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세계가 흔들렸지만, 어떤 시장은 오히려 더 견고해졌다. 바로 홍콩이다. 고조된 지정학적 긴장 속에서도 약 9만 1500명의 관람객이 다녀간 아트 바젤 홍콩을 필두로 화이트 글로브 세일(낙찰률 100%)을 기록한 크리스티의 이브닝 경매까지 이어지며, “홍콩이 돌아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올해 홍콩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아트 바젤이 확보한 유동성 위에서, 글로벌 경매사들의 정교한 마스터피스 포지셔닝으로 시장의 실질적인 확장을 증명했다는 데 있다. 이처럼 두 축이 만든 흐름은 향후 뉴욕과 런던 세일, 그리고 올해 프리즈 서울을 포함한 주요 시장을 읽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홍콩 미술 시장 50년, 변곡점을 넘어서
1973년 홍콩에 첫 오피스를 오픈한 소더비를 시발점으로 1986년 잇달아 홍콩에 진출해 올해 40주년을 맞은 크리스티의 행보는 아시아 미술 시장에서 홍콩이 어떤 위치를 점해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반세기에 걸쳐 축적된 전략적 결과에 가깝다. 미술품 수입, 수출에 대한 관세가 없는 자유무역 환경은 글로벌 부호들의 자산 이전과 비용을 최소화했고, 고가 작품의 운송과 보관을 지원하는 물류 인프라는 거래 실행의 안정성을 확보하며 시장의 매력을 강화했다. 2013년 세계 최다 아트 페어 아트 바젤까지 홍콩에 상륙하며 홍콩은 지난 10여 년간 대체 불가능한 아시아 미술 시장의 중심지로 자리해 왔다.
그 사이 여러 차례의 뼈아픈 변곡점도 있었다. 중국으로의 반환 이후 제도적 변화와 국제 금융 허브의 빈자리를 빠르게 잠식했던 싱가포르의 부상, 팬데믹 후 급격히 확대됐던 미술 시장이 2023~2025년을 거치며 조정을 겪기도 하여 홍콩 시장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심이 있었다. 그럼에도 올해 아트 바젤이 홍콩 정부와 향후 5년간 아시아 지역 단독 개최 도시의 지위를 유지하기로 한 협약은, 이 도시가 여전히 금융과 문화가 결합한 글로벌 허브로 기능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각인시킨다.
붉은색 랜드마크의 신기록
출품작 37점을 전량 판매하며 총 6억 5570만 홍콩달러(한화 약 1263억 원)의 매출을 기록한 크리스티는, 지난해 3월 이브닝 세일 대비 17% 증가한 성과를 보이며 3월 초 런던 세일의 강한 상승세를 자연스럽게 이어갔다.
그 중에서도 전체 분위기를 견인한 작품은 9210만 홍콩달러(약 177억 원)에 거래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1991년 작 ‘추상화(Abstraktes Bild)’다. 출품작이 제작된 1991년은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그의 첫 대규모 회고전이 열린 골든 이어이자, 수십 년간 갈고 닦은 스퀴지(Squeegee) 기법이 예술적 정점에 달했던 시기다.
붉은 안료가 만들어내는 긴장감과 압도적인 에너지를 극대화한 이 수작은 크리스티 아시아 진출 40주년을 기념하는 앵커로 기능했다. 기념비적인 해를 맞아 가장 상징적이면서도 고가의 카드로 서구 추상화 대가인 리히터를 선택한 전략, 그리고 그것이 중화권에서 번영을 상징하는 ‘레드’와 맞물려 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모습은 아시아 시장의 영향력이 다음 단계로 도약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크리스티의 영원한 라이벌 소더비에서도 조안 미첼의 말년 명작 ‘라 그랑드 발레 7(La Grande Vallée VII)’(1983)을 1억 3730만 홍콩달러(한화 약 265억 원)에 판매하며 아시아에서 거래된 여성 작가의 작품 중 가장 높은 최고가를 경신했다. 미첼이 1983년에서 1984년 사이에 제작했던 21점의 회화 연작 중 하나인 출품작은 그녀의 친구이자 프랑스 작곡가인 지젤 바르도(Gisèle Barreau)에게 헌정된 작품이다.
미첼이 사랑하는 여동생을 잃은 지 3일 만에 바르도 역시 사촌을 잃게 되면서, 깊은 상실과 슬픔을 나눴던 두 친구의 유대가 캔버스 위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이토록 애틋한 서사를 품은 걸작이 새로운 기록을 쓴 배경에는 홍콩 시장이 지난 몇 년간 다져온 정밀한 빌드업이 있다. 그들은 그간 크리스틴 아이 추나 루시 불 같은 블루칩과 라이징을 통해 여성 추상 섹터에 대한 잠재성을 꾸준히 키워왔다.
소더비는 이들이 닦아놓은 토대 위에 조안 미첼이라는 거장의 작업을 적시 배치해 ‘랜드마크 채터(Landmark Chater)’로의 물리적 이전에 걸맞은 새로운 랜드 마크를 새겼다. 이는 뉴욕 경매에서 세실리 브라운이 여성 작가의 판도를 바꿨던 흐름과 그 궤를 이어 볼 만하다.
마스터피스가 활약할 다음 시장
이러한 홍콩 경매사들의 행보는 국내 시장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최근 서울옥션이 3월 홍콩 현지에서 선보였던 프리뷰를 거쳐 국내 경매에서 판매한 요시토모 나라(150억 원, 낙찰가)와 쿠사마 야요이(104억 5000만 원, 낙찰가)의 낙찰 결과는 한국 시장 역시 글로벌 블루칩의 안전 거래처로 완연히 기능하고 있음을 입증했다.
이번에 거래된 나라와 쿠사마의 작품은 해당 작가의 작품군 중에서도 희귀성이 극대화된 수작들로 이들의 성공적인 낙찰은 단순히 높은 숫자를 기록한 것을 넘어선다. 시장이 위축될수록 컬렉터들은 검증된 대작으로 자본을 집중시키며 리스크를 방어해 왔고, 한국 시장 또한 이러한 로직이 가동되는 국면에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홍콩이 리히터와 미첼을 통해 서구권 세일의 흐름을 이어받았듯, 한국 역시 초고액 블루칩을 안정적으로 소화해 내며 글로벌 컬렉터들의 시선을 서울로 돌리게 하는 영리한 피벗을 성공시킨 것이다.
물론 이러한 마스터피스 중심의 전략적 판매가 시장 전체의 낙관을 곧바로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주요 경매사들이 중요한 분기점을 앞두고 역량을 총동원한 결과라는 점, 그리고 자본의 흐름이 초고가 대작에 집중되면서 중소형 작품이나 신진 작가층으로의 낙수효과가 실질적으로 이어질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과제다.
화려한 경매 기록은 대중의 시선을 압도하며 낙찰 총액 파이를 키우는 데 기여했지만, 한편으로는 높아진 가격 장벽이 새로운 컬렉터들의 지속적인 유입을 이끄는 촉매제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물음표가 남는다.
그럼에도 이번 3월 홍콩과 서울이 남긴 기록들은 아시아 시장이 반복되는 성장과 조정속에서 내실을 다져가고 있음을 방증한다. 글로벌 마켓의 메커니즘을 기민하게 흡수하며 깊이 있는 체력을 갖춰가고 있음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침의 과정은 여느 시장이 그렇듯 스스로의 체급을 다져가는 필연적 단계로 보인다.
그 사이에서 우리가 할 일은 단순한 숫자의 기록을 넘어 자신만의 시안으로 이 흐름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시장과 함께 호흡해 나가는 것이 미술, 그리고 시장을 향유하는 가장 정교한 태도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