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매서운 날이면 답십리1동 골목의 아침은 더 일찍 시작된다. 비닐 끈이 살짝 풀린 종이상자를 다시 묶고, 손수레 바퀴에 낀 자잘한 자갈을 털어내는 손길이 분주하다. 사람들은 그가 지나간 뒤에야 “오늘도 나가셨네” 하고 안다. 폐지를 줍는 일이, 누군가에겐 생계의 마지막 끈이지만, 누군가에겐 ‘이웃에게 건네는 인사’가 되기도 한다.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1동 주민자치위원회 위원인 이인수(73)씨는 25년째 폐지를 모아 판 수익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 왔다.
그의 기부는 ‘한 번의 선행’이 아니라, 계절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생활의 리듬에 가깝다. 2002년부터 시작된 이 습관은 해마다 겨울이 오면 쌀 포대로 돌아왔다. 올해도 이 씨는 폐지 수익금으로 마련한 쌀(10㎏) 80포를 ‘2026 따뜻한 겨울나기’ 사업에 기탁했다는 게 동 주민센터의 설명이다.
이 씨의 이야기가 더 오래 남는 건, 그 방식 때문이다. 골목에 폐지가 많이 쌓여 있는 곳을 발견하면 무작정 가져가기보다 “여기 많이 나왔어요” 하고 먼저 알린다. 폐지를 줍는 다른 어르신들의 구역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다. 나눔은 결국 ‘남의 몫을 빼앗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걸, 그는 몸으로 알고 있었다.
이 씨의 발걸음은 ‘쌀 기탁’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동네 편의점 점주들을 설득해 유통기한이 임박한 도시락·삼각김밥 같은 신선식품을 폐기 대신 기부로 돌리게 했고, 최근에는 일반음식점까지 참여를 넓혔다. 기탁받은 물품을 저소득가구에 직접 배달하며 안부를 살피는 일도 이어 왔다. ‘물품이 창고를 거쳐 사라지는’ 방식이 아니라, ‘사람에게 닿는’ 방식으로 나눔의 끝을 확인하는 셈이다.
이 씨의 진정성은 동네의 마음도 움직였다. 이번 ‘2026 따뜻한 겨울나기’ 기간 동안 그는 병원과 상가를 일일이 찾아가 나눔의 필요성을 설명했고, 그 결과 주민 성금 참여가 전년(21명)보다 크게 늘었다. 동 주민센터 집계로는 올해만 176명이 기부에 동참했고, 이 가운데 50명이 성금 222만 원을 보탰다. 답십리1동 주민자치위원회도 성금 100만 원을 기탁해 힘을 더했다. 통장협의회·방위협의회 등 직능단체와 보육·종교시설의 참여가 이어지며, 답십리1동의 ‘따뜻한 겨울나기’ 모금액은 1월 28일 기준 9538만 원(목표 대비 94%)을 기록했다.
‘희망온돌 따뜻한 겨울나기’는 서울시와 서울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민·관 협력으로 진행하는 겨울철 이웃돕기 캠페인으로, 통상 11월 중순부터 다음 해 2월 중순까지 집중 모금이 이뤄진다. 동대문구에서도 ‘2026 따뜻한 겨울나기’ 참여 안내가 동 주민센터 공지로 올라와 있다.
캠페인이 제도라면, 이 씨의 손수레는 그 제도를 움직이게 하는 ‘사람의 동력’이다.
김학수 동대문구 주민자치연합회장은 “이인수 위원의 봉사 정신은 15개 동 주민자치위원 모두에게 큰 귀감”이라며 “나눔의 온기가 동네 곳곳으로 퍼지도록 연합회도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이필형 동대문구청장도 “오랜 시간 묵묵히 폐지를 모아 이웃을 돌봐 온 정성이 소외된 이웃에게 희망이 되도록, 복지 사각지대 해소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겨울은 늘 추웠지만, 어떤 동네는 그 추위를 ‘함께 견디는 방식’으로 조금 덜 차갑게 만든다. 답십리1동에서 들리는 손수레 바퀴 소리는, 그래서 단순한 노동의 소리가 아니다. 한 장의 종이가 쌓여 한 포대의 쌀이 되고, 그 쌀이 다시 사람을 살리는 소리가 된다.
<문화경제 안용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