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현장] 선화랑, AI 시대 ‘회화’에 주목하다

신년 첫 전시 ‘예감’전서 감각 일깨우는 작품들 선보여

김금영 기자 2026.03.16 10:53:42

선화랑 '예감'전 현장. 김그림 작가의 작품이 설치돼 있다. 사진=김금영 기자

선화랑이 신년 첫 전시를 ‘예감’전으로 열었다. 기획 주제 아래 참여 작가들의 현 역량과 앞으로의 비전을 보여주는 자리다. 이번엔 ‘Reall of the Senses(감각의 소환)’을 주제로 김그림, 김연홍, 박시월, 정유미, 최은정, 황원해 작가 6인이 모였다.

원혜경 선화랑 대표는 “현재 디지털 환경에서 우리는 실시간으로 수많은 이미지들을 접한다. 하지만 직접 신체의 여러 감각을 거쳐 이를 느끼기보다는 디지털 스크린 속 이미지를 빠르게 소비하고 잊기를 반복하는 환경에 놓여 있다”며 “이번 전시는 시각 중심의 일방적 감상에서 벗어나 청각, 촉각, 후각 등 온몸의 무뎌진 감각을 작품을 통해 일깨워보고자 했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이 감각을 일깨우는 매체로 ‘회화’를 선택했다. AI(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이 예술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시대에 인간의 직접적 손길이 닿은 회화에 주목한 것.

박부경 선화랑 팀장은 “회화는 한 화면에 작가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담은 결과물로, 그렇기에 작가의 개인적 근거와 생각이 보다 확실해야 한다”며 “이번 전시에서는 회화 작가로서 회화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치열하게 인간 존재에 대한 고민까지 담은 작가들의 회화를 만날 수 있다. 이들의 개인적 서사에서 시작돼 보편적 가치로 공감대를 넓히는 회화 작품들로 전시를 구성했다”고 말했다.

광활한 자연을 듣고 만진 김그림·정유미 작가

정유미 작가의 작품이 설치된 모습. 사진=김금영 기자

작가 6인의 작업은 크게 ‘자연’, ‘상상’, ‘도시’ 키워드로 나눠진다. 가장 먼저 1전시실에서 접하는 김그림·정유미 작가는 자연을 마주하며 느낀 각자의 감각들을 화면에 표현했다. 특히 촉각, 청각을 자극한다.

정 작가는 특히 노르웨이에서 접한 광활한 자연 풍경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이전 냉소적인 시선으로 인간 군상을 주로 그렸던 그가 작업의 전환점을 맞았던 시기이기도 하다고. 그는 “인터넷도 잘 되지 않고, 한국처럼 편의 시설이 잘 갖춰지지 않아 그저 천천히 자연을 마주하는 시간이 많았다. 광활하게 펼쳐지는 푸른 하늘 등 압도적인 자연 풍경에서 감동을 느꼈다. 그 아래에서 인간의 존재가 한없이 작게 느껴지기도 했다”며 “지금껏 살아오며 접하지 못했던 충격을 받는 동시에 힐링이 되는 느낌이었다. 마치 자연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기도 했다”고 말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여수, 강릉 등 자연의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장소를 꾸준히 찾아다녔다. 최근엔 철원과 고성도 찾았다고 한다. 이 장소들에서 느낀 감동들을 화면에 담았다. 그런데 화면은 특정 시간, 장소의 이야기를 담지 않는다. 작가가 각 장소들을 찾았다가 느꼈던 감정들을 쌓아놓은 뒤 이를 한꺼번에 화면에 풀어내는 식이다. 그래서 정 작가는 풍경 사진을 찍긴 하지만, 이를 보고 그리지 않고, 스케치도 하지 않는다. 즉흥적인 손의 움직임의 감각에 오롯이 집중한다.

그렇게 탄생한 화면에서는 마치 강한 바람의 소리가 들리는 듯 역동적인 움직임이 느껴진다. 그는 “이번 전시 주제에서 감각이 내게도 중요한 포인트였다. 동해바다에서 바람을 똑같이 쐰다 해도 개개인이 이 바람을 다르게 느끼듯 나 또한 당시의 향과 온도, 바람의 세기 등을 느끼는 감각을 더 섬세하게 받아들여 이를 붓터치로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것이 현재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작가의 ‘상상풍경’ 시리즈다.

김그림, 정유미 작가는 광활한 자연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한 작업들을 보여준다. 사진=김금영 기자

김그림 작가는 오지 탐험을 많이 다녔다. 본격적인 시작은 스무 살로, 친구들과 몽골을 갔을 때 큰 경외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 시베리아, 남미 등 전 세계의 빙하지대와 사막지대를 오가며 대자연을 탐험했다. 그는 이 대자연 속 인간의 삶과 죽음의 순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 김 작가는 “자연에서 맞닥뜨리는 식물, 동물은 인간과 공존하고 있다. 이 존재들 또한 치열하게 살고, 죽으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인간의 삶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는 개인적인 경험과도 연결된다. 지난해 김 작가의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통영 시골에서 시간을 보낸 기간이 있었다. 그는 “할머니의 수목장을 치렀다. 매우 큰 상실감으로 슬픔에 허덕이기도 했다”며 “하지만 꽃과 나무가 시들고 다시 피듯 할머니 또한 새로운 생명으로 피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이때 삶의 순환과 우리가 살아가는 원동력, 강인한 생명력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존재들의 강인한 생명력은 남미의 파타고니아, 시베리아의 산을 오르다 발견한 고산 식물들의 모습에서도 느꼈다. 추위와 열악한 고산 지대의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식물 스스로 털을 만들어냈고, 그렇게 이 식물들은 치열하게 살아남고 있었다. 김 작가는 이 감각에 집중했다. 식물의 부드러운 털의 결을 클로즈업해 그린 듯 섬세한 결을 화면에 그려냈고, 이를 통해 ‘만지고 싶은 회화’를 탄생시켰다.

이번 전시를 통해 만난 두 작가는 서로의 작업을 보고서도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정 작가는 “김 작가의 화면은 매우 강렬하면서도 촉각적인 느낌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김 작가 또한 “같은 자연에서의 영감에서 출발했지만 정 작가의 화면은 은은한 파스텔톤이 심리적인 안정감을 줘 눈길을 끌었다”고 말했다.

‘상상’과 ‘도시’를 키워드로 감각을 일깨우다

김연홍 작가는 디지털 이미지를 기반으로 상상된 자연을 회화로 재해석한다. 사진=김금영 기자

이어지는 2전시실엔 ‘상상’을 기반으로 한 김연홍·박시월 작가의 작업이 이어진다. 김연홍 작가는 디지털 이미지를 기반으로 상상된 자연을 회화로 재해석한다. 이를 통해 현실과 환상이 맞닿는 경계의 순간에 주목한다. 천에 물감이 스며드는 스테인 기법을 활용해 형상과 색이 자연스럽게 번지고 스며들도록 하며, 이를 통해 현실과 허구가 겹쳐지는 장면을 만들어 낸다.

박 팀장은 “우리는 디지털 시대 이미지 홍수 속 쉽게 접하는 이미지들에 피로감을 느끼고, 스스로 판단, 기억하는 게 둔화되기도 한다”며 “이 가운데 김연홍 작가 작업의 출발은 디지털 이미지에서 시작되지만, 단순 재현에 그치지 않는다. 이 이미지들을 바라보던 순간의 감각적 경험, 빛의 톤과 공기의 밀도, 개인적인 취향과 감정의 떨림을 직관적으로 체화한 뒤 이를 회화적 언어로 풀어낸다”고 말했다.

박시월 작가는 '아름다움'에 대한 의문과 이를 상상으로 풀어가는 작업을 보여준다. 사진=김금영 기자

박시월 작가의 작업은 이석원의 에세이 속 “네가 본 아름다운 것을 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문장에서 출발한다. 과연 ‘아름다움’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혹은 언어로만 존재하는 개념인지에 대한 끝없는 의문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 의문을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이 기억하는 아름다운 순간을 듣고, 그 장면을 자신의 상상 속에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풀어낸다.

특히 그가 주목한 건 가장 가까운 존재인 어머니의 이야기다. 어머니가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태몽이었고, 박 작가는 어머니의 당시 꿈 속 풍경을 상상에 화면에 그렸다. 그 결과 현실에 존재할 것 같지만, 또 반대로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오묘한 풍경이 화면 위에 펼쳐지게 됐다. 박 팀장은 “타인의 기억을 그린다는 일은 실체 없는 대상을 더듬는 것과도 같다”며 “그럼에도 작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억과 감각의 존재를 믿으며 그것을 화면 위에 붙잡으려 한다”고 말했다.

최은정 작가는 이름없는 들꽃의 강인한 생명력에 주목한다. 사진=김금영 기자

마지막 3전시실엔 최은정·황원해 작가가 ‘도시’ 키워드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해체와 재생산이 반복되는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이들이 느낀 감각이 화면 위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를 최은정 작가는 꽃으로 풀어낸다. 그것도 공사 현장에서 피어난 강한 들꽃이다.

박 팀장은 “최은정 작가는 잔해 위 피어난 이름 없는 꽃을 통해 불안정한 세계 속에서도 지속되는 존재의 힘을 탐구한다”며 “최근의 ‘뱅크시아 오브 더 밸리’ 연작은 산불 이후 가장 먼저 싹을 틔우는 뱅크시아처럼, 모든 것이 사라진 듯한 자리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생명의 의지와 회복의 가능성을 그려낸다”고 말했다. 불꽃처럼 강인한 생명력을 드러내는 이 꽃들은 겹겹이 쌓인 색채와 밀도 있는 붓질을 통해 보다 강렬하게 화면에 피어난다.

황원해 작가는 도시를 고밀도로 포개진 시공간이 압축된 하나의 거대한 '판'으로 인식한다. 사진=김금영 기자

황원해 작가는 도시를 고밀도로 포개진 시공간이 압축된 하나의 거대한 ‘판’으로 인식한다. 붕괴와 재생산의 반복에서 생긴 균열 속 떨어져 나온 파편들, 즉 도시 속 감정적·시각적 부조화를 일으키는 장면들을 포착해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수직성과 그리드로 조직된 도시 구조, 직선과 곡선의 충돌, 입체와 평면의 대비,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장면, 유리 표면에 반사된 건물이 한순간 납작하게 보이는 풍경 등이 그 대상이다.

특히 그에게 캔버스는 단순한 평면이 아니라, 모호하게 확장되는 장치다. 때로는 거울처럼 이미지를 담고, 때로는 도시의 규칙을 담는 모듈처럼 작동한다. 이를 위해 캔버스를 두껍게 만들거나 프레임을 변형해 건축적 형상으로 확장하기도 하며, 공간 저네를 이미지로 덮어 캔버스와 벽의 관계를 전복시키기도 한다.

원혜경 대표는 “이번 전시는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감각과 감정, 기억과 상상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을 탐색한다”며 “디지털 이미지 시대 속에서도 예술이 인간의 감각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매개가 될 수 있음을 제시한다”고 말했다.

‘예감’전으로 참신한 작가 발굴, 소개 이어간다

선화랑 외관. 사진=김금영 기자

예감전은 고(故) 김창실 선화랑 대표 시절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이어져 온 선화랑의 대표 기획전이다. 아직 주목받지 않은 재능 있는 작가들을 발굴해 선보이는 데 목적이 있다.

원혜경 대표는 “선화랑은 예감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현재 한국미술계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 많은 작가들이 이 전시를 거쳤다”며 “코로나19 시기 약간의 인터벌 시기가 있었으나 10년 넘게 꾸준히 열어왔다”고 말했다.

초창기엔 젊은 연령대의 작가에 주목했으나, 현재는 제한을 두지 않고 다양한 작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원혜경 대표는 “20대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작가들을 소개하고 있다”며 “선화랑은 크게 두 가지 트랙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선화랑과 오래 전부터 인연을 쌓아오며 작업해온 작가군을 소개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참신한 작가를 발굴, 소개하는 장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돌아가신 어머니 때부터 이어져온 기획전 예감은 아직 주목받지 않은 작가들을 미술계에 선보인다. 그리고 이 재능에 나이가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매년 신년 첫 전시를 예감전으로 여는 것 또한 선화랑이 앞으로 함께 해나갈 작가들을 소개하는 중요한 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예감전에 자부심이 있다. 앞으로도 선화랑은 꾸준히 예술계에 신선함을 불어넣고, 재능 있는 작가들을 소개하는 역할을 꾸준히 이어갈 것”이라며 “이번 전시에서도 그 주역들의 작품을 만나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선화랑에서 4월 4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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