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현장] 91세 현역 작가 김윤신…호암에 펼쳐진 그녀의 나무 숲

대규모 회고전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 선보여

김금영 기자 2026.04.02 10:36:11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전 현장. 사진=김금영 기자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 사자성어가 아니다. 김윤신(91) 작가의 작업 이념이다. ‘작가와 재료가 하나가 돼(合) 작품이라는 또 다른 하나가 탄생(分)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는 건 현재 90세가 넘는 나이에도 전기톱과 붓을 들고 여전히 현역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의 열정이다. 이 열정을 호암미술관에 풀어놓았다.

70여 년 예술 세계 보여주는 작품 170여 점

이번 전시는 김윤신의 조각을 비롯해 판화, 회화 등 다양한 작품 170여 점을 선보인다. 사진=김금영 기자

호암미술관이 한국현대조각의 전개에 중추적 역할을 한 1세대 여성 조각가 김윤신의 대규모 회고전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을 마련했다.

1935년 원산에서 출생한 김윤신의 일생은 예술과 함께였다. 해방과 전쟁이라는 격동기 척박한 예술 환경 속에서도 그는 예술을 놓지 않았다. 1955년 홍익대학교 조각과에 입학해 예술을 공부했고, 특히 1970년대 후반부터는 나무를 재료로 집요하게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본질을 조각해왔다. 그 행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시는 이런 작가의 예술 세계를 총체적으로 살필 수 있도록 구성했다. 김성원 호암미술관 부관장은 “70여 년을 예술에 헌신해온 김윤신이 현재까지 제작한 작품은 평면, 입체를 아울러 무려 1500점에 이른다”며 “이번 전시는 시간이 오래돼 소재가 불분명해진 1960년대 이전의 작품을 제외하고 현존하는 가장 초기작인 1960년대 파리 유학 시절의 판화부터 이후의 실험적인 평면 작품들, 그리고 작가가 60대에 들어 몰입하기 시작한 회화까지 170여 점을 선보인다”고 말했다.

전시장 내부는 정원을 산책하듯 동선을 꾸렸다. 사진=김금영 기자

이 작품들을 연대기식으로 쭉 늘어놓지 않고 자유롭게 조화를 이루는 구성을 택했다. 그래서 정원을 걷듯 전시장 동선을 꾸렸고, 이에 따라 작품도 배치됐다. 전시를 기획한 태현선 수석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 170점이 많아 보이지만, 앞으로 회고전을 3~4회는 더 해야 할 정도로 김윤신의 작업 세계가 매우 방대하다”며 “이 많은 작품들을 그저 시대 순서에 따라 수평적으로 나열하기보다는, 작품 사이의 연관 관계를 살피며 자연스럽게 흐름을 이해하도록 돕는 데 주안점을 뒀다”고 말했다.

‘기원쌓기’부터 아르헨티나에서 전기톱 들기까지

김윤신 작가는 1980년대 아르헨티나로 떠나 현지의 나무를 활용해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사진=김금영 기자

1층 전시실은 1970년대 중후반 ‘기원쌓기’ 조각 시리즈와 ‘합이합일’ 이념이 형성되던 시기의 ‘합이합일 분이분일’ 시리즈로 시작한다.

특히 기원쌓기는 작가의 어린 시절 염원으로부터 비롯된 시리즈이기도 하다. 태현선 큐레이터는 “김윤신은 어렸을 때 돌탑을 쌓고 촛불을 켜 기도를 했다고 한다. 어린 날 작은 돌탑을 쌓은 이 경험은 이후 작가의 초기작에서 수직적 나무 조각 형태로 이어지게 됐다”며 “하늘로 향하는 조각은 작가 개인의 독실한 신앙의 표현이자, 끊임없이 이어지는 예술에 대한 열망으로도 읽힌다”고 말했다.

조각뿐 아니라 작가의 1960년대 파리 유학 시절의 석판화와 드로잉, 1970년대 캔버스 작업도 볼 수 있다. 때로는 유기적이면서도 자유분방한 평면 추상 작업은 작가의 조각과 함께 어우러지며 장르의 경계를 넘어 일관되게 펼쳐진 김윤신의 조형적 관심을 확인하게 한다.

이번 전시를 위해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소장품을 특별 대여했다. 사진=김금영 기자

1980년대엔 더 역동적으로 전개된 작품 양상들이 눈에 띈다. 이는 아르헨티나에서의 경험이 반영됐다. 김윤신은 어느 정도 작업의 안정을 찾은 1980년대 중반 돌연 아르헨티나로 훌쩍 떠났다. 당시를 그는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게 회상했다.

김윤신은 “방학 때 아르헨티나를 처음 갔는데 비행기에서 내려다봤던 광경이 아직도 떠오른다. 하늘 아래 넓은 벌판에 나무가 형성한 엄청난 숲이 펼쳐져 있는데, 압도감이 상당했다”며 “당시 한국은 전쟁이 끝난 뒤라 자연 환경이 많이 파괴되고 어렵고 가난했다.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해 다들 치열하게 살아야 했다. 그런 와중 찾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느리고 조용하며 평온했다. 그 여유가 나의 발걸음도 멈추게 했다”고 말했다.

특히 아르헨티나의 육중한 나무는 김윤식에게 특별한 영감을 줬다. 김윤신은 “한국 나무는 부드러운 것이 많은데 아르헨티나의 나무는 종류가 다양한 가운데 매우 단단한 것도 있었다. 이 나무들을 하나하나씩 다 거쳐서 작품을 1000점 만들면 한국에 돌아가겠다는 마음으로 작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나무의 역동적인 결이 느껴지는 김윤신 작가의 작품. 사진=김금영 기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아르헨티나에서 다시 처음부터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한 여정. 물론 쉽진 않았다. 작업실이 없어서 길가에서 작업을 하기도 했고, 재료를 구하기 어려워 길가에 버려진 나무를 직접 주워다 쓰기도 했다. 하지만 열정엔 더 불이 붙었다. 아르헨티나의 단단한 나무를 자르기 위해 처음으로 전기톱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는 자연의 원초적 생명력을 더 역동적으로 표현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그의 작업을 세계가 알아보기 시작했다. 1985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립현대미술관 주최의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열었고, 2008년엔 ‘김윤신 미술관’ 설립으로 이어졌으며, 2024년 제60회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초대됐다. 국내외 주요 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번 전시를 위해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소장품을 특별 대여했다. 김윤신이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지 4년째에 제작한 조각으로, 이번 전시를 통해 국내 관람객을 처음 만난다,

‘회화-조각’ 시리즈의 현재 진행형

돌 조각 작품들이 전시된 모습. 사진=김금영 기자

2층 전시실에선 김윤신 작업의 또 다른 축인 돌조각을 비롯해, 2000년대 이후 다채롭게 변화한 나무 조각들을 볼 수 있다.

 

김윤신은 198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브라질과 멕시코의 오닉스, 준보석 등을 사용한 돌 조각으로 재료의 범위를 넓히며 작업을 확장했다. 특히 아르헨티나 원주민 마푸체 부족의 색채와 문양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2000년대 초기 조각에서는 아르헨티나의 자연과 문화를 흡수한 김윤신 예술의 양식적 발전이 드러난다.

아르헨티나 원주민 마푸체 부족의 색채와 문양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2000년대 초기 작품들. 사진=김금영 기자

김윤신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회화에도 깊이 몰입해 조각과 조응하는 회화 연작들을 선보였다. 이른바 ‘회화-조각’ 시리즈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작업하기 어려웠던 팬데믹 상황에서 비롯됐다. 코로나19 사태로 바깥으로의 출입이 어려워지며 작가 또한 작업에 쓸 나무도 구하기 힘들어졌다.

 

김윤신은 이때 작업하다 남은 나무들이나 폐자재를 모아 조립했고, 여기에 색을 입히며 그림을 그렸다. 이 과정에서 조각 하나하나가 작은 캔버스가 돼 그림과 융화가 됐고, 김윤신은 이를 회화-조각으로 명명했다. 전시는 이 작품들을 하나의 런웨이처럼 구성해 길게 펄쳐 놓았다. 2층 전시장 외부에 설치된 최근작 ‘노래하는 나무 2013-16V1’(2025)도 이 일환으로, 전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며 김윤신의 행보는 현재 진행형임을 알린다.

'회화-조각' 시리즈가 런웨이처럼 연출돼 있다. 사진=김금영 기자

호암의 첫 여성작가 대규모 개인전

2층 전시장 외부에 설치된 최근작 '노래하는 나무 2013-16V1'(2025). 사진=김금영 기자

이번 전시는 호암미술관이 선보이는 첫 여성작가 대규모 개인전이라는 점에서도 눈길을 끌고 있다. 김성원 부관장은 “김윤신은 자신의 삶에 예술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갖고 열정적으로 작업을 이어왔다. 90세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작업 이야기만 나오면 어린아이처럼 눈을 밝힌다. 그 맑은 눈빛을 보면서 많은 걸 배웠다. 김윤신은 이번 전시를 위해서도 그간의 작품뿐 아니라 또 신작을 작업해야 한다며 붓과 톱을 들었다”며 “이런 김윤신의 대규모 회고전을 선보일 수 있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윤신 또한 남다른 감회를 밝혔다. 그는 “2024년 베니스비엔날레 때도 그렇고 이번 전시도 그렇고 이런 날이 올지 상상도 못했다. 과거엔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어려웠지만, 현재는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다”며 “예술뿐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한다’는 목표가 뚜렷해야 한다”며 현역 작가로서의 조언도 전했다.

김윤신 작가의 다큐멘터리 영상. 김윤신 작가는 전기톱을 사용해 찰나의 순간에 집중해 작업한다. 사진=김금영 기자

현재 리움미술관이 같은 기간 티노 세갈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는 점에서도 관심을 받고 있다. 티노 세갈은 ‘물질적 자원’에서 벗어나 사람의 신체 몸짓 등 비물질에서 비롯된 ‘살아있는 예술’을 추구한다. 조각은 회화와 더불어 물질적 자원을 기반으로 하는 대표적인 장르 중 하나이고, 이 장르를 대표하는 작가가 김윤신이다. 즉, 삼성문화재단이 ‘비물질’과 ‘물질’을 대표하는 두 작가를 동시에 내세우고 있는 셈이다.

관련해 김성원 부관장은 “김윤신과 티노 세갈의 나이 차이는 상당하다. 이들을 통해 현대미술사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다. 김윤신은 자연의 나무를 통해 인생을 발견하고, 이를 예술 철학에 반영해 왔다. 또 티노 세갈은 물질적 조각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예술 분야에 다른 방식의 질문을 던지며 현대미술의 지속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즉 이들의 작업은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현 시대에 공존하는 이 작가들을 통해 우리는 고정되지 않은 예술의 가능성에 대한 끊임없는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윤신 작가는 "그저 좋은 작품을 남기고 가야겠다는 생각뿐"이라며 여전히 작업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사진=김금영 기자

김윤신은 “한국에서 추상 작업이 전무하던 시기 봤던 한 전시를 보고 느꼈던 감동이 생생하다. 조각이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고, 거기서 시작된 작업이 지금까지 이어졌다”며 “솔직히 나이를 의식하지 않는다. 나의 영혼과 육신이 하나가 돼 집중하는 그 순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다. ‘내가 원하는 예술이 어떻게 표현될까’ 늘 생각하며 작업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어린 시절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풀, 꽃, 나무와 이야기하며 자랐다. 나무는 바로 나이자 친구다. 거꾸로 쓰러진 소나무를 보고 어린 마음에 ‘쟤는 내 친구인데’ 하며 안타까워했고, 버려진 나무를 작업해 작품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며 “톱을 들고 마음을 비우면 나무의 공간이 보인다. 그 찰나의 순간에 집중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뭐가 돼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그저 좋은 작품을 남기고 가야겠다는 생각뿐”이라며 “거창한 꿈이라고 할 것은 없다. 그저 원하는 작업을 평생 해왔고, 젊은 후세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면 매우 기쁠 것 같다”며 웃어보였다. 전시는 호암미술관에서 6월 28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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