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수교 60주년③] 한류의 원조, 조선통신사

한 번 방문 시 400~500명 움직여… 일본인에 열광적 환영받아

김응구 기자 2025.07.23 17:06:17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에 있는 ‘류호지’는 1711년 조선통신사가 에도에 도착하기 네 번째 전 숙박 장소였다. 사진=김응구 기자
 

200~400년 전에도 일본에는 ‘한류(韓流) 스타’가 있었다.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가 그들이다. 조선시대 때 일본으로 보낸 공식 외교 사절단으로, 조선의 국왕이 일본 막부(幕府) 장군(將軍·쇼군)에게 보낸 사신(使臣)이다. 거꾸로 일본 막부 장군이 조선 국왕에게 보낸 사절단은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로 불렀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여 년간 열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방문했다. 한 번 방문할 때마다 정사(正使), 부사(副使), 종사관(從事館) 등 400~500명이 움직인 대(大)사절단이다. 당시 조선의 수도 한양(漢陽)에서 일본 수도 에도(江戸·옛 도쿄)까지 약 3000㎞를 오가는 동안 일본 백성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고 각 계층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조선통신사가 에도까지 가는 동안 실제 들렀던 몇 곳을 추려본다.

가나가와현(神奈川縣) 가마쿠라시(鎌倉市)에는 ‘류호지(龍寶寺)’가 있다. 가마쿠라는 800년 역사의 고도(古都)다. 12세기 말부터 150여 년간 일본 정치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에도시대(1603~1867년)로 접어들면서 농업과 어업 중심의 한촌(寒村)으로 모습이 바뀌었다. 가마쿠라막부는 일본 최초의 무사(武士) 정권이다. 1185년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가 수립했다.

류호지는 1711년 조선통신사가 에도에 도착하기 네 번째 전 숙박 장소였다. 워낙 튼튼하게 지어 관동대지진 때도 망가지지 않았다.

사이타마(埼玉)현 히다카(日高)시에 자리한 ‘고마(高麗)신사’는 우리에게도 의미 있는 곳이다. 이 신사를 알기 위해선 고마군(郡)의 역사를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한다.

668년 고구려가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후 고구려인들은 쫓기듯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 그 당시 넘어온 고구려인만 1799명. 그들은 이곳에서 도래인(渡來人)으로서 삶을 살았다. 일본에선 이들을 ‘고마히토(高麗人)’ 즉 고려인이라고 불렀다. 이후 716년 야마토(大和) 정권은 무사시쿠니(武藏國)에 고마군을 설치하고, 간토(關東) 지방 일원에 살던 고구려인들을 모아 이곳에서 살게 했다. 그리고 초대 군사(郡司・군수)에 고구려 왕족이었던 약광(若光)이 취임했다. 약광은 고구려 보장왕의 서자(庶子)다.

고구려인들은 미개척지였던 고마군을 개발했다. 도로를 정비하고 산림을 농지로 만들었으며 생활기반을 정비했다. 더불어 여러 산업도 새롭게 일으켰다. 고마군은 1200여 년간 이어오다 1896년 이루마군(入間郡)에 편입되면서 그 이름이 사라졌다.

고마신사에는 약광을 모시고 있다. 명신(明神)으로 받들어온 이래 지금까지 약광의 직계 자손들이 대를 이어 궁사(宮司·주지 격)를 맡고 있다.

고마신사는 일본 총리와도 밀접하다. 이곳에서 약광을 참배했던 정치가 중 사이토 마코토(齋藤実),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등 6명이 총리가 돼 ‘출세의 신사’로도 부른다.

고마신사 입구에 ‘高麗神社’라고 쓰여 있는 돌비석은 한일 수교 40주년(2005년) 때 재일동포 민간단체가 기부한 것이다. 지상 4m, 지하 2m 등 6m 높이에 한국에서 가져온 돌로 만들었다. 설치공사 역시 한국인이 맡았다.

 

도치기현 닛코시의 ‘도쇼구’에는 조선에서 가져온 종이 있다. 이는 도쿠가와 이에쯔나의 생일축하 기념으로 조선통신사가 가져온 것이다. 사진=김응구 기자
 

도치기(栃木)현 닛코(日光)시의 ‘도쇼구(東照宮)’는 일본을 통일하고 에도막부 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모신 신사다. 이에야스는 1616년 시즈오카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유언에 따라 이곳으로 시신을 옮겨와 안치한 후 신사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크지 않았는데 에도막부 3대 장군이자 이에야스의 손자인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가 일본 전역에서 1만5000명의 장인과 450만명의 인력을 데려와 화려하게 변신시켰다. 도쇼구의 압권은 ‘요메이몬(陽明門)’이다. 일곱 가지 색으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는데, 400여 개의 조각과 문을 받치고 있는 12개의 둥근 기둥은 독특한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도쇼구에는 조선에서 가져온 종(鐘)과 네덜란드가 기증한 큰 촛대가 있다. 조선의 종은 이에미쓰의 아들 도쿠가와 이에쯔나(德川家綱)의 생일축하 기념으로 조선통신사가 전해준 것이다.

닛코 근처에는 이마이치(今市)가 있다. 이 지역은 원래 보리밭이었는데 임시숙소 터로 만들었다. 알려진 바로는 100개 넘는 숙소가 있었다. 조선통신사는 도쇼구로 가기 전과 조선으로 돌아가는 날, 이틀을 이곳에서 묵었다.

조선통신사는 일본에 한 번 다녀오면 당시 돈으로 1만냥, 현재 가치로 100억원 넘게 들었다. 그들은 한류 스타답게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 어떤 요리를 먹었는지 지금까지 기록으로 다 남아있다.

2017년 10월, 조선통신사 기록물 111건 333점(한국 63건 124점·일본 48건 209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문화경제 김응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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