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그림 길 (89) 두타산] 깨달음 얻는 두타산에 수줍게 이름 새긴 겸재

이한성 옛길 답사가 기자 2021.11.29 10:47:26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가을 겸재를 찾아 떠나는 두 번째 두타행(頭陀行)이다. 도(道)를 구하는 이들은 마음의 두타행을 떠나겠지만 필자는 KTX를 타러 이른 새벽 역으로 향한다. 예전과는 달리 차를 가져가지 않아도 두타산 가는 길은 KTX로도 당일에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강릉 지나 동해역에 도착하는 데는 2시간여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두타산행 시내버스도 탈 수 있고 시간이 안 맞으면 택시를 이용해도 큰 부담은 되지 않는다.

겸재 그림 어디에도 두타산을 그린 그림은 찾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겸재는 두 점의 두타산 그림은 그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필자의 희망사항이다. 오늘도 소설을 쓴다. 소설의 근거는 이런 것이다. 여러 해 전 투타산(頭陀山) 용추폭포(龍湫瀑布)에 겸재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름 산행길 댓재에서 두타산에 올라 아슬아슬 산길을 내려와 용추폭포를 찾아갔다. 폭포 주변 글자로 보이는 글자는 모두 보려 했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아니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단풍에 물든 두타산 경치.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요즈음 겸재 그림을 찾아다니던 참에 마침 지인으로부터 사진 한 장을 받았다. 흐릿하기는 하지만 용추폭포에 남긴 정선, 이병연의 이름을 새긴 각자(刻字)였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초가을 용추폭포를 찾았다. 찾기는 했지만 마침 날도 구름끼고 시각대도 적절치 않아 선명하지가 않았다. 단풍 깊이 든 철 오전시간에 다시 오리라. 마침 두타산 베틀바위 멋진 트레킹 코스도 개방된 즈음이라 최고의 답사가 되리라 기대하며 이 가을 두 번째 두타행에 나섰다. 예상대로 청추(淸秋)의 용추폭(龍湫瀑)에서 겸재와 사천 두 분은 기다리고 계셨다.

용추폭포의 정선, 이병연 각자 위치.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정선과 이병연의 각자(붉은 점으로 표시).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정선과 이병연의 각자가 잘 보이도록 특수촬영한 자료사진.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은 1732년 윤 5월 척주(삼척)부사로 발령받고 1736년 4월 삼척을 떠났다. 5년 가까운 시간을 삼척에서 지낸 것이다. 이 시기 겸재(謙齋) 정선(鄭歚)은 포항 북쪽 청하(淸河) 현감으로 제수되니 1733년 6월부터 모친이 세상을 떠난 1735년 5월까지 약 2년을 삼척의 지척 동해안에서 근무한 것이다. 이 2년 사이 겸재와 사천은 잦은 교유(交遊)가 있었을 것인데 그 기록들이 전하지 못하니 그 흔적들을 찾을 수 없는 아쉬움이 크다. 다행히 이 시기에 함께 한 흔적이 두타산 용추폭포에 나란히 이름을 적은 각자로 남았으니 겸재와 사천을 아끼는 이들에게는 큰 선물이 된 셈이다.

두 분의 이름자는 용추폭포 좌측 바위 틈에 작고 흐릿한 글자로 남아 있다. 이 시기나 전후 시기에 삼척부사를 했던 이들의 이름이 큰 각자로 남은 것에 비하면 참으로 초라하고 보잘것없다. 어쩌면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잘 보이지도 않게 이름을 적었으니 다녀간 흔적은 기록하되 당사자 두 사람만 알게 적어 놓은 정표이리라.

이병연의 사천시초(槎川詩抄 卷上)에는 아마도 이 폭포를 모티브로 쓴 시가 아닐까 여겨지는 시 한 수가 전한다. 제목은 “서쪽 골짜기 두(타산) 원천에 우뚝 높은 폭포가 있는데 아직도 이름이 없네.”

구름 잦아진 곳 한 마디로 기이한데 골짜기도 끊겨 바람 돌고 폭포 떨어지네.
습기진 새는 날아 내려올 줄 모르고 푸른 솔은 바람소리 서로를 아우르네.
저 하늘 기색은 빛을 끊었는데 지는 해는 스스로 가득해 소리로 들리는 듯.
둔사, 탈속승은 空이라 탄식하고 산은 깊어 세상사람 알음알이 일 없다네.

西澗源頭。有瀑布絶高。而尙無名之者。
雲梯盡處一呼奇。峽拆風回急澗垂。濕鳥飜飜飛不下。寒松颯颯倒相吹。
中天氣色眞橫絶。落日聲容盛自持。遁士幽僧空歎息。山深不許世人知。

이 시가 용추폭포를 읊은 것일 것이라 추측하는 이유는 전체 모습이 현재 우리가 보는 용추폭포와 상이점이 없다는 점이다. 은둔한 이들 둔사(遁士)나 깊은 곳에 든 승려를 읊은 점도 삼척부사를 지낸 미수 허목 선생의 두타산기(頭陀山記)와 궤를 같이한다. 그 기록에는 미륵봉, 지조암(持祖庵) 산승, 삼화사, 굴에서 살았다는 마의노인(麻衣老人), 고려적 이승휴의 산장 등이 등장하는데 둔사(遁士), 유승(幽僧)을 읊은 사천의 시와 부합한다.

 

두타산 주변 옛 지도.

더욱 분명한 것은 서간(西澗: 서쪽 골짜기)이다. 옛 지도에서 보듯이 두타 용추는 삼척읍치에서 보면 서방(西方)에 있다. 또 하나, 폭포(瀑布)가 아직도 이름이 없다(尙無名之者) 하였다. 일찍이 1575년(선조 8)부터 1578년까지 척주부사를 지낸 김효원(金孝元)의 1577년 두타산 유람기인 두타산일기(頭陀山日記)나 앞에 언급한 미수의 두타산기에도 폭포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물론 사천의 척주 시절에도 이름은 없었다.

물가 바위에 ‘용추’라고 폭포 이름을 지은 유한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는 이 별유천지에서 이름만 새겼을까

이름 없던 그 폭포는 언제 용추폭포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일까? 그 답은 폭포 물가 바위 각자에 있다. 각자(刻字)에는 “兪漢雋 龍湫”(유한준 용추)가 선명하다. 유한준은 누구였을까? 인명사전을 찾으면 1796년 7월에서 1798년 12월까지 척주부사를 지낸 인물이다. 사천보다는 60여 년 뒤인 셈이다. 1797년(정조 21년) 가뭄이 심했는데 이때 새긴 글씨라 한다. 이때 비로소 이 폭포가 용추란 이름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龍湫(용추)보다 더 크게 자신의 이름자(字)를 새긴 그 바위가 왠지 불편하구나. 저 아래 무릉반석에 더 크게 쓴 이 이의 이름자도 그렇고, 죽서루 절벽에 쓴 이 이의 이름자도 요즈음 우리 기준으로 보면 불편하다. 보이지도 않는 곳에 보이지도 않게 이름자를 남긴 선대(先代)의 사천과 겸재가 마음으로 다가오는 날이다.

 

별유천지 각자.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1500평이나 되는 무릉반석.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용추폭포에서 만나는 많은 이름자는 그렇다 하고, 폭포 우측 입구 쪽 바위에 용이 날 듯 흘겨 쓴 초서(草書)가 이곳을 찾는 이들을 당황케 한다. 일반인은 좀처럼 읽기 어려운 세체(書體)인데 분명한 것은 잘 썼다는 점이다. 무어라 쓴 것일까? 옛 삼척 땅(현 삼척시, 동해시)에 남아 있는 각석(刻石)의 글씨를 읽고 설명한 이 지역에서 발행한 책 ‘삼척도호부 암각문연구’의 도움을 받아 읽어 보자. “別有天地” ‘廣陵歸客 戊寅暮春’(별유천지 광릉귀객 무인모춘)이라 한다. 삼척부사 이최중(李最中)이 1758년 무인년(영조 34년)에 여기에 와서 “別有天地(별유천지)” 즉 인간세상이 아닌 세상(仙界)라고 쓴 것이다. 당나라 시인 이태백은 산중문답(山中問答)이라는 시를 남겼다.

묻노니, 그대 왜 푸른 산에 사시는가 問余何事棲碧山
웃을 뿐 답 않으니 마음 절로 한가롭다 笑而不答心自閑
복사꽃 물에 흘러 아득히 떠가는데 桃花流水杳然去
(여긴) 별천지 인간 세상 아니지 別有天地非人間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점이 생긴다. 과연 겸재는 이 별유천지에 와서 폭포 그림 한 점 안 그렸을까? 사천은 시(詩)를 쓰고 겸재는 그림을 그려 시화(詩畵)가 앙상블을 이루지 않았을까? 가칭하여 무릉폭(武陵瀑)이거나 두타유폭(頭陀幽瀑)쯤 되는 그림 한 폭 나타났으면 좋겠다.

 

무릉반석과 필자.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또 한 수(首) 사천의 시를 따라가자. 역시나 사천시초(槎川詩抄 卷下)에 겸재의 그림 제화시들과 같이 있는 시(詩)이다. 두타산 무릉계곡을 대표하는 무릉반석을 읊은 것이다.

무릉계곡 반석

숲끝 다가오자 하얀 색, 골짜기는 한가지로 펼쳐지고 떨어지네
평평하게 펼쳐진 흠결없는 옥인데, 끝없이 간 바닥 일렁임도 끝 없군
까마귀 지나가니 더욱더 희고, 사람들이 비춰 봐야 본래 희고 희었던 걸
詩 쓰려는 마음 내려놓으려 해도 이 물길에서는 쓰고픈 맘 어이 해?

武陵溪盤石

林端來皓色。洞府一盤陀。平展無瑕玉。長磨不盡波。
鳥過增鶴鶴。人照本皤皤。縱欲題詩去。於渠點染何

 

두타 쌍폭의 단아한 모습.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사천은 무릉반석, 희고도 넓은 너럭바위에서 풍광에 취해 시를 내려놓으려 해도 그 마음 누를 수 없었다. 곁에 있던 겸재는 어땠을까? 절로 붓을 들어 점염(點染: 화선지를 물들임)하지 않았을까? 단원도 이곳 무릉계(武陵溪)에 와서 무릉반석을 바라보며 그 너머 펼쳐진 두타산을 그렸거늘 겸재인들 무심히 풍광만 즐기다 돌아갔을까? 어느 날 겸재의 무릉반석도(武陵盤石圖)가 세상에 나타나기를 기원하며, 그 그림에는 넓게 펼쳐진 흰 너럭바위와 그 곁으로 흘러 떨어지는 무릉계류(武陵溪流), 그 뒤로 우뚝 솟은 두타(頭陀)와 청옥(靑玉)이 멀리 동해를 바라보는 당당한 위용으로 나타나기를….

 

무릉계를 그린 단원의 ‘금강사군첩’. 

이렇게 소설을 쓰며 두타산 트레킹 길에 오른다. 두타산 베틀바위라 해서 근래에 지자체가 개설한 코스인데 트레킹을 즐기는 이들에게 매력있는 코스로 부상했다. 사실 두타산은 명승 37호로 지정된 승경이 빼어난 곳이기는 한데 일반인이 산행에 나서기에는 무리가 있는 산(山)이다. 두타산이 1353m, 이어지는 청옥산이 1403m, 승경이 빼어난 고적대가 1354m의 고도를 가지고 있으니 일반인이 당일에 올랐다 내려오기는 지나치게 힘든 산이었다. 이들 산들은 또한 백두대간을 구성하는 명산인데 댓재 ~ 두타산 ~ 청옥산 ~ 백복령까지 거리가 무려 30km 가까이 되는 산길이다. 1300m, 1400m 고도를 내려왔다가 다시 오를 수 없어 30km 여를 한 코스로 가야 하니 백두대간 종주길에서 마(魔)의 구간이 두타 ~ 청옥이다. 백두대간 종주 산행에 나섰던 이들은 두타 ~ 청옥 하면 머리를 흔든다. 무릉계곡에서 당일에 오르기도 어렵지, 종주하기는 더욱 끔찍한 산이었기에 계곡 따라 용추폭포까지 다녀가는 관광객 코스가 일반적이었는데 이번에 베틀바위 코스가 개설되니 두타를 사랑하는 온 나라 산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두타산 베틀바위 주변 경관.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두타산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명산이 화강암인데 비해 석회암산이다. 중국의 기암절벽을 가진 명산들이 대부분 석회암 산이기에 기암절벽을 이루었듯이, 두타산의 속살은 석회암이 오랜 세월 비바람에 녹아내려 기암절벽을 이룬 곳들에 그 진수가 있다. 트레킹길은 베틀바위, 마천루 등 이러한 지형을 가진 산길로 이어진다. 스릴을 느낄 잔도도 만들고 전망대도 만들어 흥미로운 코스로 길을 뚫었다. 코스는 무릉계곡 입구에서 출발하여 산길로 접어들어 베틀바위를 지나는 방향과, 계곡을 지나 용추폭포에서 산길로 드는 역방향 코스가 있는데 어느 방향으로 가든 원점회귀하게 된다.

예전에도 삼척에 오는 이들은 두타산을 가 보고자 했다. 조선조 문인이자 화가 김득신(金得臣, 1604~1684)도 어느 날 두타산을 찾았다.
 

새로 만들어진 트레킹 길.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두타산을 향해 가다가 말 위에서 얻은 시(向頭陀馬上有得)

가도 가도 끝없는 길 行行路不盡
일만 물줄기에 일천 산 봉우리 萬水更千峰
문득 가까이 절 있음 알겠으니 忽覺招堤近
저 숲 끝에 저녁 종소리 林端有暮鍾

앞에서 언급한 미수 허목 선생도 이곳 부사 시절 두타산을 찾고 기록을 남겼다.

삼화사 삼층탑.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두타산기(頭陀山記)

6월에 두타산으로 들어갔다. 삼화사(三花寺)는 두타산에 있는 옛 절로 지금은 폐사(廢寺)가 되어 연대를 알 수 없는데, 가시덩굴이 우거진 속에 허물어진 옛 탑과 철불(鐵佛)만 남아 있다. 산속으로 들어가 보니 내(川) 위로는 온통 무성한 소나무와 거대한 바위이다. 바위가 긴 여울을 굽어보며 서로 마주하여 층대(層臺)를 이루고 있으니, 이 바위를 ‘범바위(虎巖)’라고 한다. 층대 위를 따라 서쪽으로 가서 바위벼랑을 오르면, 그곳이 ‘사자목(獅子項)’이다. 내 위의 작은 고개와 바위벼랑 아래는 물이 맑고 바위가 희니, 그 너럭바위를 ‘마당바위(石場)’라고 한다. 바위 동굴이 넓게 확 트여 물이 바위 위로 흐르는데, 맑고 얕아 건널 만하였다. 날이 저물자 소나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마당바위를 어떤 사람은 ‘신선이 바가지를 버린 바위(山人棄匏巖)’라고 하였다.

북쪽 벼랑의 석대(石臺)를 ‘반학대(伴鶴臺)’라고 한다. 이곳을 지나면 산이 온통 바위이다. 높고 거대한 바위가 깎아 놓은 듯하고, 앞에 있는 미륵봉(彌勒峯)은 더욱 진기하였다. 마당바위를 지나 서북쪽으로 올라가면 중대사(中臺寺)가 있다. 지난해에 산불이 나서 다 타 버린 것을 산승(山僧)이 삼화사로 옮겨지었다. 삼화사가 가장 아래에 있고, 중대사는 산 중턱의 내와 바위가 엇갈리는 지점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절이다. 그 앞의 계곡을 ‘무릉계(武陵溪)’라고 한다. 산속의 내와 바위 이름은 모두 옛날에 부사를 지낸 김후 효원(金侯孝元)이 명명한 것이다. 김후의 덕화(德化)는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으며, 부내에 ‘김 사군 사당(金使君祠)’이 있다.

북쪽 폭포는 중대사 뒤에 있어 바위 동굴이 가파르고 험하나, 그 아래는 산의 바위가 평탄하고 점차 아래로 내려갈수록 위험한 바위가 없어 사람들이 올라가 노닐 만하였으니, 산의 물이 흘러내리고 바위 위는 100보가 넘었다. 중대사를 지나서는 암벽을 더위잡고 기어올랐는데, 두 발을 함께 디디고 갈 수 없을 정도이다. 학소대(鶴巢臺)에서 쉬었다. 이곳에 이르자 산의 운기(雲氣)가 더욱 성하여 해가 높이 떴는데도 아침 노을이 걷히지 않았다. 이끼 낀 바위에 앉아 폭포를 구경하였는데, 이 바위를 ‘천주암(濺珠巖)’이라고 한다. 앞 봉우리에는 옛날에 학의 둥지가 있었다. 지금은 학이 날아들지 않은 지 60년이 되었다고 한다.

구름사다리를 몇 층 올라 지조암(持祖庵)을 유람하였다. 이곳은 산의 바위가 다한 곳으로 옆에 석굴이 있고, 석굴 안에는 마의노인(麻衣老人)이 쓰던 토상(土床)이 있다. 남쪽으로 옛 산성이 바라다보인다. 북쪽은 산봉우리가 가장 높은데 길이 끊겨 올라갈 수 없고, 동쪽 기슭의 석봉(石峯)은 깊은 못까지 와서 멈추었다. 동북쪽의 다음 봉우리는 동쪽으로 뻗다가 남쪽으로 내려가 석록(石麓)이 되어 흑악(黑嶽)의 북쪽 벼랑과 마주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로 냇물이 흘러나온다. 또 서쪽의 세 개 석봉은 못 위의 석봉과 나란히 솟았는데, 가장 서쪽에 있는 석봉이 가장 높다. 위에 움푹 파인 돌이 있어 이끼가 고색창연하고 물이 맑으며, 높이가 한 자가량 되는 노송(老松)이 있다. 그 봉우리들은 각각 세 발짝이면 올라가는데, 아슬아슬하여 굽어볼 수가 없으며, 또한 나란히 설 수도 없다. 그 가운데 봉우리는 큰 바위 세 개가 겹쳐진 것으로 한 발짝만 움직여도 흔들렸다. 그래서 이름을 ‘흔들바위(動石)’라고 한다. 그 밑에는 냇물이 고여 있다. 넘어진 항아리같이 생긴 바위가 넓게 골짜기를 독차지하고 있고, 물이 그 가운데에 고여 있는데, 매우 깊어 굽어보아도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이다.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낸다. 그 물줄기의 근원에 옛날 상원사(上院寺)의 폐허가 있는데, 어떤 사람은 여기가 고려 때 이승휴(李承休)가 머물던 산장이라고 하였다.

산에서 내려온 뒤에 기억을 더듬어 기록하였기 때문에 저녁때 본 마당바위와 아침에 본 학소대를 거꾸로 기록하였다. 미수는 기록한다. 6월 3일.


頭陁山記

入頭陁山。三花寺者。頭陁古伽藍。今廢不知年代。叢棘中。唯有古塔,鐵佛敗壞。入山中。川上皆深松巨石。石臨脩瀨。相對爲層臺。謂之虎巖云。從臺上西行。登石崖曰獅子項。川上小嶺石崖下。水淸石白。其盤石曰石場。巖洞開豁。水流石上。淸淺可涉。日夕松影毿毿。石場。或曰山人棄匏巖云。北崖石臺曰伴鶴臺。過此則山皆石。危石如削。前有彌勒峯。尤奇。過石場。西北上中臺。前年山火燒盡。山僧移作二花寺。三花最下。中臺在山中川石之衢。最佳寺。其前溪曰武a098_215c陵溪。山中川石之名。皆舊使君金侯孝元名之。金侯之化至今傳之。府內有金使君祠。北瀑在中臺後。石洞嶄巖。其下則山石平。而漸下無亂石。人可躋而遊山。水流瀉。石上過百步過中臺。攀傅巖壁。不得竝足而行。憩鶴巢臺。至此。山氣益嵯峨。日高朝霞未斂。坐石苔。觀瀑布。謂之濺珠巖。前峯舊有鶴巢。今不至六十年云。躡雲梯數層。遊指祖。此山石窮處。傍有石窟。中有麻衣老人土床。南望古城。其北嶺最高。路絶不可登。其東麓石峯。臨淵水而止。其東北次峯。東而南下。爲石麓。與黑嶽北壁相對。其中川水出焉。又西三石峯。與淵上石峯竝峙。而其最西者最極。上有石圩。苔老水淸。有老松高尺許。峯各三。躡足而上。危不可俯。亦不可竝立。其中峯危石三重。躡一足則搖。故名曰動石云。其下川水積焉。石如踣瓮。其廣專壑。水積其中。水深黑。不可俯而窺。旱則禱雨於此。水窮源。有古上院廢墟。或曰。此高麗李承休山居云。旣下山。追記。故石場夕而鶴臺朝。逆記之。眉叟。記。六月三日。(기존 번역 전재)

 

북평에서 옮겨온 금란정.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정하언의 초서체 글을 재현해 놓은 각자.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트레킹 코스를 돌아내려 오면 앞서 언급한 너럭바위 무릉반석을 만난다. 무릉계는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온갖 이름 각자(刻字)와 시문(詩文)이 1500여 평 너럭바위를 덮었다. 눈에 띄는 것은 금란계원들 명단이다. 일제강점기 향교 폐지에 대항하여 유생들이 만든 조직이라 한다. 북평에 세웠던 정자 금란정이 1958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대단한 이들의 이름이나 싯구가 바위를 덮었지만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각자는 1750년 10월에서 1752년 11월까지 삼척부사를 지낸 옥호거사 정하언(鄭夏彦)이 1751년 신미년에 쓴 큰 초서 글씨이다. 반석 길 옆에 재현한 글씨판도 세워 놓았다.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무릉 신선 노니는 곳, 가운데 대에 샘솟는 돌들 두타의 신선경)’.

 

일제강점기 때 향교 폐지에 대항한 조직인 ‘금란계원’ 유생들 명단.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미남 철조노사나불이 지긋이 내려다보는 적광전.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런 신선 세계 옆에는 불타(佛陀)의 세계 삼화사(三和寺)가 있다. 본래 1.5km 쯤 하류에 있었는데 쌍용시멘트가 세워지면서 옛 절터로 옮겨 왔다 한다. 신라적부터 법등을 밝힌 절이라 하는데 적광전(寂光殿)에는 보물 1292호로 지정된 미남 철조노사나불(鐵造盧舍那佛)이 지긋이 내려다보시고 그 앞마당에는 보물 1277호 3층 석탑이 두타행(頭陀行: 깨우침의 길)에 들어가 계신다.

겸재의 그림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에 자꾸 뒤가 돌아다보이는 날이다.

이제 사하촌(寺下村)으로 내려온다. 신선 세계와 부처님 세상에서 우리 세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타령이나 하나 읊어봐야겠다.

頭陀行을 하오리까
武陵谷에 가오리까
온다던 가을은 코끝도 뵈지 않고
성급한 내 마음만 저만치 앞서 간 날

山은 안 잡아도 폼이 나고
물은 비우지 않아도 무심한데
그게 물맘(水心)인지 無心인지 당최 알 수 없는 길
높을수록 깊은 길

龍湫瀑 금간 바위
겸재와 사천은 영원하자 깐부하자 이름字 새겼지만
눈비비고 물뿌려도 알아보기 어렵구나
두 분 선생님
살아 보셨으니 아시겠구려
남는 게 뭐 있습니까
時間 넘어 뭐 좀 남습니까

에라 모르겠다.
오늘 여기 잘 살아 보자
眞하게는 못하겠고
착하게는 살아 볼까
예쁘게나 살아 볼까

밤바다 바라보며 폼도 잡고
살아 볼까

頭陀 가던 날.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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