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인요한 새누리당 국민대통합위원회 부위원장

박근혜 대통령 당선은 대한민국 시대적 요청

최정숙 기자 2012.12.10 13:56:52

“세계적으로 여성 지도자가 많이 나오고 있다. 대한민국도 여성 대통령이 나올 때가 됐다. 역대 대통령들을 봐왔지만 말을 먼저 하고 그 다음에 생각하는 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는 생각을 한 다음에 말하는 분이라 걱정할 것이 없다. 외국 정상들과 만나서도 뛰어난 외교력을 보일 거라고 생각한다.” 새누리당 국민대통합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인요한(미국명 존 린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소장. 그는 요즘 ‘여성대통령론’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노란 머리와 파란 눈을 가졌지만, 찜질방을 좋아하고 구수한 전라도사투리 억양으로 “당신 고향이 어디요”라고 묻는 그는 영락없는 대한민국 사람이다. 지난 3월에는 한국 국적도 취득했다. 그는 1959년 전남 순천에서 출생했다. 진외조부(아버지의 외조부)가 1895년 선교활동을 위해 이주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현재 5대째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 통역을 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한국형 앰뷸런스를 개발해 5000대를 보급했다. 1984년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숨지면서 적절한 응급조치를 받지 못하고 택시로 병원에 옮겨지던 중 숨진 것이 계기가 됐다. 1987년에는 서양인 최초로 의사국가고시에 합격했다. 1997년에는 외증조할아버지인 유진 벨 선교사의 이름을 딴 유진벨재단을 형과 함께 설립했다. 이후 북한 결핵퇴치사업을 시작, 6년 동안 350억원을 모금해 지원했다. 그의 선친들은 병원, 학교, 교회를 많이 세웠다. 대전에 있는 한남대도 인 부위원장의 할아버지가 설립했다. 항상 옳다고 생각한 일을 실행으로 옮겼던 인 부위원장은 두 달 전 새누리당에 합류했다. 이번에는 대한민국에 여성대통령이 나오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 부위원장이 박근혜 후보를 처음 만난 것은 12년 전이다. 그는 당시 북한 김정일을 만나고 온 박 후보에게 “어머니가 그렇게 (북한에 의해) 희생됐는데 어떻게 만나고 왔냐”고 물었다. 이 때 돌아온 박 후보의 대답은 “국가 일은 국가 일이고, 가족 일은 가족 일”이었다. 그 후로 박 후보에 대한 인 부위원장의 부정적인 시각은 바뀌기 시작했고, 박 후보를 돕게 된 계기가 됐다. 다음은 인요한 새누리당 국민대통합위원회 부위원장과의 일문일답이다. - 지난 10월 국민대통합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됐다. 어떻게 합류하게 됐나. “지난 얘기지만 (작년) 비대위 때도 요청이 왔었다. 그때는 거절했었다. 당시 국적도 미국이었고. 내가 올해 3월에 한국 국적을 취득해 지금은 완전히 한국 사람이 돼 있다. 그러고 나서 10월 3일인가, 박근혜 후보가 최측근을 보냈다. 정치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측근이 우리 집에 와서 세 가지를 도와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남북 관계, 동서 화합, 다문화 가정이었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까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였다. 내 고향은 전라도 순천이다. 새누리당에 합류한다고 하니까 고향에서 오해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난 누구보다 고 김대중 대통령을 사랑하고 위대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 됐을 때도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참여정부 때는 대북정책 자문도 했다. 문제는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이다.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고 했지만 우리에게 큰 실망을 안겨줬다. 이번에는 새누리당을 개혁해 보려 한다. 누구보다 나라를 생각하는 박 후보를 보아왔기 때문이다.” - 한국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한국은 남을 괴롭히지 않은 아름다운 역사가 있다. 그래서 외국 간 중재를 할 수 있다. 큰 나라들이 싸울 때 한국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거다. 한류스타 싸이를 봐라. 무한한 가능성을 싸이가 보여줬다. 모든 분야에는 싸이가 있다. 더 많은 인재를 발굴해야 한다. 한국 사람들은 스스로 과소평가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머리가 좋다. 이제는 우리가 가르쳐야 한다. 한국 사람들도 미국 가서 정치 하고 미국이라는 나라를 경제난에서 구할 수 있다고 본다. 옛날에는 미국이 한국을 도와 줬지만 이제는 거꾸로 한국이 도와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 한국의 가장 큰 문제는 뭐라고 보나. “소모전이다. 좌와 우, 보수와 진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대립이 심하다. 우리는 세련된 보수와 이성적인 진보가 필요하다. 가장 큰 문제는 나이차다. 세대 간 소통이 없다. 난 어렸을 때 초가집에 살면서 달구지도 타 봤다. 온돌방 교육도 받았고. 군불 떼고 들어앉아서 어르신들의 교훈을 듣는 과정을 겪었다. 연세 의대를 나왔고 고대에서 석박사를 받았지만 그 교육보다 소중한 것은 아랫목 교육이다. 어르신들이 역사와 도덕, 인간됨됨이를 가르쳤다. 그런데 지금은 나이든 세대와 젊은 세대가 대화할 메뉴가 없다. 소통을 한다는 것은 나라의 국력이다. 적극적인 소통이 필요하다.”

- 얼마 전 새누리당 K-move 행사장에도 참석했는데 지금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뭐라고 생각하는지. “지금 젊은이들이 희망이 없다. 일자리가 부족하고 취직도 안 되고. 젊은이들이 고시원에 가 있고 눈물 날 일이다. 새누리당이 이런 절망에 빠진 젊은이들을 끌어안아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자리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는 기업, 재벌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기업이 돈을 벌어 지갑을 열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진보, 운동권에서 압박을 하면 기업들은 주머니를 닫는다. 투자해 봐야 당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재벌들이 법을 지키게 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 현행법으로도 규제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재벌들은 힘이 있으니까 공정하게 적용이 안 되는 거다. 재벌들이 잘못을 하면 감방을 보낼 수 있도록 법을 제대로 적용해야 한다. 그러면 중소기업도 살고 결과적으로 일자리도 창출 된다. 기업들에 대해 지원해 줄 것은 지원하고 잘못한 것은 제대로 벌하면서 일자리창출을 유도해야 한다.” - 복지로 도움을 주는 방법은 어떤가. “복지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복지는 안 된다. 그게 결국은 누구 돈인가. 잘못하면 그리스처럼 된다. 낭비를 줄이는 것이 먼저다. 복지 약속은 쉽게 말해 ‘네 돈 뺏어서 다시 너한테 줄게’ 이런 말이다. 사회주의나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북한을 자주 다녀오거나 그리스에서 일어난 일을 보면 복지국가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될 거다. 모든 것을 국가에 의존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다. 자유에는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 중에는 애국가 부르는 것을 거부하는 이들도 있다.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 사람은 국민이 심판해야 한다. 애국가를 안 부르는 것은 자유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그게 북한이라면 가능하겠나. 자기 나라 국가를 안 부르면 어떻게 되겠나. 불법행위를 하고 대한민국을 사랑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투표 때 국민의 심판에 맡겨야 한다. 그런 사람들은 국회에 보내면 안 된다.” - 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하고 있다. “박 후보의 아버지인 박 대통령에 대해 인권과 관련한 (부정적인) 이야기가 많다. 물론 인권과 경제성장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경제발전에 있어서 박정희가 없었으면 우리는 아마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했을 거다. 그 당시 경제가 발전하기까지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희생도 컸다. 근로자들은 중동으로, 광부와 간호사들은 독일로 갔다. 구로공단에서는 노동자들이 재봉틀 앞에서 16시간씩 섬유를 만들어 팔았다. 가발공장도 있었고. 내가 북한에 가서 ‘대한민국에서는 여성들의 머리카락까지 파는 희생을 했다’고 설명한 적도 있다.” - 박정희 대통령을 미국의 링컨 전 대통령보다 훌륭하다고 했었는데. “박 대통령은 링컨 대통령보다 훌륭한 사람이다. 링컨은 신문사 300개를 통폐합했고 독재도 했다. 그러나 링컨은 연합을 살렸다. 연합 하나 지킨 것으로 훌륭한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박 대통령 때 유신헌법 있었다. 내 주변에도 희생자 있다. 독재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가 뭘 했나. 전쟁패배의식에 빠진 대한민국을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면서 패배주의를 이겨났다. 박 대통령은 경제 발전을 이루고 오늘날 우리가 잘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줬다. 이명박 대통령도 일을 많이 했다. 나는 이 정권의 대북 정책은 싫어하지만 외교를 많이 한 것은 사실이다. 그 사람의 업적도 봐야 한다. 누구나 장단점이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느 하나를 놓고 도매금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뭐 하나 마음에 안 들면 무섭게 욕을 한다. 어떤 신문에 누가 나쁜 사람이라고 글을 쓰면 나는 거꾸로 생각한다. 너무 쉽게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거다. 사람은 다 나쁜 면이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전체를 놓고 업적이 뭐냐를 봐야한다. 김대중 대통령도 박정희기념관을 설립할 수 있도록 해 줬다. 박정희와 박근혜를 연결시켜서 박근혜한테 책임져라? 이거는 웃긴 얘기다. 박 대통령도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고 하지 않았나. 자꾸 그렇게 연결시키는 것은 상대가 공격할 것이 없어서 공격하는 거다.”

- 참여정부 때 북한 관련 자문도 했는데. 대북관계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북한의 나진 선봉 경제무역지대 개발을 위해 러시아, 중국 등이 계약을 하고 투자를 했다. 우리도 빨리 발을 들여놔야 한다. 지금 우리 건설회사들이 많이 놀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집도 많이 짓고 해서 사회간접자본(SOC) 사업 비중이 줄어들고 있다. 때문에 우리 건설 회사들이 북한에서 SOC사업을 해야 한다. 북한에 고속도로도 놓고, 철길도 깔고 해야 한다. 서독은 통일 전 동독에 수십 년 동안 포장해 주고 교량도 놔주고 그랬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언제까지 우리가 섬으로 살 것인가. 반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북한에서는 적절한 통행료를 받으면 서로 좋은 거다. 일부에서는 전쟁이 나면 북한이 그 길을 이용하지 않느냐 하는데 지금은 전자시대다. 길 놔주고 다리 하나 끊는 건 간단한 일이다. 북한을 자꾸 상대해야 한다. 이는 대응이나 포용의 의미가 아니다. 북한의 시골에 있는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우리가 깔아 준 길을 지나가면서 ‘남조선 형제들이 깔아준 길’이라고 생각하고 고마워해주면 좋다. 분위기를 바꿔줘야 한다. 돈을 주라는 얘기가 아니다.” - 북한 인권 문제와 관련한 생각은? “북한 인권 문제는 가난함에서 시작된다. 인권을 파괴하는 것은 가난함이다. 사람이 굶어죽고 못 먹어서 병 생기고 그런 것도 인권침해다. 식량 지원도 중요하고, 건강한 통일을 위해서는 보건에 돈을 많이 써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 낚시대를 주는 거다. 개성특구 발전은 우수한 우리 기술과 북한 노동력을 합치면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동포끼리 하면 더 좋지 않겠나.” - 박 후보가 대북관계를 잘 할 거라고 보나 “박 후보가 여러모로 유리하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난 게 가장 크다. 또 박 후보는 여성이다. 위협적이지가 않다. 지금 NLL(북방한계선) 문제도 있는데 보수 쪽에서 북한을 만나면 더 큰 협상을 할 수가 있다. 진보 쪽에서 가면 협상에 한계가 있다. 미국도 40여 년 전 중국과 수교를 맺을 때 공화당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갔었다.” - 여성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유는? “여성은 대한민국을 잘 살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 되는 것은 어렵다, 여자가 어떻게 하느냐’라고 한다. 하지만 여성은 이 나라 경제 발전의 축을 이룬다. 여성으로 정권교체가 필요한 때다. 내가 박 후보를 만난 것은 12년 전이었다. 당시 박 후보에게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가 그렇게 (북한에 의해) 희생됐는데 어떻게 김정일을 만나고 왔냐고 물었다. 사실 그때까지 박 후보를 좋아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안 좋은 얘기도 많이 들었고. 일부러 어려운 질문을 해서 반응 보려고 한 거였다. 그런데 박 후보가 ‘국가 일은 국가 일이고 가족 일은 가족 일’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박 후보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박 후보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의젓했다. 한나라당이 곤두박질 칠 때 살려 놨고, 세종시에 대해서도 끝까지 자기가 약속한 것을 지키려고 했다. 그걸로 업적은 충분하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난 여기에 감투를 바라고 온 게 아니다. 옳은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서 온 거다. 김성주 회장과도 고민 했는데 지금도 손해 보는 것밖에 없다. 김성주 회장은 판매가 줄었다. 내가 지금은 캠프에 참여하고 있지만 12월 19일 대선이 끝나면 모든 것을 내려놓을 거다. 난 한국 사람에게 이미 어마어마한 선물을 받았다. 1980년대 특혜를 받아서 연세대에 입학했다. 1990년대에는 가장 젊은 병원 부소장으로 왔다. 한국이 고마워서 은혜를 갚는 마음으로 앰뷸런스를 구입했다. 내가 구입한 앰뷸런스가 5000대다. 350억원을 모금해서 북한을 도왔고. 이제 빚을 갚았다 싶었는데 시민권을 줬다. 평생 98%가 한국인이었는데 귀화하면서 나머지 2%를 채워 완벽한 한국 사람이 됐다. 귀화하고 국회의원 선거 때 투표도 했고. 지금은 적극적으로 대선에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게 끝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의료의 한류화다. 선거가 끝나면 의사로서, 교수로서 살다가 12년 후에 순천으로 내려가 살 거다. 우주의 중심 순천 아닌가(웃음).” - 최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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