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옥션 스페셜리스트의 눈] 1000억의 거장, 그러나 멈추지 않는 실험가 데이비드 호크니

원근법을 부수고 아이패드를 든 88세의 현역

김민채 서울옥션 경매기획운영팀 스페셜리스트 기자 2026.03.16 14:31:46

김민채 서울옥션 경매기획운영팀 스페셜리스트

누군가 영국의 거리를 무심히 걷다가 사람을 붙잡고 가장 좋아하는 화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꽤 높은 확률로 ‘데이비드 호크니’라는 답변이 돌아올 것이다. 미술관을 찾지 않는 사람들조차 그의 이미지는 이미 익숙하다.

햇살이 반짝이는 수영장, 단순하지만, 정확한 선으로 포착된 인물, 그리고 아이패드 위에서 그려낸 밝은색의 풍경들까지. 그는 특정한 화풍이나 시대에 묶이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매체와 시선을 통해 ‘지금의 그림’을 만들어왔다. 그래서 호크니의 이름은 단지 한 명의 화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현대 미술이 얼마나 자유롭게 변화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으로 들린다.

세잔 이후의 가장 강력한 혁신가

과학사에는 아이작 뉴턴의 사과, 현대에는 스티브 잡스의 사과, 그리고 미술사에는 원근법을 통째로 뒤흔든 폴 세잔의 사과가 있었다. 그 이후 ‘본다’는 행위를 동시대의 감각으로 다시금 실험대 위에 올린 작가가 바로 데이비드 호크니다.

전통적인 서양화의 투시도법, 즉 원근법이 전제하는 시점과 우리가 실제로 사물을 보는 경험은 사실은 꽤 다르다. 우리는 카메라처럼 한 지점에 고정돼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 고개를 움직이고, 시선을 옮기며 사물의 앞과 뒤, 왼쪽과 오른쪽을 끊임없이 확인한다.

호크니는 바로 이 점에 주목했다. 그는 하나의 대상을 한 번 찍는 대신 수백 개의 시점에서 촬영한 뒤 그 수많은 사진을 이어 붙였다. 일반 사진에서는 초점 때문에 일부가 흐려지지만, 그의 화면에서는 모든 부분이 또렷하다. 카메라를 사용했지만, 카메라 렌즈가 흉내 낼 수 없는 인간의 실제 시야를 만들어 낸 것이다.

노르망디에서 켄싱턴까지, 다시 쓴 시각의 역사

데이비드 호크니, 30th May 2021, From the Studio(노르망디의 1년 연작 중), 2021. Three iPad paintings printed on paper mounted on Dibond Sheet, 65.3x282.5cm. 사진=서울옥션

1982년, 그렇게 수백 장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이어 붙인 미술사에 남을 역작 ‘포토 콜라주’로 원근법을 단숨에 부숴버렸던 호크니는 그로부터 약 40년이 흐른 뒤 붓 대신 아이패드를 들고 또 한 번의 시각 혁명을 단행한다.

낱개의 파편을 모으는 것을 넘어 시간의 흐름을 통째로 이어 붙인 90m의 대작 ‘노르망디의 1년(A Year in Normandie)’을 세상에 내놓았다. 노르만 정복의 끝없는 이야기를 묘사한 바이유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에서 영감을 얻은 그는 사건의 흐름을 시간순으로 이어가는 태피스트리의 형식이 계절과 풍경의 변화를 기록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갈 수 없던 코로나 시기 동안 스튜디오에 머물며 매일 관찰한 창밖의 풍경과 계절의 변화를 아이패드 위에 섬세히 녹여낸다.

해당 작품은 2021년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첫선을 보이며 모네의 수련에 화답했다. 이는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올해 3월부터는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고전과 현대가 공존하는 켄싱턴 가든의 풍경과 함께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다.

시장이 증명한 예술성

호크니의 작품은 시각적 실험을 넘어 미술 시장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여준다. 그는 살아 있는 영국 작가 중 단연 최고 수준으로 평가되며, 경매 기록만 놓고 보면 프랜시스 베이컨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2018년 뉴욕 크리스티 이브닝 세일에서 9031만 달러에 판매된 캘리포니아의 수영장 풍경 ‘Portrait of an Artist(Pool with Two Figures)’(1972)가 바로 그 예다.

호크니의 친구이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전설적인 큐레이터 헨리 겔드잘러와 당시 그의 파트너 크리스토퍼 스콧의 미묘하고도 감각적인 관계를 담은 ‘Henry Geldzahler and Christopher Scott’(1969) 또한 2019년 크리스티 런던 이브닝 세일에서 3766만 파운드에 판매되며 시장 영향력과 더불어, 더블 포트레이트라는 독창성을 입증했다. 그가 70대에 고향 요크셔로 돌아와 완성한 ‘이스트 요크셔(East Yorkshire)’ 시리즈는 에디션임에도 불구하고 한화 5억을 훨씬 상회하는 가격에 거래되며 미술 시장에서 호크니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혁신가이자 시장의 거물로 군림하고 있지만 정작 호크니 자신은 그 화려한 수식어들에 무심한 듯 보인다. 1990년 영국 왕실의 기사 작위를 거절하며 “내게 가치 있는 건 오직 친구들뿐”이라 말했던 그는 명예로운 경(Sir)의 칭호 대신 친구들과 어울려 그림 그리는 자유를 택했다.

88세의 나이에도 자신을 그저 ‘일하는 사람’이라 부르며 매일 아이패드를 들고 세상의 빛을 탐구하는 그에게선 여전히 소년의 설렘이 보인다. 결국 우리가 호크니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1000억 원이라는 숫자 때문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행위 자체가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임을 증명하는 그의 정직하고도 따뜻한 진심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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