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퍼플, 서상익의 ‘나른한 오후’를 바라보다

‘오후’ 정서 통해 작가의 회화적 태도 되짚어

김금영 기자 2025.11.05 10:38:05

서상익, '교류, 직류, 하류'. 캔버스에 오일, 162.2x112.1cm. 2025. 사진=갤러리퍼플

갤러리퍼플이 서상익 작가의 개인전 ‘나른한 오후’를 마련했다. 이번 전시는 서상익이 오랜 시간 이어온 ‘오후’의 정서를 통해, 변화해 온 자신의 회화적 태도를 되짚는 자리다.

2008년 첫 개인전 ‘녹아내리는 오후’로부터 17년이 지난 지금, 그는 다시 오후를 말한다. 서상익에게 오후는 예술가로서의 내면을 비추는 상징적인 시간이다. 막연함과 의심 속에서도 붓을 들던 그때를 지나, 이번 전시는 사유와 성찰로 깊어진 예술가의 태도를 보여준다.

서상익은 내러티브가 강조된 연극적인 공간 구성과 비현실적인 장면을 통해 자신이 마주한 현실과 내면의 고민을 회화적으로 풀어왔다. 그의 화면은 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언제나 사회의 풍경과 맞닿아 있다.

그는 일상의 장면이나 미술관, 도시의 풍경 속에서 현대인의 태도와 사회의 아이러니를 포착하며, 익숙한 현실을 낯설게 바라본다.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언어인 ‘회화’를 통해 삶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 속에서 자신이 속한 세계를 성찰한다.

서상익은 특정한 형식이나 주제에 자신을 규정짓지 않는다. 작업마다 회화의 가능성과 표현 방식을 새롭게 탐색하며, “예술이란 무엇인가”, “왜 그려야 하는가”라는 다소 근원적 질문에 스스로 묻고 답한다.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탐구하고 사유하려는 이러한 태도는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모든 작품에 일관되게 드러난다.

서상익, '거대한 일상'. 캔버스에 오일, 259.1x193.9cm. 2025. 사진=갤러리퍼플

대표작 ‘거대한 일상’은 대형 명품 광고 이미지와 짐을 들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일상적 풍경이 한 화면에 놓여있다. 주인공이 부재하고 원근법이 해체된 화면 속에서, 그는 현실과 이미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시킨다. 이를 통해 ‘리얼리티’의 의미가 어떻게 규정되는지 묻고, 실체와 관념이 뒤섞인 현실을 회화적으로 드러낸다.

‘강변 유람’ 시리즈는 작가가 파리 센 강을 여행하며 직접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약 4년 만에 다시 이어진 이번 작업에서, 그는 이전의 사실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점·선·면과 같은 조형의 기본 요소로 화면 일부를 재구성하고, 이전 작업에서는 감추어 두었던 붓질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동일한 주제를 다시 다룰 때, 시기와 시선의 변화에 따라 화면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관찰하는 작가의 태도가 돋보인다.

‘화가의 성전’ 시리즈는 예술의 종교적 속성을 탐구한다. 서상익은 예술을 하나의 신앙 체계로 비유하며, “예술이 종교라면 대가들은 그 신앙의 성인(聖人)”이라고 말한다. 그는 세 버전을 거쳐 약 150점에 달하는 대가들의 초상과 작품을 모사하고 재구성해왔다. 이 연작은 그들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자,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구축하려는 실험이다.

“왜 그려야 하는가” 치열한 고민

서상익, '전시된 비극'. 캔버스에 오일, 162.1x130.3cm. 2025. 사진=갤러리퍼플

작가는 작가노트를 통해 “이제 오후의 해가 점점 저물어간다. 아직 석양은 아니지만 늦은 오후 눈을 비비며 일어나 시간이 꽤 지났음을 느낀다. 나른함의 이불을 개고 이제 할 일을 해야 한다”며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지, 왜 그리고, 그림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보여 줄 건지. 치열함까지는 아니라 해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고 했다.

이어 “‘무엇을 그리는 작가’로 구분되고 싶지 않다. 그건 언어가 아니다. 나만의 언어를 다듬고 말하고 소통해야 한다. 어떻게 그리고, 어떤 그림을 그리고, 물감과 붓과 캔버스를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스스로가 고찰해야 한다”며 “무엇을 그리든 나의 언어로 색칠하며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시간이 흘러간다. 저녁이 가까워지며 조금씩 절실함을 더듬어 가며 분과 초를 느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예술은, 그림은 본디 반복될 수 없는 것이다. 역사 위에 한 스푼의 자아를 얹든, 전에 없던 감성을 표하든 복제될 수 없는 것, ‘복제할 수 없는 것’ 그것이 그림”이라며 “그림은 본디 진보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갤러리퍼플 측은 “이번 전시는 외부의 자극 속에서 흔들리고, 때로는 녹아내리기도 했던 시간을 지나, 작가가 자신의 예술적 태도와 방향을 분명히 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오랜 시간 자신의 정서와 태도의 뿌리가 되어온 ‘나른한 오후’를 다시 마주하며, 그 속에 스며 있던 나른함의 태도를 걷어내고자 한다”며 “서상익에게 회화는 표현의 수단이자 동시에 ‘그리다’를 찾아가는 ‘목적’이다. 전시 ‘나른한 오후’는 그러한 흐름 속에서,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오늘의 시간을 담아낸다”고 밝혔다. 전시는 이달 14일부터 다음달 27일까지 열린다.

한편 작가 서상익은 서울대학교 학부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2025년 ‘At Some Afternoon’(갤러리CNK, 대구), 2024년 ‘Pictures’(뉴스프링 프로젝트, 서울), 2021년 ‘Cold on a Warm day’(아뜰리에 아키, 서울), 2019년 ‘Just Picture’(갤러리 기체, 서울), 2015년 ‘Days of none of some’(윤아르떼, 상하이), ‘Monodrama’(자하미술관, 서울) 등이 있으며, 갤러리 나우, 더현대 서울, 학고재, 토탈미술관, 갤러리 현대, 장흥아트파크 등에서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인터 알리아, 하나은행, 스타벅스코리아, 제주 에코랜드 호텔, 영화사 싸이더스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고, 현재 갤러리퍼플 스튜디오(galleryPURPLE STUDIO)에서 입주작가로 활동 중이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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