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림의 현대사진산책+] 생명은 배경이 아닌 증인

조세파 은탐, 제인 진 카이젠&거스턴 손딘쿵

천수림(사진비평) 기자 2025.11.05 09:16:00

대구사진비엔날레 2025 전시장 현장. 사진=천수림

철학자 글렌 올브렉트는 현재의 인류세를 극복할 방법으로 공생세(Symbiocene)를 새로운 개념으로 제시했다. 올브렉트는 인류의 활동으로 인해 환경이 파괴되고 기후 위기가 심화되면서 발생하는 심리적 고통(솔라스탈지아, Solastalgia: 고향이나 서식지가 황폐해지거나 파괴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겪는 실존적 또는 정신적 고통을 나타내는 신조어)에 주목해왔다. 많은 작가들이 모든 생명체 간의 관계가 공생, 공존, 상호성에 기반한 시대를 의미하는 공생세에 공감하고 연대하고 있다. 이번 대구사진비엔날레 2025에서 만날 수 있는 조세파 은탐과 제인 진 카이젠과 거스턴 손딘쿵은 공생과 공존의 가치에 역사를 중첩시키고 있다. 조세파 은탐이 말한 것처럼 ‘생명은 배경이 아닌 증인’이다.

조세파 은탐, 조상의 메아리를 지키는 자

조세파 은탐, 'Djouka ELISABETH(주카 엘리자베스)'. 승화 전사 프린트, 60x85cm. 2025. 사진=천수림

조세파 은탐은 조각, 포토몽타주, 영화, 사운드를 결합한 작업을 하는 예술가이자 퍼포머다. 작가는 인터넷, 자연과학 서적, 사진 아카이브에서 작업의 원재료를 수집한 이미지에 단어, 소리, 이야기의 조합을 통한 작업을 선보인다. 그녀는 자신의 기원, 정체성, 인종에 관한 헤게모니적 담론과 아프리카 신화, 조상 의식, 종교적 상징, 공상과학을 연결한 다중 서사를 엮어낸다.

제10회 대구사진비엔날레 2025 엠마뉘엘 드 레코테 주제전인 ‘생명의 울림(The Pulse of Life)’에 참여하는 주요 작가 중 한 명이다. 포토몽타주와 집합 방식으로 선보이는 주카 엘리자베스와 앙투안 에마뉘엘 은사쿠 네 분다 등의 작품도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재점유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제10회 대구사진비엔날레의 주제는 생명의 기원, 생태적 연속성, 인간과 비인간 존재 사이의 경계를 탐색하는 ‘생명의 울림’이다. 이 전시는 호주 환경 철학자 글렌 알브레히트가 주창한, 공생세(Symbiocene:모든 생명체가 공존하고 협력하는 미래를 상상하는 개념)를 기반으로 한다.

조세파 은탐도 작업노트에서 생명에 대한 생각을 “제가 볼 때 생명이란 생물학이나 경직된 분류 체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살아 있는 것은 보이든 보이지 않든 주변 환경에 반응하고, 기억하고 변형되는 존재다. 저는 아프리카 애니미즘 철학에서 영감을 받아 돌과 파도, 기록과 기억 속에도 생명을 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생명력을 품은 매개체”라고 밝히고 있다.

조세파 은탐, 'Guardian of the Ancestor's Echo(조상의 메아리를 지키는 자)'. 승화 전사 프린트, 120x180cm. 2025. 사진=천수림

작가는 이번 비엔날레에서 과학, 신화, 인터넷 이미지, 조상 서사 등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엮어 정체성, 역사, 기원에 대한 지배적 서사를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녀의 작품은 대구사진비엔날레의 주제 의식인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선 생명과 공존의 메시지와 궤를 같이 한다.

특히 ‘주카 엘리자베스, 앙투안 에마뉘엘 은사크 네 분다’ 작품은 역사와 정체성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서사 재구성에 초점을 맞췄다. 이 작품엔 카메룬의 독립 운동 단체인 카메룬 인민연합(Union des Populations du Cameroun, UPC)의 활동가들의 역사적 사진이 콜라주돼 있다. 작가의 할아버지 역시 UPC의 일원이었다. UPC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카메룬의 독립과 프랑스령 카메룬과 영국령 카메룬의 통일을 위해 창설된 급진적인 반식민주의 운동을 주도한 단체로 독립과 통일을 위해 싸운 가장 중요한 민족주의 정당이다.

작가는 그녀의 할아버지를 포함한 UPC 활동가들의 저항의 역사와 기억을 시각 예술로 재구성해 오늘날 식민주의 역사에 가려진 서사를 다시 드러내고 있다. 주카 엘리자베스 작가 역시 UPC 인물 중 하나다. 작가는 마치 바닷속 생물에 둘러싸인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숲속의 정령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해양의 이미지는 대서양 노예 무역 희생자의 기억을 환기시킨다. 아프리카인들의 대성양 너머 이주와 변형을 상징한다.

작가는 이런 기억의 공간을 물과 관련된 신화나 균사, 풀랑크톤처럼 유기적 재료를 통해 모색한다. 작가노트에서도 “제 작업은 종과 형태가 맞닿는 지대, 공유된 기억의 공간을 탐색한다. 물과 관련된 신화, 디아스포라의 이야기, 균사나 플랑크톤과 같은 유기적 재료를 통해 귀 기울임과 돌봄의 생태를 모색한다. 생명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주제이자 동료이며 때로는 증인이기도 하다”고 했다.

‘조상의 메아리를 지키는 자’는 작가가 그동안 탐구해온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의 역사, 신화, 과학, 미래적인 상상력이 혼합된 세계관을 구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동안 역사적 기록이나 지배적 서사에 의해 억압되거나 지워진 흑인 공동체에서 지워진 목소리를 복원하고 있다. 작가는 다채로운 인물들과 수중세계의 이미지를 통해 기억, 회복력, 그리고 집단적 저항의 힘을 드러낸다.

제인 진 카이젠&거스턴 손딘쿵, 폭풍의 주름 속에

제인 진 카이젠&거스턴 손딘쿵, '폭풍의 주름 속에(In Storm's Fold)'. 잉크젯 프린트, 100×75cm. 2023. 사진=대구사진비엔날레

이번 대구사진비엔날레에 선보인 제인 진 카이젠과 거스턴 손딘쿵 작가의 ‘폭풍의 주름 속에 ’는 기억, 이주, 영혼 세계를 다룬 사진 연작이다.

이 작품은 한국계 덴마크 작가인 제인 진 카이젠과 미국 시각예술가 거스턴 손딘쿵과의 협업으로 제작한 것으로 특히 제인 진 카이젠의 작가의 조부모의 고향이자, 작가가 오랜 기간 기억과 역사를 탐구해온 장소인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다. 이 연작은 제주도에서 홍수가 났던 시기에 제작됐다.

이 팀은 주로 통과의례에 사용하는 흰 무명천인 소창을 활용해 삶과 죽음의 순환을 표현했다. 제주도의 어느 마을에서나 볼법한 평범한 주택을 마치 용 한 마리가 날아오르듯 흰 천이 움직이고 있다. 작가노트에서 이 장면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소창이 폭풍의 바람을 통해 생명르 부여받은 살아있는 존재라고 상상한 것이다. 이 찰나의 행위는 인간에서 비인간으로, 가시적 세계에서 지각의 힘으로 이어지는 살아있는 것들의 연약함과 회복력을 포착한다.”

‘폭풍의 주름 속에’에 등장하는 집은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단단히 서 있다. 여기서 집은 단순히 물리적인 거주 공간이 아닌 기억과 정체성의 저장소다. 두 작가의 주요 주제인 디아스포라적 맥락에서 ‘집’은 비록 잃어버렸지만 언제나 그리워하고 반드시 찾아야만 하는 뿌리다. 하지만 제이젠 카이젠이 자주 주제로 삼는 제주 4·3 사건과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는 파괴된 공간이자 상실과 부재의 장소다.

제인 진 카이젠&거스턴 손딘쿵, '폭풍의 주름 속에(In Storm's Fold)'. 잉크젯 프린트, 100×75cm. 2023. 사진=천수림

제주도의 거친 바람은 역사적 격변과 폭풍을 의미하기도 하며 국경과 시간을 넘나드는 디아스포라의 궤적이기도 하다. 주로 여성의 노동의 결과물로 태어난 전통적인 소창은 치유와 회복의 의미로 볼 수 있다. 소창(Sochang)은 한국의 무속에서 산 자와 죽은 자, 인간계와 영혼계를 연결하는 통로 역할하며 특히 바닷가로 이어지는 소창은 영혼의 길을 의미한다.

두 작가는 폭풍의 주름 속에 외에도 제주도의 해안에서 발견된 사물들을 통해 제주도에 대한 이야기를 지속해왔다. 특히 썰물이 반복되는 해안선에서 일시적으로 발견되는 시간과 기억의 파편을 포착한 ‘달의 당김’(2021) 작품도 그 중 하나다. 이 밖에도 전쟁과 군사주의가 젠더에 미치는 영향을 꾸준히 탐구해왔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지촌 매춘부, 해외 입양 여성을 다룬 ‘여자, 고아, 그리고 호랑이’(2010) 작업도 함께 했다.

제주의 지질학적 시간과 신화를 엮어낸 싱글채널 영상 ‘코어’(2024)도 폭풍의 주름 속에 작품처럼 근원적인 생명의 생성과 존재에 대해 들여다보게 한다. 역사, 기억, 이주, 영성에 대해 깊이 천착해온 두 작가는 현재 전시기획과 다양한 예술 활동을 위한 비영리 예술 연구 및 큐레토리얼 플랫폼 ‘이티너런트’를 공동 창립해 활동 중이다. 이티너런트(itinerant)는 단어 자체가 ‘순회하는’ 또는 ‘떠돌아다니는’이라는 뜻으로 특정 장소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지역에서 활동한다. 두 작가는 사진과 영상, 설치, 출판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폭력과 이주로 인해 훼손된 공동체의 연속성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작가소개>

조세파 은탐은 1992년 프랑스 메츠에서 태어나 현재 프랑스 생테티엔에서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다. 그녀는 프랑스 아미앵과 세네갈 다카르, 셰이크 안타 디옵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프랑스 부르주 국립고등미술학교와 프랑스 파리-세르지 국립고등미술학교를 졸업했다. 베니스 비엔날레 2024 부대행사, LAS 재단, 베를린, 독일(2024); 유네 코스모고니 데 오세앙, LVMH 메티에 다르, 파리, 프랑스(2024); Futuristic Ancestry: Warping Matter and Space-time(s), Fotografiska, 뉴욕, 미국 (2024); matter gone wild, Fondation Pernod-Ricard, 파리, 프랑스(2023); Limestone memories – Un maquis sous les étoiles, NıCOLETTı, 런던, 영국(2023); 아 도브라디차 비엔날레, 마샬, 포르투갈(2023); 달이 바다를 꿈꿨을 때, FACT(예술과 창의적 기술 재단), 리버풀, 영국(2022-23); 가능성의 문. 예술, 제15회 광주비엔날레(2024); 프랑스 쥬 드 폼 페스티벌(2025); 독일 베를린 포토그래피스카, 스웨덴 스톡홀름 포토그래피스카, 에스토니아 탈린 포토그래피스카(2025~26) 등에 참여했다.

제인 진 카이젠은 한국계 덴마크 작가로, 시각예술과 인류학적 연구를 결합해 기억, 이주, 경계의 문제를 탐구한다. 제주에서 태어나 덴마크로 입양된 그녀는 비디오, 설치, 사진을 통해 개인과 집단의 역사를 반영한다. 컬럼비아 대학교 시각예술 석사(MFA) 학위를 취득했다. 2023년 베니스 비엔날레 덴마크관 대표 작가로 선정됐고, 독일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 회화 및 미디어 아트 부문 수상, 2020년 덴마크 예술상을 수상했다.

거스턴 손딘쿵은 덴마크에 기반을 둔 미국 작가로, 미국 로드 아일랜드 디자인 스쿨, 덴마크 왕립 미술 아카데미를 졸업했으며 내러티브 실험 영화를 통해 신체성과 기억을 주요 주제로 다룬다. 이티너런트를 카이젠과 공동 설립했다. 제인 진 카이젠과 공동 작업자로 활동하며, 영상 및 사운드 디자인, 사진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두 작가의 협업작 ‘폭풍의 주름 속에’(2023)는 삶과 죽음을 상징하는 한국 전통 천 ‘소창’이 제주도의 홍수 피해 마을을 떠도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사라져가는 전통, 생태위기, 조용한 회복의 가능성을 환기시킨다.

글: 천수림
이미지 제공: 대구사진비엔날레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