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그림 길 (90) 죽서루] 최고 절경의 양반 놀이에 정조가 화낸 이유는?

이한성 옛길 답사가 기자 2021.12.14 10:00:25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삼척(三陟)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죽서루(竹西樓)이다. 요즈음에는 조금 다양해졌지만 얼마 전까지 삼척을 찾는 이들이 가장 먼저 들리는 곳이 죽서루였다. 죽서루는 고려 때부터 문헌에 등장하면서 많은 이들의 시문(詩文)과 그림에 등장하는 보물 213호로 지정된 이곳의 명소이다.

죽서루를 설명하는 자료를 보면,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삼척시의 서편을 흐르는 오십천(五十川)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삼척부의 객사였던 진주관의 부속건물이었으며 지방에 파견된 중앙관리들이 묵던 숙소의 부속건물로서 접대와 향연이 펼쳐지던 곳이다. 창건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명종대(1171~1197)의 문인인 김극기의 시 중에 죽서루 관련 시가 전해오는 것으로 봐서 12세기 후반에 창건됐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또한 ‘동안거사집’에 고려 원종 7년(1266) 이승휴가 안집사 진자후와 서루(西樓)에 올라 시를 남겼다는 내용으로 보아 죽서루는 적어도 1266년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안성, 김구용, 정추 등이 죽서루 관련 시를 남긴 것으로 봐서 죽서루는 14세기 말까지는 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죽서루는 버려졌다가 조선 태종 3년(1403) 부사 김효손이 옛터에 중창하였으며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십 차례에 걸쳐 중수, 증축되었다. 죽서루란 명칭은 누의 동쪽에 죽림(竹林)이 있었고 죽림 속에 죽장사(竹藏寺)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한다.

 

오십천 흐름 따라 본 죽서루. 사진 = 이한성 

이제 죽서루를 찾아간다. 겸재의 그림과는 달리 그림의 반대편에 출입구가 있다. 연전(年前)까지만 해도 ‘송강 정철 가사의 터’ 표석을 세웠던 죽서루 동쪽 숲에 펜스를 치고 공사 중이다. 예전 관아 터를 발굴하고 정비하는 작업 중이란다. 그렇다. 겸재의 그림을 비롯한 옛 그림들을 보면 죽서루 동편에 몇몇 건물들이 그려져 있다. 삼척도호부(三陟都護府)의 관아가 죽서루 동쪽에 있었던 것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삼척도호부 관아 부속건물로 그 서쪽에 죽서루가 있었던 것이다.

 

최근 발견된 겸재 작 다른 죽서루 그림.

안으로 들어서면 우람한 누각(樓閣)이 위용을 자랑한다. 전면에는 방문객을 맞는 두 개의 유연한 행서체의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竹西樓(죽서루)와 關東第一樓(관동제일루)이다. 이곳의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글이다. 숙종 때 삼척부사 이성조(李聖肇)가 1710년(숙종 36년) 편액했다 한다.

건물은 이층인데 실제로 아래층이 있는 것은 아니고 자연스럽게 언덕 비탈을 살려 이층 하나만을 쓸 수 있게 한 누각(樓閣)이다. 땅의 높낮이가 다를 때 이를 평평히 고르지 않고 그 자리에 따라 초석(礎石)을 놓고 그 높이에 따라 기둥 길이를 다르게 하여 짓는 건축법이다. 이를 그랭이 공법이라 한다는데 우리나라 사찰의 많은 누각이 이렇게 지어졌다.

 

죽서루 기둥의 그랭이 공법. 사진 = 이한성

누각으로 오르는 사다리는 따로 없다. 건물 옆 언덕 바위로 오르면 누각 마루에 오를 수 있다. 이런 지형에 세운 건물이다 보니 아래층 기둥은 17개, 위층 기둥은 20개라 한다. 입구도 앞쪽은 3칸, 뒤쪽은 두 칸이라 한다. 설명을 듣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인데 변화가 재미있구나.

누각 마루에 올라서면 넓고 넓은 대청마루 곳곳마다 편액이 걸려 있다. 정면에 걸려 있는 단아한 해서체의 竹西樓(죽서루)는 누구의 글씨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하고, 현종 때 삼척부사를 지낸 미수 허목의 第一溪亭(제일계정)과 헌종 때 부사를 지낸 이규헌(李奎憲)의 海仙遊戱之所(해선유희지소: 바닷가 신선이 노는 곳)가 글씨의 멋을 자랑한다. 기둥과 공간마다 시문(詩文)을 적은 편액들이 빽빽한데 죽서루 안내자료에 따르면, 죽서루 및 그 별호(別號)를 새긴 편액이 5개, 시를 쓴 편액이 17개, 기문(記文)을 쓴 편액이 6개란다. 이 밖에 중건상량문(重建上樑文) 및 기부금방명기(寄附金芳名記)를 쓴 편액이 1개씩 있고 비록 시를 쓴 편액은 17개이지만 내용은 28편의 시가 쓰여 있다 한다.

 

‘바닷가 신선이 노는 곳’이란 뜻의 ‘해선유희지소’. 사진 = 이한성
허목이 쓴 第一溪亭(제일계정) 현판. 사진 = 이한성 

그냥 지나치기 서운하니 몇 편만 읽고 가련다. 숙종이 지은 어제시(御製詩)이다.

硉兀層崖百尺樓 위태로운 벼랑에 드높이 솟은 백 척 누각
朝雲夕月影淸流 아침 구름 저녁 달 그림자 청류에 비치고
粼粼波裡魚浮沒 맑고 깨끗한 물결 속에 물고기 뛰노는데
無事凭欄狎白鷗 한가히 누각 난간에 기대 물새 희롱하네(기존 번역 전재)

숙종이 죽서루에 다녀갔다는 기록이 없으니 화원의 그림을 보았거나 누구의 시문을 읽고 감회가 일었을 것이다. 마침 삼척부사로 와 있던 이상성(李相成)이 이 시를 편액하고 그 사유를 걸었다.

선대왕(숙종)의 문집 중에 관동팔경을 노래한 시가 있는데 ‘죽서루’도 곧 그 중 하나다. 지금 선대왕의 문집을 간행하여 배포하는 날을 맞이하여 나 상성(相成)이 일찍이 시종(侍從)을 지냈다고 하여 또한 문집을 하사해 주는 은혜를 베풀어 주었는데, 내가 마침 삼척부사여서 선대왕이 남긴 그 시를 받들어 읽으니 더욱더 목이 메는 심정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감히 판목에다 새겨 높이 걸고는 내 아들 평릉(平陵) 찰방(察訪) 광원(光遠)과 더불어 그 뒤에다 몇 자 적어 슬퍼하며 사모하는 정성을 나타냈다. 숭정 기원 후 94년(1721년) 5월에 쓰다.(先大王御集中 有關東八景詩 竹西樓卽其一也 今於刊布之日 以臣相成曾經侍從 亦與宣賜之恩 臣適守玆土 奉讀遺韻益不勝摧項之忱 玆敢鋟梓懸揚 與子平陵察訪臣光遠 續題其後 以寓哀慕之誠焉. 崇禎紀元後九十四年辛丑五月日).

정조 어제시. 사진 = 이한성 

등골 서늘해지는 정조의 어제시


정조도 어제시를 남겼다. 단원으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했으니 아마도 그 그림을 보고 시를 썼을 것이다.

彫石鐫崖寄一樓 돌 다듬고 절벽 쪼아 누각 하나 들였는데
樓邊滄海海邊鷗 누각 앞 푸른 바다 해변에는 갈매기
竹西太守誰家子 죽서루의 태수는 뉘 집 아들인가
滿載紅粧卜夜遊 미녀 가득 싣고 밤새워 노는구나

그런데 등골이 서늘해진다. 수령이 배 띄우고 노는 모습에 백성 사랑하기를 부모 사랑하듯 하던 임금의 눈에 곱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겸재를 비롯한 다른 화가들은 모두 백성들이 물길을 건너는 나룻배의 모습을 그렸건만 단원은 어찌 놀잇배를 그려 임금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단 말인가. 곰곰 보면 미녀도 가득 없고 야밤도 아닌데 정조는 어찌 이리 노(怒)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정조는 요즈음도 죽서루 그림을 보는 많은 이들이 착각하듯 삼척은 바닷가 고을이니 죽서루는 당연히 바닷가에 있고 저 물길은 바다일 것이라는 미스를 범하고 있다.

 

이승휴 시 편액. 사진 = 이한성 

이제 삼척 하면 떠오르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지은 이승휴(李承休)이다. 그는 매사냥에 빠진 충렬왕과 그 주변 인물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간(諫)하다가 파직되어 어머니의 친정 고향 삼척 땅, 두타산 흑악사(黑岳寺, 天恩寺)에 은거해 제왕운기를 썼다. 단군을 우리나라 시조로 시작하는 역사책이다.

이렇게 이승휴의 시, 송강의 시, 율곡의 시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의 시가 걸려 있다. 미수기언((眉叟記言)에 있는 허목의 죽서루기(竹西樓記)도 편액으로 걸려 있다. 비록 이 편액에는 없지만 꼭 읽고 가고 싶은 사람 둘이 있다. 첫째는 사천 이병연이다. 그의 시로 전해지는 죽서루가 있다.

 

사천 이병연의 제화시가 있는 죽서루 그림.

惻惻竹西路 春深多碧苔
落花皆在水 缺月獨依臺
洞氣晴猶濕 灘聲去若廻
頭陀雲夕起 時自宿簷來
도탑구나 죽서루 길, 봄 깊어 무성한 푸른 이끼
지는 꽃잎 모두 물에 내리고, 이지러진 달은 臺에 걸렸네
골짜기 기운 맑아 되려 촉촉하고, 여울소리는 빙빙 도는 듯
두타산 저녁 구름 일어, 때 맞추어 절로 죽서루 처마에 깃들어 오네

또 한 사람 지나칠 수 없는 그리운 이가 있다. 옥봉 이씨(玉峰 李氏). 이 글을 시작하던 1회에 소개한 운강 조원(雲江 趙瑗)의 소실로 안타까운 삶을 마친 여류시인이다. 그녀는 운강의 삼척부사 시절 삼척에 와서 함께 생활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때 그녀가 지은 시가 상촌 신흠의 ‘상촌집’에 시평으로 전해진다.

근래 규수(閨秀)의 작품으로는 조승지 원(趙承旨瑗)의 첩인 이씨(李氏)의 것이 제일이다. 경치를 읊은 그녀의 시 중 1구에,
강물에 몸 담근 갈매기 꿈 하나 널찍하고 江涵鷗夢濶
하늘에 들어간 기러기 근심도 길고 길구나 天入雁愁長
이라고 하였는데, 고금의 시인 가운데 이렇게 표현한 이는 일찍이 없었다.
 

(近來閨秀之作。如趙承旨瑗之妾李氏爲第一。其卽景詩一句曰。江涵鷗夢闊。天入雁愁長。古今詩人。未有及此).

연구자들에 의하면 이 시는 운강의 삼척부사 시절 옥봉이 죽서루에서 읊은 것이라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시의 전체 연(聯)은 전해지지 않는다. 또 하나 전연(全聯)이 전하는 시를 보자.

秋思: 가을생각
霜落眞珠樹 關城盡一秋
心情金輦下 形役海天頭
不制傷時漏 難堪去國愁
同將望北極 江山有高樓
삼척 나무에 서리 내리니 성(城)은 모두 가을이구나
마음은 나라님 곁에 있으나 몸은 먼 바닷가라네
상심에 눈물 막을 길 없고 나라 생각 감당키 어렵구나
함께 북극별 바라보라고 강산에는 높은 누각이 있네

진주(眞珠)는 삼척의 다른 이름인데 나라일 걱정하는 남편 곁에서 함께 걱정하며 죽서루에 같이 올라 별을 바라보고 바람을 전하는 옥봉의 마음이 읽히는 시이다. 이런 날도 있었는데 내침을 받고 왜란 중에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된 옥봉을 애도한다.

자연이 바위에 구멍을 낸 용문(龍門). 사진 = 이한성

자연이 뚫어놓은 통로 ‘용문’

누각을 내려오면 작은 기암괴석의 바위 동산이 있다. 풍화작용으로 보이는 바위 통로가 있는데 용문(龍門)이라고 흘림체 글씨로 씌어 있다. 그 곁 바위 위에는 애들 때 구슬치기하려고 파 놓은 홈처럼 바위를 정교하게 파낸 홈이 있다. 정체를 알 수 없게 흩어져 있는데 청동기 시대부터 이 땅의 백성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염원을 담은 별자리이다. 성혈(星穴)이라고 부른다. 청원의 아득이 고인돌을 비롯하여 고인돌에 새긴 별자리가 제일 많고 전국의 너럭바위에 많이 발견된다. 두물머리 두 기(基)의 고인돌, 인왕산, 불암산 등 서울의 산과 서해 도서지방에도 많이 보인다. 옹진군 신도의 성혈은 북두칠성의 순환을 그린 모습이 완연하고, 교동도 화개산 성혈은 은하수도 완연하다. 일본 나라의 키토라 고분(キトラ古墳) 천문도가 고구려 평양의 밤하늘을 그렸듯이 우리나라 곳곳에 흩어진 성혈은 우리나라 고대 천문학의 보고(寶庫)가 될 것이다. 이런 별자리들이 정비되어 그려진 것이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가 된 것으로 보인다.

 

별자리를 새긴 것으로 풀이되는 성혈 바위. 사진 = 이한성 
‘천문유취’의 북두칠성 표시.
‘천문유취’의 남두육성 표시.

보통 성혈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별자리가 북두칠성, 북극성, 남두육성인데 아마도 죽서루의 성혈도 이런 별자리가 아닐까 싶다. 후세로 가면서 북두칠성에게는 생남(生男)과 애들의 수명장수, 남두육성에게는 노인의 장수를 비는 역할로 바뀌어 간 듯하다.

 

단원 작 죽서루.
엄치옥 작 죽서루. 

이제 죽서루도(竹西樓圖) 그림을 그린 시점(視點, view point)를 찾아가자. 연전(年前) 춘천박물관의 관동팔경 특별전에서는 겸재, 단원의 죽서루를 비롯하여 여러 점의 죽서루 그림들을 비교전시 하였다. 거의 대부분의 죽서루 그림은 지금의 죽서루 출입구인 정면이 아니라 오십천(五十川) 건너에서 절벽 위에 선 죽서루를 바라보며 그리고 있다.

 

겸재 ‘관동명승첩’의 죽서루.

죽서루에서 나와 죽서교를 건너면 삼척시립박물관이 있다. 이쪽 오십천변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겸재의 관동명승첩 속 죽서루는 오십천 뒤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아래 오십천에는 나룻배 한 척이 떠 있는데 서 있는 이 하나, 앉아 있는 이가 둘이다.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양반네들로 보인다. 겸재가 사천과 자신을 포함해 자화상을 그린 것 아니겠느냐는 의견도 있다.

 

춘천박물관에서 전시된 죽서루 그림 1.
춘천박물관에서 전시된 죽서루 그림 2.

사공은 열심히 삿대를 밀어 좌측 상류로 간다. 죽서루에는 기녀일까? 여인네로 보이는 세 사람이 있다. 절벽 좌측에는 사다리가 놓여 있는데 다음 장면이 궁금하다. 이 양반들은 저 사다리를 올라 죽서루로 올라 가려나….

또 하나 겸재의 죽서루도가 근년(近年)에 나왔는데 그림의 시점(視點)은 오십천을 건너는 죽서교쯤에서 죽서루를 비스듬히 보고 그린 그림이다. 그다지 특징이 없으니 겸재가 급한 주문에 수응(酬應)하기 위해 그린 것인가.

 

죽서루에서 내려다본 오십천. 사진 = 이한성

단원의 죽서루는 왕명수행으로 그린 그림이라 상당히 정성 들인 손길에 사실적이다. 차양이 얹힌 놀잇배에 두 양반이 타고 있다. 역시나 좌로 거슬러 오르는데 겸재와는 달리 절벽에 사다리는 없다. 오십천을 가로지르는 줄이 매어 있어 작은 배나 뗏목을 끌어서 가게 한 줄처럼 보인다. 배 안에 홍장(紅粧, 기녀)은 보이지 않고 시간은 낮으로 보여 밤을 새워 논 모습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현재 관아 터를 발굴 정비하고 있는데 남아 있는 사진들과 이 그림이 향후 정비나 복원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어지는 죽서루도는 춘천박물관에서 전시한 그림의 일부인데 그것 중에는 사천이 제화(題畵) 글을 쓴 그림도 있다. 분명 겸재는 아닌데 낙관이 없어서 알 수가 없다. 사천과 친분 있는 이가 삼척을 방문한 후 그려서 글을 받았을 것이다. 이 그림에도 물에서 관아로 오르는 층계가 있다. 어느 그림은 원경으로 그려 구불구불한 오십천이 잘 드러난다. 오십천이란 이름은 관아에서 오십천 상류까지 오르는데 구불구불하다 보니 모두 47번을 건너야 했다 한다. 그래서 붙인 강 이름이 오십천(五十川)이라 한다.

또한 죽서루 주변과 오십천 절벽에는 많은 각자(刻字)가 새겨져 있다. 오십천 건너 전망대에는 절벽에 쓰여 있는 각자에 대한 위치별 설명이 전망대 안내판에 소개되어 있다. 주로 부사를 지낸 이들 이름이거나 영향력 있는 방문자의 이름, 시문(詩文), 심지어 주자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도 쓰여 있다 한다. 다행히 근래에 발견되었다는 한글 시조에 관심이 간다. 정매길(丁梅吉)이라는 이름도 또렷하다.

사랑이 퓌어려 ᄒᆞ리니 둥그러냐 모나니냐
기럿냐 자로더냐 ᄅᆞ바고냐 아차 일러라
하 그리 진 줄은 모르냐 맘 간 대 몰라라
(사랑이 피려 하리니 둥그러냐 모나더냐
길었냐 짧더냐 아차 바로 이르거라
하 그리 긴 줄은 모르나 맘 간 데 몰라라)

 

외모가 ‘매끈해서’ 매길이란 이름을 가졌을지도 모를 정매일의 시가 새겨져 있다. 자료사진

이렇게 사랑을 가지고 재치있게 표현할 수 있다면 아마도 삼척 관기일 것 같은데 정은 정(丁) 씨요, 어려서부터 인물이 매낀해서(매끈해서) 매낄이로 불린 아가씨는 아니었을까? 한자로 그 이름을 쓰려다 보니 정매길(丁梅吉), 이렇게 남자애 이름처럼 된 것은 아닐까? 그 사랑의 대상이 누구였을지도 궁금하다. 옆에 새겨져 있는 사군석(使君石)이나 금석(琴石)이 같은 악공이거나 광대였을까? 아니면 이 도령 같은 사또 자제였을까? 그도 아니면 이임한 전임 사또였을까?

또한 이 바위에는 삼척도호부 소속 관기(官妓)로 추정되는 죽선(竹仙), 화선(花仙), 진향(眞香), 원홍(元紅) 등의 이름자도 보인다 하니 수령 방백의 이름으로 빛이 바랜 절벽에 한 줄기 청량함이 비치는 듯하다.
 

척주동해비. 사진 = 이한성

부내까지 들어온 바닷물과 그 극복의 역사

기왕 삼척에 왔으니 이제 기억할 만한 곳을 들려 보자. 죽서루에서 잠시 바닷가 쪽으로 나오면 육향산이 있다. 삼척 옛 지도 바닷가에 진영(鎭營)으로 그려진 곳이다. 거기에는 미수 허목이 세운 두 개의 비가 있다. 하나는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인데 허목(許穆)이 1662년에 세운 비석으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척은 파도가 심할 때는 조수(潮水)가 시내까지 들어오고, 홍수 때에는 오십천이 범람하여 주민들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부사 허목은 동해송(東海訟)이라는 222자의 글을 짓고 이를 전서체(篆書體)로 써서 비석(碑石)을 세우고 그 이름을 척주동해비라 하였다. 이 비는 신통력이 있어 비를 세운 이후에는 조수의 피해가 없어졌다고 하며, 그 의미를 살려 퇴조비(退潮碑)라고도 한단다.

 

삼척 옛 지도. 

또 하나 비석은 평수토찬비(平水土贊碑)로 척주동해비와 같은 내력을 지니고 있다. 동해의 거친 파도가 삼척부내에까지 밀려드니, 허목이 치수(治水)에 성공한 하나라 우제(禹帝)의 전자비(篆字碑)에서 48자의 글씨를 모아 새기고 비를 세웠던 것이다. 해일(海溢) 피해를 걱정한 목민관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는 두 비석이다. 이 비들은 육향산 비각 속에 있다. 육향산 오르는 길 공덕비들 비석머리에 새겨진 문양(紋樣)도 볼 만하니 잊지 마십시오.

 

공양왕릉. 사진 = 이한성

또 한 곳 가볼 곳은 공양왕릉(恭讓王陵)이다. 슬픈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3부자는 삼척 근덕(近德)에 귀양 왔다가 교살되었다(移置恭讓君三父子于三陟 / 絞之, 及其二子). 그 시신은 이곳 근덕에 장사지냈는데 후에 경기도 고양으로 옮겼다 한다. 민간에서는 그 시신이 이곳 근덕에 남아 있다고 여겨 공양왕릉을 보전 관리하고 있다. 이제는 모든 것이 한 줌 흙으로 돌아갔을 시신이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삼척에 가면 한 번쯤은 들려 고려 망국의 한을 위로해 봄도 좋지 않겠는가.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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