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MMCA, 관장 김성희)은 한국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김창열의 작고 이후 첫 대규모 회고전을 8월 22일(금)부터 12월 21일(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개최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 현대미술사의 정립과 위상 강화를 위해 원로 작가 및 당대 미술사 연구에 기반한 전시를 지속적으로 선보여 왔다. 그 일환으로 이번 전시는 한국 근현대사와 미술사의 맥락 속에서 김창열의 작업을 총체적으로 재조명한다.
김창열은 1950년대 앵포르멜 운동을 주도하며 서구 현대미술의 어법을 한국적 정서와 접목하는데 앞장섰고, 1965년 뉴욕에서의 활동을 거쳐 1969년 파리에 정착하기까지 시대에 맞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에 도달하기 위한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1970년대 초반부터 그가 평생에 걸쳐 천착한 물방울은 김창열 작가 자체를 수식하는 상징어가 되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창작 여정을 세밀하게 조명하는 한편, 작품 세계에 내재된 근원적인 미의식을 중심으로 물방울 회화의 전개 과정을 탐색한다. 또한 그동안 상대적으로 미흡했던 김창열 작가에 대한 연구를 심화하여, 한국미술의 정체성과 동시대적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전시는 6, 7전시실에 상흔, 현상, 물방울, 회귀 네 개의 장으로 구성했다. 또한 8전시실에서는 미공개 자료와 작품들로 이루어진 ‘별책부록’과 같은 공간을 구성, 작가의 삶과 창작 과정을 다각도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첫 번째 장 ‘상흔’은 김창열의 초기작을 중심으로, 작가의 예술세계가 형성된 시대적 배경과 활동을 살펴본다. 평안남도 맹산 출신인 그는 16세 즈음에 홀로 월남해 고향을 떠났고, 해방과 분단, 전쟁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거치며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필연적으로 내면화하여 이는 그의 예술세계 전반을 형성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1950년대 후반, 김창열은 새로운 미술에 대한 열망을 품고 상처를 형상화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된 ‘현대미술가협회’ 창립을 주도하며 한국 앵포르멜 운동을 이끌었다. 동시에 파리비엔날레(1961)와 상파울루비엔날레(1965) 등 국제무대에 참여하며 한국현대미술의 해외 진출을 개척했고, 이는 작가 개인에게도 중요한 예술적 전환의 계기였다. 1장에서는 상파울루비엔날레 출품작과 더불어, 앵포르멜 이전 시기의 작품으로는 첫 공개되는 1955년 작 <해바라기>와 경찰시절 경찰전문학교의 격월간지 『경찰신조』의 표지화까지, 작가의 창작 초기와 그가 마주한 시대적 상황을 함께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두 번째 장 ‘현상’은 뉴욕, 파리 전환기의 작업을 중심으로, 그동안 충분히 조명되지 않았던 추상회화와 물방울의 기원을 암시하는 조형적 징후들을 살펴본다. 1965년 작가는 김환기(1913-1974) 작가의 권유로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으며 뉴욕으로 건너갔으나 그의 앵포르멜 회화는 뉴욕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고,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 느낀 정서적 이질감은 그에게 깊은 소외감과 회의를 안겼다. 그는 이 시기 앵포르멜의 두터운 질감에서 벗어난 새로운 전환을 모색, 정제된 화면위에 기하학적 형태와 착시적 공간감의 조형 실험을 전개한다. 이후 1969년 뉴욕에서 파리로 이주하였는데, 이 시기에 제작된 ‘현상’연작은 이전의 차가운 기하학적 형태가 녹아내리는 듯 유기적 형상으로 바뀌었고, 응집된 덩어리는 마치 인체의 장기처럼 점액질로 표현되었다. 이때의 실험은 ‘물방울’회화의 전조로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뉴욕시기 미공개 회화 8점과 드로잉 작업 11점, 그리고 최초의 물방울 작품으로 알려진 <밤에 일어난 일>(1972)보다 앞서 제작된 1971년의 물방울 회화 2점이 최초 공개된다.
세 번째 장 ‘물방울’에서는 김창열 회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물방울의 조형적 특징과 그 전개 양상을 조명한다. 캔버스에 맺힌 물방울이 완결된 형태의 조형성을 보이며 끈적이던 점액질 형상이 마침내 투명한 물방울로 변화하는데 이는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 아닌, 오랜 조형 실험과 존재론적 사유 끝에 도달한 결과였다. 작가는 파리 외곽 마구간 작업실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물방울 작업에 전념했으며, 1973년 파리에서 개최한 개인전을 계기로 본격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에어스프레이(Air spray) 기법을 활용해 극사실적인 물방울을 그렸고, 점차 캔버스와의 물리적 관계를 재고하면서 얼룩, 콜라주 기법을 도입하는 등 작업의 형식을 확장해 나갔다. 김창열의 물방울은 단순한 물질적 형상을 넘어, 동아시아 철학 전통과 깊은 접점을 이루며 정신적 사유의 매개체가 되었다. 또한 초현실적인 감각을 불러일으키며, 그의 독자적인 예술 언어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1973년 초기 물방울부터 후기 물방울까지 대표적 작품들이 전시된다.
마지막 장 ‘회귀’에서는 천자문 작업에서 나타나는 언어와 이미지의 관계를 통해 창작과 사유의 근원을 마주한다. 1980년대 중반, 김창열은 화면에 문자를 도입하며 새로운 표현 세계를 열었다. 신문지 위에 물방울을 그리는 과정에서 글자와 이미지가 맺는 긴밀한 관계에 주목했고, 이는 천자문을 활용한 ‘회귀’연작으로 이어졌다. 작가에게 천자문은 단순한 글이 아닌 자연과 우주의 질서를 인식하는 기호였다. 천자문은 작가의 유년기와도 깊이 연결되어, 작가는 어린 시절 배운 글을 습자지에 쓰듯 화면을 채워나갔고, 이는 유년으로의 회귀이자 동양적 정서의 환원 의지이며 나아가 깊은 사유의 시공간이 되었다. 노년에 이르러 물방울은 삶과 예술을 잇는 실존적 동반자로, ‘회귀’연작은 삶의 상흔을 붓질로 꿰매는 진혼의 행위로 승화되었다. 문자와 물방울이 조우하는 이 작업은 김창열 예술의 본질을 드러내는 조형적 성취이자, 존재의 뿌리를 되묻는 성찰의 흔적이다. 이 공간은 관람객이 작가의 대형 작품을 보다 몰입감 있게 감상할 수 있도록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이후 처음으로 공개되는 7.8미터 규모의 대형 작품 <회귀 SNM93001>(1991)이 전시된다. 아울러, 작가의 삶과 예술 여정을 그의 육성을 통해 들을 수 있는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의 축약본도 함께 설치된다.
파리 외곽 팔레조의 마구간을 떠나 아파트로 옮긴 뒤, 김창열 작가의 문패에는 이름 대신 물방울 하나가 자리, 파리에서 그는 자연스레 ‘무슈 구뜨(Monsieur Gouttes, 물방울 씨)’로 불렸고, 작업실은 예술가와 지인들이 모여드는 일종의 사랑방이 되었다. 8전시실에 마련한 작가 관련 아카이브 공간 ‘무슈 구뜨, 김창열’은 그의 삶과 예술의 또 다른 면모를 비추는 별도의 공간으로, 일종의 ‘별책부록’이다. 이곳에서는 작가가 오랫동안 상상력의 원천으로 삼았던 초현실주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상형시 ‘Il pleut(비가 온다)’에서 착안해 제작한 <Il pleut(비가 온다)>(1973)가 소개된다. 물방울로 시의 구조를 번역해낸 이 작품은 국내외에서 처음으로 전시되어 그 상징성이 더욱 깊다.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들과 귀중한 기록들 및 작업실 풍경을 담은 대형 사진 등을 마련한 공간에서 관람객들은 작가가 물방울과 함께 걸어온 삶을 마주하며 작가의 작업세계에 더욱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 도록에는 작가 생전의 인터뷰와 지금까지 연구나 전시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던 뉴욕시기 작품에 대한 연구, 유족의 에세이 등이 수록되어 작가의 생애를 조망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또한 오랜 시간 프랑스에서 활동한 작가의 예술세계를 새로운 감각으로 이해하고 재해석한 이번 공간은 루브르 랑스와 파리 그랑 팔레 등 유수의 미술관 전시를 디자인해온 아드리앙 가르데르 스튜디오(Studio Adrien Gardère)와 협업하였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그동안 미흡했던 작가의 연구를 보완하고 공백으로 남아있던 시기의 작품을 통해 김창열 예술세계를 총체적으로 살펴보는 계기”라며, “김창열이라는 예술가를 새롭게 발견하고 재정립하는 기회이자, 그의 삶과 예술이 지닌 고유한 미학과 정서를 온전히 마주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문화경제 안용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