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그림 길 (100) 달성원조] 일본이 두번이나 없앤 대구 달城, 겸재 그림에도 없는 이유

이한성 옛길 답사가 기자 2022.05.16 09:49:24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의 그림을 따라 글을 쓴 지도 100회에 이르렀다. 향후 몇 회는 어느 화첩인지 모르는 겸재의 경상도 지역 그림들을 찾아다니려 한다. 옛 글을 읽고 옛 길을 다니는 필자에게 겸재는 축복이다. 300년 가까운 시간 전 우리 땅 여러 곳을 다니며 그림으로 남긴 겸재의 발자취와 화필은 길과 시간이라는 주제를 필자에게 남겨 주었다. 무언가를 찾아 길을 나선 이에게 옛길이 주는 신선함은 여간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겸재를 핑계로 얼쑤~ 놀러 다닌다.

딱딱이 치다가 자리잡은 겸재

겸재는 나이 46세 되던 1721년(경종 1년) 하양 현감(河陽縣監)을 제수 받는다. 작은 고을이라 지금은 경산에 포함되었지만 대구 동쪽, 경산 북쪽 아담하고 비옥한 고을이었다. 가난하고 가난했던 겸재는 안동 김문과 인연으로 38세 무렵에 처음 위수(衛率)라는 벼슬길에 나서 어머니를 봉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종6품에 지나지 않지만 어엿하게 한 고을의 목민관으로 나서는 겸재에게 주변 친우들은 아낌없는 기쁨을 전해주었다.

예전에는 길 떠나는 이에게 전별시(餞別詩: 이별의 시)를 전하는 것이 상례였다. 명문가의 자재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은 처음에는 날카로운 눈으로 겸재의 그림을 평했는데 이내 겸재와 가까워져 겸재와는 그림으로나 인간관계로나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경제적 어려움을 잊고,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맘껏 그릴 수 있게 된 겸재에게 전하는 그의 전별시가 두타초(頭陀草)에 실려 있다. 겸재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넘치는 전별시라 할까.
 

앞산에서 내려다본 대구.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送元伯之任河陽
하양에 부임하는 원백(정선)을 보내며


一領靑衫半不新 한 복의 푸른 관복 반도 성하지 않으니
十年薄宦走京塵 10년 말직으로 서울 먼지 속 달렸구려
要知擊柝辛勤意 딱딱이 치며 힘겹게 일한 뜻은
只爲高堂不爲貧 오직 어머니를 위해 가난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지
正月東風雪滿車 정월 동풍에 눈은 수레 가득하고
龍湫南畔嶺雲賖 용산강 남쪽 강가 구름 아득하네
知君此去饒淸趣 이제 자네 가는 것 알아 맑은 기운 가득하니
管領河陽一縣花 하양 고을 꽃 같이 다스리게나
邑小何妨如斗大 읍은 작아도 두락은 크니 무슨 막힘 있겠나
民淳多喜是羅餘 백성은 순박하고 기쁨 많으니 신라의 넉넉함
臨分不恨鸞栖棘 이별에 한없고 난(鸞) 새가 공경 자리 깃들 듯 하니
知尒親廚日薦魚 자네는 어머니 상에 매일 생선 올릴 수 있을 거네
胸中自有先天學 마음에는 본래 하늘의 배움 자리했고
筆下元無半點塵 붓끝에는 원래 반점 티끌도 없으니
已向畸人窺閫奧 이미 어려운 이 향해 깊이 살피겠지
便從玄宰奪精神 문득 동기창에게 마음을 두고
陶山一曲退翁㞐 도산 일곡 퇴계 선생 거처와
溪上柴門老木餘 개울가 사립문 노목의 넉넉함
早晩君行應縱筆 조만간 자네는 가서 그림 그릴 것인데
先將一紙寄於余 우선 한 장은 내게 보내 주시게

위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상황을 조금 살필 필요가 있다. 겸재가 한 서울의 벼슬은 세자익위사위수(世子翊衛司衛率)인데 이는 세자가 출행할 때 보호하는 일로, 길을 비키라 소리치고 딱딱이도 치는 일이었기에 위와 같이 표현한 것이다. 또한 현재(玄宰) 동기창(董其昌)은 명나라 화가이면서 서예가로 문인화로서는 조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겸재가 이런 동기창을 마음에 두었다는 칭찬을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 퇴계가 은퇴한 도산 즉 경상도 예안이 하양과 가까워 겸재는 이미 하양으로 가면서 담헌과 도산(陶山)에 대한 그림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퇴우이선생진적첩’ 속의 ‘계산정거’도와, 또 다른 그림 ‘도산서원’도는 겸재의 하양 현감 시절에 이미 밑그림이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71세에 인왕곡으로 돌아와 그린 퇴우이선생진적첩 속 계상정거도는 이때 그린 밑그림으로 다시 그린 것은 아닐까. 전문가들의 검토가 있으면 좋겠다.

 

약령시 입구.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는 아마도 담헌에게 도산(陶山)을 그린 그림을 보냈을 것이다. 하양으로 가기 전 자주 못 볼 담헌에게 사시병풍(四時屛風)을 그려 주고 떠난 그였으니까. 그런데 아쉽게도 3년 뒤 1724년 담헌은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둘은 이 뒤 영영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왕성하게 그림 그리는 현감 나으리

하양 현감 시절 겸재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전(失傳)되어 내용을 알 수 없는 ‘영남첩(嶺南帖)’ 그림과 밑그림들을 위해 영남의 명승을 다니며 왕성하게 그렸을 것인데 알 길이 없으니 아쉽구나. 이제부터는 몇 회에 걸쳐 낱장으로라도 전해지는 겸재의 영남을 그린 그림의 현장들을 찾아다녀 보려 한다. 대구를 그린 달성원조(達城遠眺), 성주(星州)의 쌍도정(雙島亭),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 합천의 해인사(海印寺), 언양의 반구대(盤龜臺)이다. 필자가 모르는 그림들을 만나게 되면 추가할 것이다.

 

겸재 작 ‘달성원조’도.
‘달성원조’에 붙여진 제시. 

이제 겸재의 ‘달성원조(達城遠眺)’를 만나러 간다. 달성원조란 달성을 멀리서 바라본다는 뜻이다. 달성은 어디일까? 지금의 달성군일까? 달성(達城)은 현재 대구 시내 한가운데 달성공원으로 변해 있는 옛 대구의 읍치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12대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15년(215년) 달벌성(達伐城)을 쌓았다(春二月 築達伐城)고 하니 오래된 고성이다.

이곳에 신라, 고려, 조선 중기까지 대구의 관아가 있었다가 조선 중기 선조 23년(1590년) 달성에서 동으로 2리(약 800m) 지점에 토성을 쌓아 관아지를 이전했는데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성이 없어졌다. 그 뒤로 오랫동안 성 없는 고장으로 지내다가 영조 12년(1736년)에 관찰사 민응수가 다시 2리를 동으로 옮겨 크게 석성으로 재건하였다 한다. 그 규모는 2124보 4개의 성문과 2개의 소문을 갖춘 번듯한 읍성으로 재건된 것이다.

 

대구부 옛 지도.
하양현 옛 지도.

겸재의 달성원조도를 보면 어딘가 다소 높은 곳에서 옛 대구부(大邱府)를 내려다보며 그린 그림이다. 필자가 숫자 1로 기록한, 큰 기와들이 모여 있는 곳은 관아이며 좌측 다소 높은 위치의 숲은 달성으로 보인다. 그 뒤로는 멀리 3으로 기록한 산줄기들이 보이는데 팔공산 줄기이다. 앞 쪽으로 안개 낀 것처럼 보이는 곳이 금호강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어디에서 그린 것일까? 아마도 옛 지도가 고노산(高老山)으로 기록한, 지금 대구 시민이 사랑하는 앞산일 것이다. 필자도 궁금하여 앞산에 올라 대구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겸재의 시선으로. 시대는 달라졌지만 겸재의 그림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겸재의 그림에서처럼 대구읍성의 성벽은 보이지 않았다. 우선 겸재 그림에서 대구부의 읍성은 어디 간 것일까? 도대체 성벽은 어디 있단 말일까? 그 답은 간단하다. 성(城)벽은 없었다.

겸재가 하양 현감으로 재직한 시기는 1721(경종 1년) 1월 ~ 1726년(영조 2년) 9월이었다. 이 시기 대구에는 성이 없었다. 임진왜란(1592년) 때 토성이 파괴되었다가 1736년(영조 12년)에 다시 석성을 축성했으니 겸재가 성(城)을 그려 넣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되짚어 보면 이 그림은 겸재가 하양 현감 시절 그린 그림임이 명백하다.

그런데 이 그림의 사진은 알려져 있었는데 실물 소재를 알 수 없어 그림의 진위 여부도 그렇고 실존해 있는지도 궁금해 하던 때가 있었다. 다행히 2019년 말 국립중앙박물관이 ‘조선 시대의 실경산수화 2’를 발간하면서 겸재의 이 그림을 포함시켰으니 관심 있는 이 모두의 궁금증은 풀렸다.

더구나 1931년(소화 6년) 총독부가 오봉빈(吳鳳彬)으로부터 이 그림과 다른 2점을 끼어 680원에 샀다는 기록도 알게 되어 그림의 가치를 값으로도 증명하였다. 이 그림에는 사천과 관아재의 별지로 전해지는 제화시가 있다 한다. 연구자들은 이 그림이 영남첩에서 분리된 낱장이 아닐까 조심스러운 추측도 한다.
 

‘대구달성’도와 위치 표시. 
1905년경의 대구 지도. 

겸재 손자가 그린 그림에는 성벽 뚜렷

그런데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겸재의 손자 손암(巽庵) 정황(鄭榥, 1735~1800)이 그린 대구 그림이다. 제목은 대구달성(大邱達城)이다. 이 그림은 할아버지 겸재의 시선과는 달리 읍성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근경으로 그렸다. 성벽도 뚜렷하다. 1735년생 정황은 관찰사 민응수가 석성으로 다시 쌓은 1736년(영조 12년) 이후 이 그림을 그린 것이다.

편의를 위해 필자가 번호를 붙여 설명하면, 번호 1은 대구부 관아이다. 2는 관아 문 역할의 2층의 관풍루(觀風)이다. 지금은 달성공원에 세워 놓았다. 3은 달성, 지금의 달성공원이고 4는 금호강이다. 5는 저 너머 이어지는 팔공산 줄기.

이 지역이 고향인 서거정은 사랑하는 고향의 열 경치를 꼽아 대구십영(大邱十詠)이라 이름 붙여 노래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 전한다.

금호범주 (琴湖泛舟, 금호강의 뱃놀이)
입암조어 (笠巖釣魚, 입암에서의 낚시)
귀수춘운 (龜峀春雲, 거북산의 봄 구름)
학루명월 (鶴樓明月, 금학루의 밝은 달)
남소하화 (南沼荷花, 남소의 연꽃)
북벽향림 (北壁香林, 북벽의 향림)
동화심승 (桐華尋僧, 동화사의 중을 찾음)
노원송객 (櫓院送客, 노원에서의 송별)
공영적설 (公嶺積雪, 팔공산에 쌓인 눈)
침산낙조 (砧山落照, 침산의 저녁 노을)

이 가운데 한 편만 읽고 가련다. 琴湖泛舟(금호에 배 띄우고).

琴湖淸淺泛蘭舟 금호의 맑고 얕은 곳에 향그러운 배 띄우고
取次閑行近白鷗 조금씩 한가로이 백구 곁으로 가네
盡醉月明回棹去 달 밝은 밤 한껏 취해 노 돌려 가는데
風流不必五湖遊 오호에서 노는 것만 풍류는 아닌 것을

 

120년 역사의 계산성당.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경상감영의 정문인 관풍루의 옛 사진. ‘영남포정사’ 편액이 있다.
경상감영의 정청인 선화당.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그는 벼슬살이 끝나면 이곳 금호에 와서 일찍이 춘추시대 범려(范蠡)가 은퇴하여 서시(西施)를 데리고 오호(五湖)에 배 띄웠듯이 금호(琴湖)에 배 띄우고 살고 싶었나 보다.

이어서 대구읍성 이야기로 돌아가면 1870년 김세호 관찰사가 대대적으로 중수했는데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던 연간에 관찰사 서리 박중양은 1906년 일본인 비위에 맞춰 대구읍성을 해체해 버렸다 한다. 필자가 앞산에 올라 시내를 바라볼 때 어디에서도 경상감영(慶尙監營)의 성벽을 볼 수 없었던 까닭이다. 겸재의 그림에 성벽이 안 보이듯 필자의 사진에도 성벽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 몇 년 뒤 다시 앞산에 오르면 아마도 번창했던 경상감영의 모습을 어느 만큼은 내려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즈음 대구에서는 1601년 대구에 설치된 경상감영을 복원하기 위한 경상감영공원 주변 정비사업이 활발하니 말이다. 친일 앞에 사라진 경상감영이 다시 복원되면 할아버지 겸재와 손자 손암의 그림을 들고 다시 한번 앞산에 오르리라.

 

김광석 길에서.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기왕에 오랜만에 들린 대구, 오늘은 관광객스럽게 쏘다녀 본다. 감영공원을 다닌 뒤에는 마침 부활절이라 120년 역사의 계산(桂山)성당도 들러 보고, 약령시(藥令市)도 들러 보고, 근대문화 골목도 들러 본 후 신천 옆 방천시장으로 향한다. ‘서른 즈음에’의 가수 김광석 길을 가보고자 함이다. 겸재를 기화로 분위기에도 젖고 사진도 찰칵 한 장 찍고 온 날이다.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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