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그림 길 (102) 회연서원] 마음 한 자락 내려놓으면 힐링 되는 굼벵이 길

이한성 옛길 답사가 기자 2022.06.15 09:47:18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18년 한 고미술품 경매에서 겸재의 그림 한 점이 낙찰되었다. 낙찰 가격은 3억 원이었다 한다. 그 그림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회연서원(檜淵書院)도(圖)였다. 해당 지역 사람들이 아니면 서원 이름도 낯설고 그림도 낯설다. 해인사를 찾아간 길에 가야산 남동쪽 열악한 산길 59번 국도를 넘어 회연서원을 찾아간다. 이 길은 마음 급한 이들에게는 굼벵이 길이지만 마음 한 자락 놓으면 아름다운 길이다. 가야산의 연봉들을 바라보며 가는 길이며 가는 길 중간에는 법수사(法水寺) 터 아름다운 1000년 석탑이 길꾼을 위로하는 힐링의 길이다.

옛 터에 서서 아랫고을을 내려다보는 석탑은 언제나 고즈넉하다. 이윽고 성주 땅으로 들어서면 국도 인접한 곳에 회연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대가천(大伽川) 맑은 물길을 곁에 끼고 나지막한 봉비암을 등지고 앉은 회연서원은 아늑하기 그지없어 강학(講學)의 자리였기보다는 힐링의 자리였을 것 같다. 안내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무흘구곡을 품고 흐르는 대가천.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회연서원은 조선 선조 때의 대유학자이며 문신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 교육을 위하여 그의 사후인 인조 5년(1627년) 제자들이 뜻을 모아 세운 서원이다. 서원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선조 16년(1583년)에 정구가 회연초당(檜淵草堂)을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던 곳이다. 사당에는 한강 정구를 주향(主享: 제사의 으뜸 대상)으로 모시고 석담 이윤우(李潤雨)를 종향(從享: 곁에 모셔 제사 지냄, 배향)으로 모시고 있으며 향현사에는 송사이 이홍기 이홍랑 이홍우 이서 등 한강 정구와 동년배로서 지역민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들의 위판(位版: 위패)이 봉안되어 있다.”

그런데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누구일까?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인물이다 보니 인문학이나 유학(儒學)에 달리 관심이 없는 일반대중에게는 낯선 인물이다. 기왕에 회연서원에 왔으니 한강에 대해 몇 개의 정보라도 알고 서원을 둘러보는 게 좋겠다.

한강의 할아버지는 한훤당 김굉필의 사위였으니 한강은 김굉필의 진외증손(진외가: 할아버지, 아버지 외가)이 된다. 김굉필은 일찍이 근세도학지종(近世道學之宗)이라고 인정받은 도학(道學)의 거두라서 한강은 자연스레 도학에 가까이 갔다. 20대에 들어와서는 한양에 과거를 보러 왔는데 불합리한 모습에 과장(科場)에서 그대로 돌아왔다 한다. 그 후 영남 성리학(性理學, 朱子學)의 두 거두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으로부터 성리학을 익히고 율곡 이이의 아우 옥산(玉山) 이우(李瑀, 1542∼1609)와도 안부를 묻고 지내는 등 기호학파와도 교류한 폭넓은 성리학자였다. 특히 미수 허목과는 스승과 제자의 연이 있다. 1617년 미수의 부친이 거창 현감에 부임하자 미수는 부친을 따라왔는데 인근 고을의 한강을 스승으로 모셨다. 성호 이익은 부친과 학문적 교류가 있었던 미수의 학문을 자연스레 익혀 안정복·정약용 등에게 영향을 미쳐 경세치용의 학문으로 자리 잡았다 한다. 결국 한강의 학문은 미수를 통해 근기남인(近畿南人, 서울·경기 지역 남인) 실학파와도 닿았으니 한강의 학문은 경상좌우도(慶尙左右道)를 넘어 전국구가 된 셈이다.

 

회연서원 전경.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옛 지도 속 회연서원 위치.

그러나 좋은 학문적 인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명의 제자 북인 정인홍(鄭仁弘)이 광해군 시절 실세가 되었는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공격하며 한강에게 퇴계의 제자인가 남명의 제자인가를 밝히라고 공격을 가해왔다. 결국 한강은 정인홍과 인연을 끊었는데 이렇게 마음 고통을 겪은 일도 있었다.

한강 정구는 1583년(선조 16년) 지금의 회연서원 자리에 자그마한 회연초당을 짓고 후학을 길렀는데 그의 학문이 알려지면서 무수히 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회연초당을 열며 그 마음을 노래한 싯구(詩句)가 한강선생문집에 전해진다.

회연초당을 노래함 題檜淵草堂
작은 산 앞에 작은 집 小小山前小小家
동산 가득 매화 국화 해마다 늘어가네 滿園梅菊逐年加
거기에 구름과 냇물이 그림 같이 꾸며주니 更敎雲水粧如畵
세상 내 생애 가장 사치하구먼 擧世生涯我最奢

회연서원 앞마당에는 이때 매화를 많이 심고 정원을 일구어 백매원(百梅園)이라 했다는데 지금도 서원 마당에는 봄마다 매화가 만발한다. 이때를 기해 이곳에서는 매화 축제가 열려 지역의 많은 이들이 매향(梅香)에 젖는다.

초당에서 자족(自足)하는 선생의 마음을 읊은 시도 전한다.

회연에서 우연히 읊다 檜淵偶吟
대가천은 내게 깊은 인연 있으니 伽川於我有深緣
한강과 회연(두 이름)은 여기에서 얻었지 占得寒岡又檜淵
흰돌 맑은 내 종일 (같이) 노는데 白石淸川終日翫
세상 뭔 일이 내 속에 들어오겠나 世間何事入丹田

 

겸재 그림 속에도 보이는 완연대.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 작 회연서원도. 

이곳에서 유유자적하던 한강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제 회연서원을 살펴보자. 겸재의 회연서원도 속 건물과 공간은 지금의 서원과는 사뭇 다르다. 구도는 대가천 개울 쪽에서 서원을 바라보며 부감법으로 그린 것이다. 지금의 많은 건물들과는 달리 건물의 수는 적다. 그림에서 번호 1은 지금도 변함없이 개울가(대가천)에 우뚝 서 있는 완연대(翫淵臺: 물을 가지고 노는 대)이며 2는 봉비암(鳳飛巖)이다. 겸재의 다른 그림들처럼 작은 언덕을 이어지는 산으로 과장하여 그렸다. 허목의 미수기언에 따르면 선생이 87세 되던 해 회연서원 사람들의 요청에 응하여 덕휘당(德輝堂), 망운암(望雲巖), 봉비암(鳳飛巖) 액자(額子)를 전자(篆字) 썼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산위에 서 있는 바위에 쓴 글씨는 미수 허목의 글씨일 것이다. 그런데 봉비암 표지석은 새로 만든 표지석이다. 아마도 미수의 전자를 살려 새로 만들었을 것이다. 번호 3은 강학(講學) 공간인 경회당(景晦堂)이다. 여러 개의 편액들이 걸려 있다. 회연서원(檜淵書院), 경회당(景晦堂), 옥설헌(玉雪軒), 망운암(望雲庵) 불괴침(不愧寢)이다.

 

현재 회연서원의 건물 배치도. 

회연서원 편액 글씨체는 단아한 해서체인데 한석봉의 글씨체라 한다. 석봉 한호의 생몰연대가 1543(중종 38년)~1605년(선조 38년)이니 지금 회연서원 편액에 쓰여 있는 경오 이월 일 사액(庚午二月 日 賜額: 1690년 2월 일 사액)으로 볼 때 물론 석봉이 직접 쓴 글씨는 아니고 그의 글자를 집자(集子)하여 만든 글씨일 것이다. 믿을 수는 없지만 숙종의 어필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숙종 실록 15년(1689년) 11월 기사를 보면 회연서원에 사액(賜額: 나라에서 서원 편액을 내림)을 내리게 된 경위가 전한다.

 

회연서원 편액.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좌의정 목내선이 청하기를 성천(成川) 사인(士人)이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의 서원(書院)에 사액(賜額)하기를 청하였으니, 정구가 일찍이 성천의 수령을 지냈기 때문이었다. 성주(星州)는 바로 정구의 장수(藏修)하던 땅이라 회연서원(檜淵書院)을 세웠는데, 성천에 먼저 사액한 까닭으로 첩설(疊設)을 금하는 것에 저촉되므로 사액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는데, 목내선이 임금에게 말씀드리니 비로소 시행을 명하였다.

左議政睦來善請對言: 成川士人請賜文穆公 鄭逑書院之額, 逑常守成川故也. 星州卽逑藏修之地. 建檜淵書院. 而以成川先賜額. 故格於疊設之禁, 不許賜額. 來善言于上, 始命施行.

이런 연유로 숙종 어필이라는 말도 있는 것 같다.

‘회나무 연못가’에서 학문을 다짐했으나…

그런데 왜 회연서원(檜淵書院)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연(淵)은 대가천 물가에 자리했으니 그렇다 하고 회(檜)라는 나무는 무엇일까? 사전을 찾으면 노송나무, 전나무라 쓰여 있는데 연상되는 것은 없다. 오성 이항복은 남산 기슭 집에 회(檜)나무 두 그루를 심고 쌍회정(雙檜亭)이라 했고, 겸재의 그림 중에는 부자묘노회(夫子廟老檜: 공자님 사당에 늙은 회나무)라는 그림이 있다. 공자의 고향 산동성 곡부(曲阜) 공자사당에 가면 큰 회백나무(檜柏나무)가 심겨져 있는데 설명판에는 선사수식회(先師手植檜: 공자께서 손수 심으신 회나무)라 쓰여 있다. 공자께서 손수 심은 회(백)나무가 이제껏 자랄 리야 있겠냐마는 그 자리에 후세인이 계속 회나무를 이어 심었기에 그렇게 쓴 것이리라. 그런 연유로 회나무는 공자를 상징하는 나무가 되었다. 한강은 공자의 학당을 만들고 싶었던 마음을 그렇게 이름 붙였으리라. 이름뿐이 아닌 것 같다. 겸재 그림 속 번호 6은 아마도 회나무일 것이다.(졸고 겸재 그림 길 33 겸재 그림 부자묘노회 참조)

또 하나 주의 깊게 보아야 할 편액이 강학공간의 이름을 쓴 경회당(景晦堂)이다. 사전적 글자 풀이로 하면 볕 또는 큰 ‘경’(景)과 어둠 ‘회’(晦)이지만 여기에도 속뜻이 있다. 남송(南宋)의 학자 주자(朱子: 朱熹)의 호는 회암(晦菴)이다. 그러니 ‘경회’는 주자를 경(景)한다는 뜻이다. 경(景)이 해(sun)도 나타내고 크다는 뜻도 있으니 대양처럼 큰 주자의 학문을 본 받고자 한 이름은 아니었을까?

이어지는 편액들은 미수 허목의 망운암(望雲庵)에 이어 옥설헌(玉雪軒)이며, 알 수는 없지만 우암의 글씨라고도 하는 불괴침(不愧寢)이다. 무슨 말일까?

詩經(시경) 大雅(대아) 편에는 이런 말이 있다. 군자불괴우옥루(君子不愧于屋漏). 군자는 아무도 안 보는 방 후미진 구석에서도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에구 참 심하기도 하구나. 이 편액들은 쓴 사람 빼고는 판독하기 어려운 전서(篆書)로 쓴 글씨인데 다행히 가까이 가서 보면 각 글자 아래 알아 볼 수 있게 작은 해서(楷書)를 함께 써 놓았다. 옛사람들의 고마움이여.

다시 그림으로 돌아오면 4는 사당, 5는 서원 입구의 고목이다. 강학 공간과 사당은 일자(一字)로 자리 잡았다. 다른 서원들이 강학 공간 뒤로 사당이 자리 잡은 건물 배치임에 비해 회연서원만의 특이한 배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 지금 서원 입구를 지키는 나무는 400년 보호수 느티나무라는데 겸재 그림 속 나무는 아무리 보아도 버드나무 류(類)로 보인다. 겸재의 실수였을까? 아니면 그동안 느티나무로 바꾸어 심은 것일까? 흔히 이 그림을 그린 시기가 겸재의 청하읍성 현감 시절이라 하는데 그의 청하 근무 시기인 1733(58세)~1735년(60세) 이후 바꾸어 심었다면 지금의 느티나무는 300년이 안 된 나무일 것이다.

 

경회원 앞의 400년 묶은 느티나무.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궁금함은 또 있다. 과연 이 그림은 언제 그렸을까 하는 점이다. 겸재 그림을 공부한 이들 안목으로 보면 필법, 준법이 청하 현감 시절 필법에 가깝다고 판단해서 그런 것 같은데 쌍도정을 그릴 즈음인 하양 현감 시절(1721년 46세~ 1726년 51세)에 이 그림을 그렸다면 접근성도 좋고 편했을 텐데 청하에서 먼 고장 여기까지 와서 그렸을까 하는 점이 궁금하다. 또 겸재의 그림을 보면서 지금의 서원 앞마당과 많이 차이가 나는 점은 백매원(百梅園)이다. 한강의 신도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회연(檜淵)에 초당(草堂)을 짓고 매화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백매원(百梅園)이라 이름하고서 향우(鄕友)와 문도들을 모아 매월 초하룻날 강회를 갖는 계를 만들었는데….”

 

백매원 앞의 풍성한 매실. 매실 축제가 열리는 곳답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또 백매원을 방문했던 수우당 최경영의 행장에는, “일찍이 한강의 백매원에 갔는데 때는 마침 2월이라 매화가 가득 피었다(嘗至寒岡百梅園. 時當二月. 梅花盛開)”라고 하였다. 요즈음에도 초봄이면 서원 앞마당 백매원에는 매화가 만발하는데 겸재의 그림에는 서원 마당에 달리 나무도 꽃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영조 연간에 회연서원 백매원에는 매화도 대나무도 없어졌던 것일까? 지금은 물론 근년에 심은 매화가 축제를 이룰 만큼 화사하지만.

전국 도처에 ‘구곡’이 정해진 까닭

요즈음 새로 고쳐 지은 서원과 외부 공간을 구분하는 담장 한가운데에는 見道樓(현도루, 견도루)라는 2층 누각이 우뚝하다. 이 누각을 현도루로 읽으면 도(道)가 실현되는 것이 되며, 견도루로 읽으면 도(道)를 보는 것이 되니 현도루로 읽음이 더 좋을 것 같다. 겸재 그림 속 완연대(翫淵臺) 뒤로는 2층의 누각이 보인다. 현도루였을까? 그렇다면 지금의 위치와는 다른 위치에 있는 것이 되며, 아니라면 현재와 같이 새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층 누각은 사라진 셈이다.

 

한강 정구의 초상. 

현도루 밖 넓은 공간에 대가천 쪽으로는 한강 정구의 신도비가 서 있고 정면과 숭모각(유물전시관) 방향으로는 무흘구곡(武屹九曲) 안내 비(碑)들이 서 있다. 한강은 이곳에 자리를 잡은 후 대가천 35km를 거슬러 오르며 9곳의 명승을 지정하여 무흘구곡(武屹九曲)이라 이름 짓고 무흘정사(武屹精舍)를 지어 학문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구곡에 대해서는 9편의 시를 짓고 서시까지 합하여 무흘구곡가 10편을 지어 이 계곡을 노래하였다.

제1곡 봉비암(鳳飛巖), 제2곡 한강대(寒岡臺), 제3곡 배바위(무학정: 舞鶴亭), 제4곡 입암(立巖), 제5곡 사인암(捨印巖), 제6곡 옥류동(玉流洞), 제7곡 만월담(滿月潭), 제8곡 와룡암(臥龍巖), 제9곡 용추폭포(龍湫瀑布)가 그곳이다.

 

무흘구곡을 알리는 안내석.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한강전집(寒岡全集 권2)에는 한강 정구가 지은 무흘구곡가가 전한다. 자료를 위하여 여기에 옮겨 적는다.

삼가 주자(朱夫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
시의 운자에 차운하다 10수 仰和朱夫子武夷九曲詩韻十首


천하의 산 중에 가장 영험한 곳 어디인가 天下山誰最著靈
인간 세상에 여기처럼 깊고 맑은 곳 없네 人間無似此幽淸
하물며 일찍이 자리하신 상서로운 곳 紫陽況復曾棲息
도덕 명성 만고에 길게 전해지네 萬古長流道德聲

일곡이라 여울에 낚싯배 띄우고 一曲灘頭泛釣船
석양 개울에 낚싯줄 바람에 엉켰네 風絲繚繞夕陽川
누가 알리오 인간사 잡념 모두 버렸음을 誰知捐盡人間念
잡느니 상앗대에 저녁 이내 떨쳐냄을 唯執檀槳拂晩煙

이곡이라 미녀가 봉우리로 화하여 二曲佳姝化作峯
봄꽃이요 가을 단풍 단장을 고이 하니 春花秋葉靚粧容
저 옛날 초나라의 굴원(屈原)이 알았다면 當年若使靈均識
한 편의 이소경을 또 지어 보탰으리 添却離騷說一重

삼곡이라 이 골짝 누가 배를 감췄던가 三曲誰藏此壑船
천년토록 야밤에 지고 간 이 없었거니 夜無人負已千年
건너야 할 큰 강이 그 아니 많을까만 大川病涉知何限
건너갈 방도 없어 가련할 뿐이어라 用濟無由只自憐

사곡이라 백척 바위에 구름 걷히니 四曲雲收百尺巖
바위 위 화초 보소 바람결에 하늘하늘 巖頭花草帶風鬖
이 가운데 싱그럽기 이 같음을 뉘 알꼬 箇中誰會淸如許
저 하늘 달그림자 못 속에 떨어졌네 霽月天心影落潭

오곡이라 맑은 못 그 얼마나 깊은고 五曲淸潭幾許深
못가의 솔이며 대는 절로 숲을 이루었네 潭邊松竹自成林
복건 차림 은자가 높은 당에 앉아서 幅巾人坐高堂上
인심이며 도심을 깊이 나누네 講說人心與道心

육곡이라 초가집 물굽이에 지어 놓으니 六曲茅茨枕短灣
어지러운 세상에서 몇 겹을 가렸는고 世紛遮隔幾重關
그분은 이제 어디로 가셨을까 高人一去今何處
풍월은 그저 넉넉해 만고에 한가롭네 風月空餘萬古閑

칠곡이라 높은 봉 여울물 감아 도니 七曲層巒遶石灘
이런 풍광 일찍이 보지를 못했었네 風光又是未曾看
산신령님 잠든 학 깨우기를 즐겨 하셔 山靈好事驚眠鶴
소나무 찬 이슬 괜시리 학 얼굴에 떨구시네 松露無端落面寒

팔곡이라 오르니 시야 한층 트이는데 八曲披襟眼益開
멀리 갈 듯 흐르는 물 다시금 돌아 든다 川流如去復如廻
안개 구름 꽃과 새들 저마다 낙을 누려 煙雲花鳥渾成趣
노는 사람 오든 말든 나 몰라라 하누나 不管遊人來不來

구곡이라 고개 돌려 다시 한 숨 쉬네 九曲回頭更喟然
내 마음 산천을 좋아한 게 아니거니 我心非爲好山川
물의 근원 본래 말로 못할 묘함 있어 源頭自有難言妙
여기를 놓아 두고 하필 별천지를 찾을 건가 捨此何須問別天
(기존 번역을 부분 윤필함)

 

복건성에 있는 주자의 무이정사.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한강(寒岡)은 무흘구곡가를 지으면서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가를 차운(次韻: 운을 빌림)했다고 밝히고 있다. 주자의 무이구곡가는 무엇이었을까? 무이구곡을 모르면 선조 이후의 조선을 이해할 수가 없다. 주자(朱子: 朱熹1130~1200년)는 남송의 유학자로서 변방 중에도 변방인 복건(福建: 푸젠)성 무이산(武夷山: 요즈음은 武夷茗茶로 유명함) 가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살면서 제자를 기르고 공맹(孔孟)의 학문을 심도 있게 공부하면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그의 최대 업적은 공맹의 사서(四書)를 주석한 일이다. 주자 시대만 하더라도 공자와 맹자는 이미 1400, 1500년 전 사람이어서 주자에게도 공맹의 말씀은 고어(古語) 중에도 고어였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그는 예(禮: 관혼상제 등)에 대한 저술도 하고, 심(心)에 대한 저술도 하고 공맹의 가르침에 다가가기 위한 근사록(近思錄) 같은 책들도 썼는데, 퇴계는 도산(陶山)에 내려가 이를 집대성했고 율곡도 주자의 학문에 천착하니 조선의 학맥을 대표하는 영남학파(嶺南學派)와 기호학파(畿湖學派)가 모두 주자학에 빠져 들었다.

이런 주자는 무이산을 감고 흐르는 강물의 명소 9곳을 골라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지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애초 벼슬길에 오르지 않은/못한 선비들은 물론이요, 중앙 조정에서 산림(山林)으로 돌아온 사대부들은 주변 산천을 찾아 구곡(九曲)이라 이름 붙이고 앞 다투어 구곡가를 지으니 전국에는 구곡이요, 문집에는 구곡가가 넘쳐나게 되었다.
 

복건성에 있는 주자 무이구곡의 제1곡.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중국도 잊은 주자에 홀딱 빠진 조선

퇴계도 도산으로 돌아가 구곡을 만들고 도산구곡가를 지었으며 우암도 화양구곡을 만들고 서울 우이동 계곡에도 이계(耳谿) 홍양호(洪良浩)의 우이구곡(牛耳九曲)이 있음을 알고 계시는지요?

이런 흐름 속에서 한강의 무흘구곡도 탄생하게 되었다. 그는 철저히 공자와 주자를 롤모델 삼아 살려고 한 이였다. 돌이켜 보면 남부끄러운 짝퉁 문화이지만 지금 K-팝이 보여 주듯이 문화는 높은 곳, 새로운 곳에서 낮은 곳, 구태스러운 곳으로 흐르는 속성이 있으니 그 시대를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문제는 여기에 있지 않았다. 주자학(朱子學: 性理學)의 뿌리가 너무 깊다 보니 조선 후기로 갈수록 주자 말씀과 다른 일체의 생각과 사조는 용납되지 못하는 성리학 원리주의 사회로 흘러갔다. 주자의 생각과 조금만 다른 생각을 하면 그들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설 자리를 잃었다. 세계는 급변해 가는데 조선은 송나라 시대에 머물러, 실학(實學)이나 천주학(天主學)은 죄악이 되었다.

주자의 주해서를 통해 한문을 배우고 주자의 무이구곡가를 통해 우리 선비들의 구곡가를 간간히 보아 오던 필자는 연전(年前) 장강(長江)을 돌아보고 복건성 무이산으로 주자를 만나러 갔다. 감회랄 것은 없지만 조선의 역사가, 그 운명이 이 산과 이 물과 이 정사(精舍)의 덫에 걸려 결국은 쇠락의 길로 갔음에 회한이 마음속에 회오리바람 쳤다. 어쩌다가 조선은 중국도 잊은 주자를….
이렇게 만들어진 무흘구곡에 대해 한강의 문인들과 후손들 요청으로 1784년(정조 8년) 영재 김상진(金相眞)이 무흘구곡실경산수를 그렸고 한강의 후손 경헌 정동박(鄭東璞)은 구곡시를 지었다. 지금 회연서원 앞 무흘구곡을 설명하는 조형물에는 이 그림과 시를 넣어 비(碑)를 만들어 세웠다. 이제는 행정구역이 분화하여 무흘구곡 전반은 성주에, 후반은 김천시에 속한다. 이곳에 가시거든 35km 드라이브 하세요.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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