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넘게 유지되온 한국과 미국의 동맹 관계가 갑자기 냉랭해졌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과도한 ‘미국 우선주의’가 불러온 결과다. 뜬금없이 한국 기업의 미국 공장을 습격, 애꿎은 한국인 고급 기술자 300여 명을 ‘불법입국자’로 체포·구금하더니, 이제는 무려 3500억 달러(약 488조 원)라는 거금을 ‘투자’라는 명목으로 ‘상납’하지 않으면 관세를 25%로 올리겠다는 협박을 자행하고 있다.
문제는 이 금액이 한국 경제가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막대한 금액이라는 점이다. 이와 관련 이재명 대통령은 타임·로이터 등 외신을 만난 자리에서 “무제한 한미 통화 스와프 없이 미국이 요구하는 방식대로 3500억 달러를 인출해 현금으로 투자한다면,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며 “이런 요구조건을 받아들인다면 탄핵당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왜냐하면, 한국의 외환 보유고가 지난해 말 기준 4156억 달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GDP 대비 외환보유액 비율은 약 22.2%로, 일본(30.6%)이나 대만(73.7%)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이 때문에 한국의 금융·외환 시장은 선진국들은 물론 신흥국에 비해서도 외부 충격에 취약한 편으로 분석된다. 외환 전문가들에 따르면, 3500억 달러 투자가 3년 분할로 진행되더라도 심각한 원화 약세(1500원대 돌파)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이 대통령의 IMF 외환위기 언급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닌 것이다.
이 때문에 이 대통령은 ‘무제한 통화 스와프’라는 해법을 제시했지만, 이 제안은 사실상 미국에게 거절당한 것으로 보인다. 원화는 엔화나 유로처럼 글로벌 신뢰를 받는 기축통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제한 통화 스와프가 이뤄질 가능성이 없다면, 한국은 어떤 선택이 가능할까?
첫번째 선택은 모든 경제적 부담을 감수하고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결과는 이재명 대통령의 예상처럼 참혹할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외환 보유고는 정부와 기업, 민간을 포함한 대한민국 전체의 국부를 산정한 것이다. 이 중 84%를 일시에 헌납하라는 것이 미국의 요구인데, 이는 우리 정부와 국민 모두가 엄청난 부채를 떠안게 된다는 의미다.
투자원금이 정부 1년 예산의 80%에 달할 만큼 크고, 회수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예측이 불가능한 것을 감안하면, 우리 경제의 피해 규모를 산정하기가 쉽지 않다. 환율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전 국민이 ‘제2의 IMF’를 경험하게 되는 건 명약관화다.
두번째 선택은 과감하게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다. 관세 25% 부과로 인한 손실보다 3500억 달러 투자로 인한 부담이 더 크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우리 정부가 선택 가능한 유일한 선택지로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한미 관계의 재설정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예측불가능한 트럼프 정부가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에 대한 추가 제재 조치를 취할 수 있고, 군사·안보 분야의 불안이 커질 수 있다. 또, 한미 동맹을 신성시하는 보수정당과 국민들의 반발로 국내 정치 대립 구도가 한층 격화될 수 있다.
그야말로 첩첩산중, 진퇴유곡인 상황이다. 어느 길로 가도 한국은 손해를 보는 구조다.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제 3의 길은 없을까?
일단은 투자 규모를 1000억 달러 내외로 축소하고, 이익 공유·공동 관리 구조로 바꾸면서, 현 통화 스와프(600억 달러) 연장으로 안전망을 확보하는 식의 ‘재협상’을 추진해보는 건 어떨까? 3500억 달러 중 20% 가량을 즉시 투자하고, 나머지는 3-5년 분할, 미국 국채(100년물) 매입으로 대체하는 방안도 검토해볼 수 있다.
물론 이런 방안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이재명 정부가 엄청난 외교적 역량을 발휘해야 하고, 행운도 따라야 한다. 그럼에도, 다른 선택지의 결말이 너무나 암담한 것을 생각하면, 당분간은 협상의 틀을 유지하면서 상황 변화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듯 하다.
< 문화경제 정의식 편집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