대중성과 예술성을 조화롭게 융합한 사례로, 현대 미술계와 대중문화의 경계를 탐구하며 관람객에게 독창적인 경험을 선사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리너스 반 데 벨데는 평범한 일상의 소재를 초현실적인 상상력으로 변모시키는 독창적인 작업 방식을 통해 관람객의 공감을 끌어냈습니다. 그의 전시는 평범한 욕조라는 일상적 공간을 상징적으로 확장시켜 관람객에게 꿈과 현실, 가능성과 한계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졌습니다. 특히 그의 작품에서는 생생한 묘사와 몽환적인 상상력이 결합하여 현대인의 무의식과 내면에 깊은 울림을 주었으며, 예술이 일상적 소재를 통해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한편, 허영만 작가의 <종이의 영웅, 칸의 서사> 전시는 만화라는 친숙한 매체를 통해 대중적 감수성과 깊이 있는 서사를 동시에 전달하며 관람객의 큰 호응을 끌어냈습니다. 작가는 기존 만화의 틀을 뛰어넘어, 한 컷 한 컷에 담긴 서사와 감정을 통해 현대인의 복잡한 정서를 표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특히 이 전시는 칸이라는 형식적 요소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며, 종이라는 전통적 매체와 디지털 시대의 감각을 조화시켜 현대성과 전통성을 동시에 탐구했습니다. 관람객은 그의 작품을 통해 공감과 위로를 느끼는 동시에, 만화라는 매체가 단순한 오락을 넘어 예술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경험했습니다.”
-올해 전남도립미술관의 비전은 무엇이며, 관장으로서 어떻게 운영할 계획인가요?
“올해는 전남도립미술관 개관 5주년을 맞이하는 매우 뜻깊은 해입니다. 지난 5년간 전남도립미술관은 지역을 넘어 국내외 미술계에서 수준 높은 전시와 창의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그 위상을 확고히 하였습니다.
개관 이후 미술관은 지속적으로 예술적 가치와 대중적 접근성을 결합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며, 공공 미술 기관으로서의 소명을 충실히 수행해 왔습니다. 또한, 600여 점에 달하는 수준 높은 소장품을 체계적으로 수집 및 관리하며, 미술관의 시스템과 운영 체계가 안정적으로 정착되었습니다. 이러한 성과는 지역 문화예술 발전의 토대가 되었을 뿐 아니라, 미술관이 지향하는 비전의 실현 가능성을 증명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전남도립미술관은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하고자 합니다. 앞으로는 미술관의 대중화와 더불어 대중과 예술이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하는 데 역량을 집중할 계획입니다. 이를 위해 홍보와 교육 부문을 대폭 강화하고, 더 다양한 관람객층이 미술을 쉽게 접할 기회를 확대하겠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대중의 요구를 따라가기보다는, 미술관이 지닌 공적 역할을 바탕으로 새로운 예술적 담론과 실험적 시도를 통해 예술의 경계를 확장하고, 선도적인 기관으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특히 전남도립미술관은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예술적 대화를 통해 새로운 미술적 경험을 창출하는 데 기여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과거의 유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 지향적인 비전을 바탕으로 지역을 넘어 글로벌 미술계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미술관으로 성장하겠습니다.”
-현재 전시 중인 ‘미래가 된 산수’는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전시인데요. 이 전시를 기획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전남도립미술관은 다양한 현대미술을 수용하는 열린 복합 문화 공간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장르를 확장하고 영역 간의 경계를 허무는 다원 예술, 발전하고 있는 과학기술을 접목한 융복합 예술 등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다채로운 예술세계를 소개하는 전시를 매년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미래가 된 산수 : 미구엘 슈발리에, 이이남》展은 프랑스와 한국을 대표하는 디지털 아티스트들의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를 수용하는 미래 자연을 디지털 예술로 펼치는 특별한 자리입니다.
프랑스의 미구엘 슈발리에는 유럽 인상주의, 표현주의 등을 기반으로 AI 인공지능 기술을 결합하여 화려한 색채로 가상의 풍경을 표현합니다. 한국의 이이남 작가는 고전 회화를 기반으로 발전해 가는 과학기술을 접목하여 사의적 풍경을 표현합니다.”
-전남 지역 미술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 전남 지역 미술은 지역적 정체성, 자연환경, 역사적 배경, 그리고 지역민의 생활양식을 바탕으로 독특한 미적 흐름을 보여줍니다. 특히 풍부한 자연 경관인 섬, 바다, 산과 농촌 문화를 배경으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주제로 한 작품이 많으며, 해안선과 섬의 생태적 특성이 예술 작품에서 자주 반영됩니다.
이러한 작품들은 지역사회와 전통문화를 중요하게 다루며, 민속적 요소나 지역적인 상징이 자주 포함되는데, 이는 한국화나 민화 등 전통적 미술 양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로 이어집니다.
또한, 민중미술의 강한 흐름이 자리 잡았으며, 사회적·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현실 비판과 공동체 의식을 중심으로 하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이와 함께 전통적인 한국미술의 양식과 현대적인 미술 형식이 융합된 작품이 많아, 한지, 먹, 도자기 등 전통 매체를 현대적 설치미술이나 퍼포먼스와 결합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적 유산의 중심지 중 하나로서, 불교미술, 조선시대의 미술적 유산, 그리고 전통 등이 현대 미술과 공존하는 점이 특징입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전남의 미술은 자연과 감성을 추구한 오지호, 김환기 같은 대표적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그 독창성과 중요성을 한국 미술사에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지역 미술 발전을 위해 올해 준비 중인 전시는 어떤 것이 있나요?
“2025년은 전남수묵비엔날레가 열리는 중요한 해로, 미술관에서는 수묵비엔날레와 연계한 국제전시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작년 학술연구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했던 녹우당과 운림산방에 대한 남종화 연구자료를 토대로 진행되며, 전통적 가치를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하는 한편, 동서양의 서로 다른 미술적 접근방식을 비교하는 장을 마련할 예정입니다.
이를 위해 한국 남종화의 전통과 연계된 작품들과 더불어 프랑스의 현대 추상회화 거장 피에르 술라즈(Pierre Soulages)를 포함한 동서양 예술가 20여 명의 작업을 한자리에 모아 동시대적 대화의 장을 마련합니다. 이러한 전시는 단순히 전통을 계승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대미술의 관점에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한국화의 확장 가능성과 동시대적 의의를 모색하고자 합니다.
지역 출신 작가들을 조명하는 다양한 기획전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오는 3월에는 여수 출신의 강종열 작가 초대전이, 12월에는 장흥 출신의 김선두 작가 초대전이 열릴 예정입니다. 두 작가는 각각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통해 지역의 문화적 뿌리를 형상화하며, 지역 미술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이번 초대전은 그들의 예술 세계를 심층적으로 조망할 소중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또한, 청년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기 위한 전시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역 예술 생태계를 활성화하고 차세대 작가들에게 창작과 성장의 발판을 제공하는 데 기여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청년 작가들의 참신한 시각과 실험적 시도가 담긴 작품들은 지역 미술계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미술관은 이를 통해 한국 전통과 현대미술, 나아가 동서양 미술의 융합과 소통의 가능성을 탐구하며, 지역 예술의 세계화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전남이라는 지역 특성상 사회적 담론을 예술로 표현한 작품들에 대한 관심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관장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전라남도 지역은 대한민국이 선진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역사적 사건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이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중요한 상흔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국가 폭력에 의해 억압당한 인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으로 머물지 않고, 현재와 미래 세대가 반드시 기억하고 성찰해야 할 중요한 사회적 담론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사실과 진실에 대한 직접적 논의도 중요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드러나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진실을 예술적으로 조명함으로써 관람자에게 더욱 깊은 통찰과 감각적 체험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예술은 단순한 기록의 도구를 넘어, 집단적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사회적 회복을 도모하는 강력한 매개체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전남도립미술관은 이러한 예술적 사명을 깊이 인식하며, 사회적 담론을 담은 예술 작품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지역과 국가의 아픈 역사를 재해석하며 치유하는 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지역의 특수성을 넘어 인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예술을 통한 연대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전남도립미술관의 미션 중 하나가 남도의 잠재된 예술성 제고입니다. 남도만의 예술성은 무엇인지, 이를 어떻게 더욱 끌어올릴 계획인지요?
“풍부한 예술적 전통과 명성을 이어온 남도는, 한국 미술사의 중요한 중심지로 자리매김해 왔습니다. 화순 출신의 오지호, 고흥의 천경자, 신안의 김환기 등 한국 미술사의 대표적인 거장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남도의 문화적, 예술적 유산은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한국 현대미술의 미래를 모색하는 데 있어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특히, 전남 수묵비엔날레와 연계된 전시 기획은 남종화 아카이브 연구를 기반으로, 남도가 지닌 예술적 가치를 더욱 심화시키고 세계적인 차원에서 재조명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전통 회화의 정수를 담고 있는 동시에, 시대와 문화의 변화를 반영하며 현대 미술과도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이를 발굴하고 연구하며, 남도의 예술적 자산을 보다 폭넓은 시각에서 해석하는 작업은 한국 미술의 전통과 현대성을 연결하는 중요한 가교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전남도립미술관을 어떤 미술관으로 발전시키고 싶으신지요.
“전남도립미술관은 무엇보다도 도민들에게 사랑과 지지를 받는 미술관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도민들에게 친숙하면서도 동시에 문화적 자부심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기능하는 것은 지역 미술관으로서의 본질적 역할을 다하는 길이라 믿습니다. 이를 통해 지역 주민들이 예술을 일상적으로 향유하며, 자신들의 삶 속에서 미술관을 중요한 문화적 동반자로 인식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과 활동을 지속적으로 제공할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선진 미술관으로 도약하여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관으로 성장하고자 합니다.
특히, 지역의 전통과 역사를 기반으로 한 독창적이고 차별화된 콘텐츠를 발굴하고, 이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여 국제 예술 무대에 소개함으로써 전남 지역의 예술적 정체성과 가치를 전 세계와 공유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또한, 글로벌 예술 담론을 지역에 도입하고, 지역 주민들이 국제적 수준의 예술을 접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미술관이 지역과 세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허브로 기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남도립미술관은 지속 가능한 운영 전략과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을 도입하고, 지역 사회와의 협력을 강화하며, 전문성을 갖춘 인력 양성과 적극적인 연구 활동을 병행해 나가겠습니다.”
<문화경제 안용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