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어보다 이미지를 먼저 이해한다. 그렇기에 그림은 시대를 넘어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샤갈의 작품이 만인의 사랑을 받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그는 인간이 가진 보편적 감정을 색으로, 믿음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풀어냈다.
소박한 유대인 가정에서 자라나 반평생을 타국을 떠돌며 살던 자유로운 이방인. 시간과 국적을 초월해 많은 이들에게 영원한 찬사를 받는 거장 마르크 샤갈의 작품을 오는 24일 서울옥션 이브닝 세일에서 살펴본다.
청어 장수를 하던 아버지와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 밑에서 자란 샤갈의 집에는 그림이 한 점도 없었다고 한다. 형상을 만드는 것은 신성모독에 가깝다고 믿었던 엄격한 유대교 집안에서 샤갈의 예술에 대한 열정은 초기에는 외면 받았다. 그렇지만 신실했던 샤갈의 마음이 신과 어머니를 움직인 것일까. 결국 부모는 그의 집념을 받아들여 손을 들어주었고 열아홉 살 때부터 수많은 유대계 화가를 배출한 예후다 펜에게 사사하며 젊은 샤갈은 비로소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1910년 작가로서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파리로 건너간 샤갈은 그곳에서 모딜리아니, 수틴, 들로네 등 에꼴 드 파리(École de Paris)와 현대미술 화단의 시각을 바꾸었던 입체파 화가들을 만나 다양한 조형성을 실험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성장 배경인 슬라브 민족의 신비로움을 보여주는 주제들과 종교적 분위기를 풍기는 숭고한 원색을 사용함으로써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해 나간다.
20세기를 풍미한 초현실주의자들로부터 샤갈은 ‘대부’로 칭송 받기도 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 어느 사조에도 속하고 싶지 않아 했다. 시대를 초월한 상상력과 보편적 감정을 어루만지는 탁월한 능력으로 마치 프란시스코 고야와 같이 단 하나의 색채를 가진 거장으로 거듭나고 있던 것이다.
세상의 시작, 영원한 나의 뮤즈
그랬던 샤갈에게도 예술에 대한 열정보다 더 앞선, 본질적인 사랑이 존재했다. 바로 그의 평생의 반려자 벨라에 대한 애정이다. 샤갈과 그의 평생 뮤즈 벨라와의 만남은 한 작가에게 있어 개인의 사랑을 넘은 예술혼의 근간이라 할 수 있다.
부유한 보석 상인이었던 벨라의 부모는 막내딸과 가난한 그림쟁이의 만남을 반대했으나 서로가 운명임을 한눈에 알아봤던 그들은 1915년 러시아에서 결실을 맺었고, 벨라는 그에게 새로운 작품세계를 열어주게 된다. 다른 동시대 작가들이 사회의 불안을 고발하거나 추상표현주의에 깊게 빠져 있을 때 샤갈은 반려자와의 따뜻한 사랑을 기반으로 화면 속의 만물을 아름답게 표현해 나간다.
1937년 제작된 ‘Bouquet de Fleurs’(꽃다발)은 벨라와 샤갈의 결혼 22년 후의 모습이자, 오랜 시간 무국적자로 지냈던 샤갈이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한 기념비적인 해에 제작됐다. 중력을 거스른 채 포옹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사랑이 주는 고유한 평온과 해방감이 느껴진다.
왼편에 자리한 소는 만물이 동등함을 강조했던 하시디즘(Hasidism)을 믿은 샤갈의 종교관으로 샤갈 자신을 뜻하고, 전면에 배치된 꽃다발은 생명의 기쁨을 의미한다. 이 작품은 사랑이 신성으로 확장되는 초월적 주제를 완성하며, 그의 예술 세계가 절정으로 향하던 중기의 밀도감을 보여준다.
사랑이 남긴 최고의 순간들
글로벌 경매 시장에서 최고가를 세웠던 다섯 점의 샤갈의 작품 중, 총 네 점의 작품이 벨라와의 결혼 시기에 그려진 작품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당시 뉴욕 현대미술관(MoMA) 관장의 도움으로 샤갈이 잠시 머물렀던 뉴욕에서 모두 그 기록이 세워졌다. 프랑스어를 배우는데도 30년이나 걸렸다며 영어 배우는 일을 거부했던 샤갈이지만, 그가 정을 쏟았던 유럽 땅이 아닌 미국에서 샤갈의 사랑은 오히려 더 멀리, 더 깊게 퍼져 나갔다.
또 다른 흥미로운 모습은 앞선 네 개의 작품 모두 벨라와 포옹하거나 입맞춤하거나,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 젊은 날의 아름다운 초상이라는 점이다. 샤갈의 작품에는 서로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가 해소된 듯한 깊은 해방감이 깃들어 있다. 그는 그것을 삶에서 직접 경험하였고 화면에 완벽히 재현함으로써, 오늘날까지 감상자 모두를 따스하게 안아주는 근원적 힘을 보여주고 있다.
샤갈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한 개인의 사랑이 어떻게 예술의 언어로 변모해 세대를 넘어 전달되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현실의 무게에서 벗어난 듯 부유하는 인물들, 온기를 품은 색채, 서로를 향해 기울어진 시선들은 결국 우리가 오래전부터 갈망해온 감정의 자리로 우리를 데려간다. 혼란과 불확실성이 공존하는 시대 속에서도 샤갈의 세계는 사랑이 인간을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힘임을 조용히 일깨운다. 그의 그림 앞에서 우리는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마음의 본질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