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정 평론가의 더 갤러리 (90) ‘조각충동’] 메타버스 시대에 조각은 계속 입체일까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기자 2022.06.29 09:51:58

(문화경제 =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조각을 정의할 때 가장 먼저 이야기되는 것 중 하나가 독립성을 가진 삼차원 입체일 것이다. 전통적인 조각의 규범, 모더니즘 시기에 중요시된 조각의 순수성과 그로 인해 생긴 경직성에 저항하는 설치는 재료와 형식적인 차이뿐 아니라 작품이 놓이는 공간에 긴밀하게 반응한다는 관계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 오늘날 설치라는 용어가 문제의식 없이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이 갖는 저항성과 실험성이 약화되었다는 자기비판적 이야기가 들리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조각을 전면에 내세운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의 전시 ‘조각충동’은 조각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꽤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조각의 개념을 ‘모든 것을 흡수하지만 그 내부는 비어있는 블랙홀’ 같다고 풀어낸 점도 흥미로웠다. “과거부터 익숙한 ‘조각’과 닮아있지만 그 신체성, 이미지, 물질, 위상에서 기존과는 다른 내적 구성 논리를 가진 작품들”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에서는 강재원, 고요손, 곽인탄, 김주리, 김채린, 돈선필, 문이삭, 신민, 오제성, 우한나, 이동훈, 정지현, 최고은, 최태훈, 최하늘, 황수연, 홍예준, 총 17명의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관련해 ‘조각충동’을 기획한 권혜인 학예사, 전시에 참여한 최태훈, 최하늘 작가와의 인터뷰를 싣는다.

 

이동훈, (사진 중앙) ‘일곱 번째 감각’, 2022, 느릅나무에 아크릴릭, 180 x 350 x 300cm, 사진 =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제공

“기차·스크린 등장하면서 이미지 달라졌으니”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권혜인 학예사


- 일정 부분에서 그 경계가 흐릿해지긴 했지만, 조각과 설치는 분명 차이를 갖는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는 조각과 설치 작업이 함께하는 것 같다.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가 생각하는 조각이란 무엇인지 궁금하다.

‘조각충동’이라는 제목에는 다의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제목을 보고 ‘조각을 하고 싶은 충동인가? 충동적으로 조각한다는 의미인가?’ 등의 질문을 받기도 했다. 나는 이번 전시에서 블랙홀이 되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조각의 개념을 생각했다. 실제로 블랙홀은 주변의 것들을 빨아들이지만 그 가운데는 텅 비어있고 바깥쪽으로는 막이 형성되어 있다. 고정된 의미를 중심에 놓고 그것을 지향하는 방식을 벗어나 마치 블랙홀을 감싸는 의미의 막을 더듬어 가면서 조각의 의미를 생성, 발생해나가는 게 현 상황이라고 보았다. 역사적으로 조각의 개념은 계속 극복되고 확장되어왔다. 그 과정에서 비조각이라고 불리는 것까지 조각에 흡수되는 상황도 생겼다. 2009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조각적인 것에 대한 저항’이라는 전시가 있었는데, 그 전시에서는 좌대가 없어지고 비물질로 가는 동시대적인 경향들이 다뤄졌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조각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며 조각이라는 블랙홀의 막에 생기는 의미들을 찾아 나서려는 충동들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조각에 대해 정의하려면 근본을 다뤄야 한다. 오늘날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업을 보면, 재료나 방법론에서 추구하는 바가 천차만별이다. 또 조각은 중력이나 신체, 조형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조각에 관한 로댕(Auguste Rodin)의 고민이 유효한 지점도 있다. 한편에서는 여태껏 다뤄지지 않았던 실험을 시도하기도 한다. 우리는 조각을 쉽게 접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조각이 무엇인지 정말 잘 아는 사람이 있을지 궁금하다. 조각이 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분투해나가고 자신의 자리를 생각해보려는 시도들이 지난 10여 년간의 궤적 같다. 그래서 속이 텅 빈 블랙홀로 향하는 충동이라 표현했다.
 

강재원, ‘S_crop’, 2022, 인플레이터블, 1층: 425 x 693 x 400cm, 2층: 315 x 496 x 200cm, 사진 =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제공
곽인탄, (사진 중앙) ‘어린이 조각가’, 2022, 레진, PLA, 아크릴릭, 수성 페인트, 에폭시, 우레탄 폼, 철, 알루미늄 망, 374 x 176 x 142cm, 사진 =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제공

- 조각이라는 영역을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미술 현장 안팎에서 주목받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작가들이 모였다. 작가 선정의 기준을 이야기해줄 수 있는가?

‘조각적인 것에 대한 저항’이 열린 2009년 이후의 작업들을 추적했다. 방법론적인 측면에서는 전통적인 방법론에 집중해 고민하는 작가들보다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지점을 생각하는 작가를 섭외하려 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1980년대 이후에 출생한 작가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조각이 만들어진 후에 발생하는 양감과 중력이라는 형식적인 부분뿐 아니라 상징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들을 어떻게 새롭게 볼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작가들을 선보이려 했다.

‘조각충동’에는 본인을 조각가라 인지하고 활동하는 작가, 본인이 조각가가 아니라고 말하는 작가 모두 포함되었다. 스스로를 조각가라고 생각하는 작가들은 조각의 존재 조건을 갱신하는 시도들을 보여주고, 자신의 작업이 조각이 아니라고 말하는 작가들은 조각의 의미가 어디에서 발생하는 것인지, 조각이면서 조각이 아닌 조각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를 보여준다. 이 둘을 같이 보여줘야 조각과 조각을 향한 실험의 전모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지금 조각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에는 가상현실도 있다. 기차가 등장하며 시각성이 바뀌었고, 스크린과 모바일이 제공한 납작해진 이미지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의에 영향을 주었다. 조각을 바라보는 관점이 아예 바뀌는 시기가 한 번은 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상현실로 들어가면 물리적인 조각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수밖에 없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소장품이 전시된 경우를 제외하면 참여 작가들 모두 신작을 전시했다. ‘조각충동’은 전시 주제에 맞춰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 흐름과는 무관한 별개의 작품을 생산한 전시가 아니다. 그래서 이전의 대표작에서 발전하는 방식의 작품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작가들 개인의 고유한 특성, 본연의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다. ‘작품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잘 역할할 수 있는가? 서로 옆에 있는 작품들끼리 개념적으로 어울릴 수 있는가?’뿐 아니라 작품들이 모두 주인공처럼 돋보일 수 있도록 공간을 구성하고자 했다.
 

황수연, ‘소파쥐’, 2022, 프린트된 종이, 나무, 가죽, 276 x 115 x 180cm, ‘피셔 1, 2’, 2022, 프린트된 종이, 컬러 스프레이, 나무, PLA필라멘트, 175 x 48 x 270cm, ‘이펙터’, 2022, 프린트된 종이, 이펙트 스프레이, 글리터, 280 x 150 x 87cm, 사진 =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제공
김주리, ‘모습: 某濕_202206’, 2022, 젖은 흙, 혼합 재료, 향, 290 x 400 x 300cm(2ea), 사진 =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제공

- 본인의 작업이 조각이다, 아니다를 말하려면 ‘조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름의 답을 갖고 있어야 한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과 그에 대해 심도 높은 대화를 나눴을 것 같다. 그런데 과거와 달리 지금은 조각이 무엇인지 추적하더라도 이전처럼 조각을 명확히 정의할 수 없고, 정확히 혹은 한정적으로 정의하기를 거부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조각의 방법론을 일부 취하면서 실험하기 때문에 조각을 한다고 말하는 작가도 있었고, 여태까지의 설치, 조각과는 다른 부분을 탐구하겠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작업이 조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본인이 조소를 전공하며 대학에서 습득한 것을 바탕으로 ‘조각이란 무엇인지 그 기본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공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와 같은 고민을 이어 나가기 때문에 자신을 조각가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 조각과 관련해 가상현실을 말했는데, 매우 흥미롭고 시의적인 이슈이다. 가상현실은 조각과 가장 대비되는 지점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답변을 듣다 보니 조각이 가상현실에서 구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 역시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만약 가상현실에서 조각이 다뤄진다면 촉각적인 부분이 강조될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차원 이상의 것이 나올 수도 있다.

가상현실에서도 조각에 관한 테스트가 시도되어야 한다. 일례로 포스트 인터넷처럼 가상 세계가 현실로 출력될 때의 감각들이 반영될 수도 있겠다. 가상현실에서 데이터로만 존재하는 것 혹은 특정한 효과만을 가진 것이 조각인가 등에 관한 고민도 하는 것 같다. 나 역시 우리가 조각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들, 새로운 조각적인 경험들이 가상현실에서 포섭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전의 조각이 바라보기만 하는 대상이었다면, 이젠 나와 연결된 어떤 것이거나 심지어 내가 조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유로운 위치이동도 이뤄질 것이다.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미지, 데이터, 사물들로부터 어떻게 탈주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도 이뤄지고 있다. 물론 관점에 따라 매우 다양한 접근법이 있겠지만 결과물이 비물질적이어도 조각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만들어낸다면 충분히 조각이라 불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시 ‘조각적인 것에 대한 저항’ 이후 약 12년이 지나 ‘조각충동’으로 이동했으니 10~15년 뒤에 또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돈선필, (사진 좌) ‘자본주의의 고양이’ 시리즈, 2022, 레진, 아크릴, 피규어, (위) ‘균형의 왕’, 2021, 4k 비디오, 30sec(loop), ‘스크린 세이더’, 2021, 4k 비디오, 6min 47sec, 사진 =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제공

- 마지막으로 전시와 관련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인가?

그동안 조각만 한자리에 모인 전시가 없었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가 조각을 순수하게 탐구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작가들에게도 이번 전시가 더 왕성히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으면 좋겠다. 또 물리적인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우선은 관객들이 직접 몸으로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체험하고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최태훈, ‘살-자소상’ 시리즈, 2022, 네스팅 테이블, 철제 선반, 우레탄 폼, 사진 =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제공

“촉각의 대상이면서 촉각을 거부하는 조각”
최태훈, 최하늘 작가


- 평상시에도 관련된 고민을 해왔겠으나, 참여 작가로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조각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했을 것 같다. 단정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질문해보고 싶다. 조각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최태훈: 평상시 ‘조각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큰 질문에 대해서는 특별히 생각하지 않는데, 최근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나는 조각이 무엇인지 보다는 무엇이 조각이 아닌지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질문의 범위를 내 작업 안에서 조각과 조각이 아닌 것의 이야기로 좁혀 답해보면, 나는 조각의 주요한 특질을 촉각성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 촉각성은 사물로부터 비롯된다. 인간은 사물을 통해서 입체를 경험하고 체화한다. 자연을 포함해 물건들을 만져보면서 촉각을 키우고 기능을 익힌다. 반면 조각은 기본적으로 만지고 사용하는 용도가 아니다. 접촉을 거부하는 사물이다. 나는 기성품을 이용해 조각을 만드는데, 익숙한 표면들을 몸에 각인되지 않은 방식으로 제시한다. 내가 만든 조각의 촉각성에서는 ‘만지고 싶음’보다 ‘만질 수 없음’이 더 중요하다. 이를 위해 촉각적 충동을 시지각으로 전환해야만 한다. 알고 있던 감각을 다른 감각으로 흡수해야 하기에 누군가에게 조각적 경험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최하늘: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른 작가들은 자신들의 지상과제를 조각이라는 형식에 담아내는 것 같은데, 나는 따로 나만의 양식이나 방법론 개발에 서두르지 않는 편이다. 조각은 이제 설치의 시대를 지나 다시 조각의 시대에 도착했다. 단일 조각만이 할 수 있었던 이야기는 종료되었고 장소와 조각을 묶어 장소특정성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마땅한 이행이었으나, 그마저도 이미 대형 비엔날레 등 다양한 스펙터클에 종속되면서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조각이 다시 도전을 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모든 것이 해체된 포스트모더니즘처럼 조각은 요소요소가 해체되어 설치가 되었는데, 나는 그 다음에 대해 생각한다. 입체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조각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무엇이 조각을 조각처럼 보이게 하는지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내리거나 갱신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고, 단일한 덩어리로 돌아온 조각을 어떻게 새로운 시대로 보낼지가 내가 생각하는 오늘날 조각의 숙제이다.
 

최하늘, ‘강철이(強鐵)(깡철)’, 2022, MDF, 에코보드, 스폰지, 포맥스, 은경, 금속, 스티로폼, 가변 설치, 사진 =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제공

- 이번에 전시된 작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주제전이지만 ‘개별 작가의 고유성이 담긴, 이전의 대표작에서 발전하는 방식의 작품’들이 주로 전시되었다고 들었다.

최태훈: 나는 그간 사물을 형태적으로 독립시키는 작업을 해왔다. 그것은 인간과 사물의 연결고리인 기능으로부터 떼어내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떨어져 나온 입체들은 사물이 아니라 조각이 되었다. 2021년 말에 ‘살(SAL)’이라는 개념과 동명의 개인전을 발표하면서 나의 작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살(SAL)은 뼈와 살을 동시에 뜻한다. 지나간 내 작업의 방법론을 뼈대 삼아 새로운 살을 붙여나가는 작업이다. 뼈와 살이 만나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존재하며 스스로 만들어 가는 형태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조각충동’전에 발표한 ‘살 - 자소상’들은 이를 선명하게 제시한 작업이다. 2020년에 처음 선보인 ‘자소상’ 시리즈는 알고리즘이 나에게 추천한 가구들을 조합해 만든 초상 조각이다. 당시 개인전에 출품했던 작업 중 하나를 선택해 여러 가지 형태로 증식시키는 변주인데 자세히 보면 ‘살 - 자소상5’(2021~2022)만 뼈대가 다르다. 이전에 만들었던 자소상에 살이 붙고, 그것이 공간에 연결되면서 완성의 개념이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상태에 놓이게 된다.

최하늘: 딱히 대표작이 없기 때문에 나는 완전히 제로 베이스에서 신작을 제작했다. 전시된 작품은 총 2점인데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하나는 폭탄이 터진 것 같은 장식과 조각, 시트지 등이 뒤섞여 도통 무엇이 조각이고 무엇이 장식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설치 작업이다. 이는 내가 현재 생각하고 있는 조각의 상황이다. 제목은 ‘강철이(強鐵)(깡철)’라고 지었는데, 천년의 수련 후에도 용이 되지 못해 이무기가 된 요괴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조각이 수련을 거듭하고 도착한 곳이 장식을 이용하는, 공간을 잠식하는 조각이라면 이는 욕심을 버리지 못해(여의주를 버리지 못해) 용이 되지 못하고 있는 조각과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그 맞은편에 있는 ‘백좌용비석’은 다음 단계의 조각이다. 용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늘 조각이나 그림으로만 존재해온 신비한 동물이라는 점과 연결된다. 비석의 가운데에 있는 QR코드를 찍으면 인스타그램 필터로 용 조각 모양이 등장하는데, 이는 가상의 공간을 이용하는 조각을 보여준다. 앞으로의 조각은 자신의 몸뚱이를 조금씩 버리고 조금 더 가벼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문화경제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