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그림길 (103) 해인사] 디테일 살려 온화하게 해인사를 그리다

이한성 옛길 답사가 기자 2022.06.29 09:51:58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한국인이라면 학창시절부터 해인사(海印寺)와 인연을 맺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다. 까까머리 시절 수학여행 길에 오른 이도 있고 아니면 국사 시험에서라도 해인사와 만나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다. 팔자도 예외는 아니어서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시험을 통해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만났고 대학생이 되면서는 배낭을 지고 해인사와 가야산과 홍류동을 찾아왔다.

지금도 생각이 난다. 무슨 고독을 씹겠다고 나홀로 텐트를 지고 구천동을 넘어 거창 시골 마을을 온종일 걸어 저녁 시외버스로 도착해 찾아간 해인사길. 늦가을 까만 가지만 남은 감나무에 몇 개씩 남겨둔 까치밥의 선연한 색깔은 참 아름다웠다. 지금은 다 아랫마을로 내려갔지만 가물가물 기억 속 사하촌(寺下寸)은 일주문과 그다지 먼 곳에 있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내 등 뒤 텐트가 안쓰러우셨던지 선뜻 가겟방을 내어 주시던 아주머니가 기억난다. 그렇게 찾았던 팔만대장경은 뭔지도 모르면서 큰 도서관 서고(書庫)를 둘러보듯 그렇게 보았던 것 같다.

 

해인사 일주문.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 작 해인사 부채 그림.

오늘은 겸재의 그림을 들고 해인사를 찾아간다. 겸재가 해인사를 그린 그림은 두 점이 남아 있다. 하나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부채에 그린 해인사도(海印寺圖)이며, 또 한 점은 10여 년 전 ‘옥션 단’에 깜짝 등장했던 비단에 그린 해인사도이다. 또 하나, 이 두 그림과 비교해 보아야 할 그림이 김윤겸이 그린 영남기행첩 속 해인사도이다.

 

그런데 전국민에게 익숙한 해인사를 새삼스레 글로 쓸 것이 무엇 있을까? 편치 않은 마음이지만 그래도 해인사가 어떤 절인지는 살펴야 하니 해인사를 소개한 글이라도 간단히 보아야겠다. 해인사는 국립공원 가야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데 가야산은 백두대간의 대덕산과 삼봉산 사이 능선에서 갈라진 수도지맥 산길에서 최고의 명산이다. 이런 명산 품에 자리 잡고 팔만대장경을 모시고 있는 절이기에 삼보사찰(三寶寺刹: 通度寺 = 佛寶사찰, 松廣寺 = 僧寶사찰, 海印寺 = 法寶사찰)로 중시되고 있다. 조계종 제12교구 본사로서 역사성을 인정받아 2009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한다.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 때의 유학승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우두산(牛頭山: 가야산)에 초당(草堂)을 지은 데서 절이 시작되었다 한다. 마침 애장왕비가 등창이 났는데 이들의 기도가 통했는지 그 병이 나으니 왕은 가야산에 와서 원당(願堂)을 짓고 기도도 했으며 이곳에 절을 짓도록 지원했다 한다. 순응이 절을 짓기 시작하고 그 뒤를 이정이 이었다. 918년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당시의 주지 희랑(希郞)이 후백제의 견훤을 뿌리치는 데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國刹)로 삼아 해동(海東) 제일의 도량(道場)이 되게 하였다 한다. 사명대사의 입적처이며 근세의 고승 경허, 환경, 용성, 고암, 만해도 인연을 둔 곳이다.

 

대적광전.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조선고적도보’ 속 대적광전.
‘조선고적도보’ 중 해인사 전경.

창건 이후 여러 차례 대화재를 만나 중창되었는데, 현재의 건물들은 대개 조선 말엽에 중건한 것들로 50여 동에 이른다 한다. 창건 당시의 유물로는 대적광전(大寂光殿) 앞뜰의 3층석탑과 석등이 있다. 그러나 후에 옮겨와 국보로 지정된 대장경판과 이를 보관하는 장경판전, 보물로 지정된 석조여래입상은 잘 알려져 있으며, 불가사의한 일은 여러 차례의 화재를 당하면서도 팔만대장경판과 장경각만은 화를 입지 않은 일이다.

최치원 흔적 남은 가야산 합천팔경

해인사가 자리한 가야산 아래 승경(勝景)은 합천의 최북단으로 오히려 성주에 가까운 지역인데 요즈음의 합천팔경 중 4곳이 이곳에 있다. 1경 가야산, 2경 해인사, 3경 해인사 계곡인 홍류동 계곡, 4경은 해인사의 앞 산 매화산이다. 일찍이 신라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905?) 선생이 가족과 함께 이곳에 은거해 살았다 한다.

고운을 숭배한 조선의 선비들은 가야산에 가면 고운을 잊지 않았다. 옛 기록에, “가야산(伽倻山)은 합천(陜川) 야로현(冶罏縣) 북쪽 30리에 있다. 선생이 일찍이 가족을 데리고 여기에 은거하였는데, 지금도 치원촌(致遠村)이라는 곳이 있다. 후세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공경하여 치인촌(治仁村)이라고 고쳐 불렀다(伽倻山在陜川冶罏縣北三十里. 先生嘗帶家隱於此. 至今有致遠村. 後人敬其名. 改呼以治仁村)”라고 했다.

회연서원도를 소개할 때 언급했던 한강 정구와 미수 허목도 가야산에 올라 가야산기를 남겼는데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기록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에 남은 고운에 대한 기록을 잠시 보자.

깎아지른 절벽과 평평한 바위에 이름 짓고 깊이 판 글자의 획이 완연하다. 홍류동(紅流洞), 자필암(泚筆巖), 취적봉(吹篴峯), 광풍뢰(光風瀨), 제월담(霽月潭), 분옥폭(噴玉瀑), 완재암(宛在巖) 등은 모두 그가 이름 지은 것들인데, 세월이 오래 지났어도 마멸되지 않았다. 유람을 온 사람들에게 즐길 거리로 제공할 만하다. 또 최고운이 지은 절구(絶句) 한 수가 폭포의 석면(石面)에 새겨져 있다. 그런데 매년 장마물이 넘쳐 씻겨 내려가는 통에 마모되어 지금은 다시 알아볼 수 없게 된 지 오래인데 한동안 만져 보다가 겨우 희미하게나마 한두 글자를 분별할 수가 있었다.

斷崖盤巖. 設名深刻. 字畫宛然. 紅流洞,泚筆巖,吹篴峯,光風瀨,霽月潭,噴玉瀑,宛在巖. 皆所名也. 可經久不剜. 以供遊人之玩也. 又刻崔孤雲詩一絶於瀑㳍石面. 而每年霖漲. 狂瀾盪磨. 今不可復認. 摩挲久之. 依俙僅辨得一兩字矣.

과연 고운이 남긴 시는 어떤 시(詩)였을까? 다행히 동국여지승람과 동문선에 그 내용이 남아 있다.

해인사(海印寺):가야산(伽倻山) 서쪽에 있다. 신라 때 창건되었는데, 최치원의 서암(書巖)과 기각(碁閣)이 있다.


제시석(題詩石):해인사 골짜기를 세상에서는 홍류동(紅流洞)이라고 부른다. 골짜기 입구에 무릉교(武陵橋)가 있는데, 그 다리에서 절을 따라 5, 6리쯤 가면 최치원의 제시석이 있다. 후세 사람들은 그 바위를 치원대(致遠臺)라 불렀다.

독서당(讀書堂):세상에 전하기를, 최치원이 가야산에 숨어 살다가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집을 나갔는데 갓과 신발만 숲 속에 남겨 놓았을 뿐 간 곳을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해인사의 승려가 그날을 택해 갓을 모시고 그의 영정을 그려서 독서당에 두었다고 한다. 당의 옛터는 해인사 서쪽에 있다.

海印寺在伽倻山西. 新羅時所創. 有崔致遠書巖碁閣. 題詩石. 海印寺之洞. 俗云紅流洞. 洞口有武陵橋. 自橋循寺而行五六里. 有崔致遠題詩石. 後人名其石曰致遠臺. 讀書堂. 世傳崔致遠隱伽倻山. 一朝早起出戶. 遺冠屨於林間. 不知所歸. 海印寺僧. 以其日薦冥冠,禧舃,寫眞留讀書堂. 堂之遺址在寺西.

다행히 제시석(題詩石)의 시는 아래와 같이 전한다.

층층 바위에 미친 듯 뿜고 첩첩 산을 울려대니
狂噴疊石吼重巒
사람의 말소리 지척에도 분간하기 어렵구나
人語難分咫尺間
시비 소리 귀에 올까 항상 저어하니
常恐是非聲到耳
짐짓 물 흘려 온 산을 에워싸네
故敎流水盡籠山

아하, 그 시절에도 인간 세상에는 시비(是非)가 많았구나.

후세에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이곳을 지나면서 이 시의 운(韻: 한시는 짝수 句에 소리를 맞추는 106운으로 시를 짓는다)을 빌려 답시를 달았다.

맑은 시의 번득임은 푸른 산을 쏘았는데
淸詩光焰射蒼巒
먹의 남은 흔적은 바위에 희미하다
墨漬餘痕闕泐間
세상에 전하는 건 단지 신선 되어 떠났다는 것뿐
世上但云尸解去
어찌 알겠나 저 빈 산에 말 갈기 날리는 것을
那知馬鬣在空山

600년씩을 건너뛰며 이어지는 사연들

두 고수(高手)의 600년을 건너 뛴 교류를 또 한 번의 600년 넘어 우리가 엿듣는다. 오늘도 변함없는 가야산 홍류동의 물은 몇 번의 600년을 흐를 것인지?

 

기둥(주련)에 새겨진 ‘역천겁이불고’.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성철스님 부도.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제 해인사 소릿길로 이름지어진 홍류동 계곡 길을 걸어 해인사로 올라간다. 옛 부도 밭도 지나고 살아생전 스님 모습과는 다르게 참 많이 현대적인 성철스님의 부도전도 지난다. ‘파르라니’ 앳된 비구니 한 분이 봄볕 속에 바닥석(石) 사이사이 풀을 뽑고 있다. 저 나이에 무슨 솎아내야 할 것들이 많은 것일까? 일주문 지나고, 봉황문, 해탈문, 구광루 지나 대적광전에 닿는다. 오르는 길에는 알 듯 모를 듯 주련(柱聯)이 숙제를 준다. 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역천겁이불고 긍만세이장금).

초파일에 가까워서인가, 천 년 석탑이 꽃등 달고 때때옷 입은 할아버지처럼 부끄럼타고 있다. 명부전에는 백등(白燈)이 하늘 가득 매달려 영가(靈駕)들의 정토 길을 밝히고 있고. 평일 오전 시간이라서 절 마당은 비어 있다. 해인사에 올 때마다 사람들 틈에 끼어 제대로 느낌을 담고 간 날이 많지 않았었는데 오늘만은 예외였다. 대적광전 뒤 장경판전(藏經板殿) 오르는 층계도 오전 햇빛 속에 입정(入定)에 들었다. 그 층계에 앉아 나도 멍상에 든다.

 

초파일에 내걸린 백등 행렬.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제 나이 다 살고 죽은 고목을 보며
새삼 ‘늙어 죽는다’란 말이 좋아지는 날
내 친구 아무개는 지난해 콩팥을 잃고 이번에는 전립선을 도려내는 날

해인사 길 오르며 떨어지는 꽃잎도 보고
浮屠田 들러 시간 시간 돌로 남은 그 양반들 모습도 만나는데
성철 스님 부도 앞 봄 햇빛 아래 풀 뽑는 샛파란 비구니는 무엇 버릴 것이 있는 것일까

꽃들은 터울도 없이 피더니 아니 한 몫에 이렇게 다 지면 날더러 어쩌라는 거야

절길 오르는 길 더 모를 말씀 봄 햇빛 속에 아련하다
歷千劫而不古 천겁을 지나도 옛것이 아니고
亘萬歲而長今 만세를 뻗어도 늘 지금이다

대적광전 빛과 色으로 반짝이는 연등 곁으로
명부전 無色 등이 줄서 매달린 저 넘어 하늘은 푸른데
꽃등 달고 부끄럽게 서 있는 천년 석탑 곁으로 저 스님은 무엇을 찾으러 가는 것일까

藏經板殿 층계에 앉아
나의 심심한 오전은 햇빛 맞고 있다.

앞산은 수줍게 푸르르고 있는 중

장경판전으로 오른다. 수난도 많았던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그곳에 모셔져 있다. 참 기적이구나.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는 거란이 침공해 오자 부처님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대장경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첫 번째 대장경인 ‘초조 대장경’으로 현종 2년(1011년)에 시작돼 선종 4년(1087년)까지 76년간 판각한 대장경이다. 6000권에 달했던 이 대장경은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했는데 1232년 몽골군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지금도 팔공산 아래 부인사에 가면 잡초 무성한 밭고랑 사이에 불탄 옛 부인사의 기왓장이 무성하다.

 

‘조선고적도보’의 예전 장경판전 모습. 
장경판전 오르는 길.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장경판전.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그 뒤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1091년부터 1102년까지 ‘속장경’이 판각되었다. 속장경의 수량에 대해서는 고려사의 대각국사전(大覺國師傳)에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기로 하고 요와 송의 서책을 구하여 거의 4천 권에 달하였는데, 이를 모두 간행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흥왕사 교장사에서 간행한 속장경의 총수는 약 4천 권에 달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목판은 알려진 것이 없고 단지 이 대장경판으로 찍은 경(經)이 일본 동대사(東大寺) 도서관에 40권이 남아 있어 겨우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한다.

그 뒤 몽골이 침략해 오자 다시 판각한 대장경이 지금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이다. 고려 고종 23년(1236)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16년 동안의 판각 기간을 거쳐 동왕 38년(1251)에 완성시켰는데 도감은 강화도에 본사(本司)를 두고 경남 남해도에 분사를 따로 두어 사업을 분담하게 하였다. 대장경판의 재료인 목재를 구하기 편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무 학자 박상진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대장경의 재료로 쓰인 나무는 산벚나무, 돌배나무, 거제수나무, 층층나무가 주종인데 이 나무들을 비교적 풍부하게 조달할 수 있는 지역이 남해도와 또 마주 보는 진양(사천, 하동, 진주) 지역이였고, 당대 실권자 최우의 처남인 정안의 식읍이었기 때문에 실제 판각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을 것이다.

 

‘조선고적도보’ 속 해인사 일주문.

이렇게 16년 각고 끝에 판각이 완료되자 고종은 이 대장경을 맞으러 행차(幸次)하였다고 고려사에 전한다. 1251년(고종 38년 9월) ‘임금께서 성(城) 서문 밖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에 행차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행향(行香)하였다’. 이후 이 대장경은 선원사를 거쳐 조선 태조 때 한양 남대문 안 지천사로 옮겨진다. 이때의 기록을 보자. 조선왕조실록 1398년(태조 7년) 5월 10과 12일자 기록이다.

(임금께서) 용산강(龍山江)에 거둥하였다. 대장경판(大藏經版)을 강화(江華)의 선원사(禪源寺)로부터 운반하였다. (幸龍山江 大藏經板, 輸自江華禪源寺)

이틀 뒤인 5월 12일 조에는,

대장(隊長)과 대부(隊副) 2천 명으로 하여금 대장경판을 지천사(支天寺)로 운반하게 하였다.(令隊長隊副二千人, 輸經板于支天寺)

팔만대장경을 日에 주려 했던 세종대왕

대장경판은 완성된 후 고려말까지 강화 도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을 거쳐 선원사(禪源寺)에 수장(收藏)되었다가, 조선 태조 7년(1398) 서울 서대문 밖의 지천사(支天寺)를 거쳐 해인사로 옮겨진 다음 오늘날까지 보관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시면 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8편, 26편 참조, 인터넷검색이 됩니다). 왜 해인사로 갔는지 어떤 경로로 갔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단지 해인사 대적광전 벽화와 지금도 행하고 있는 대장경 이운(移運) 행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어떻게든 낙동강 개경포까지 온 팔만대장경을 우마차와 사람의 손으로 옮겨 해인사에 보관해 온 것 아닌가 하고 짐작할 뿐이다.

이 팔만대장경의 운명은 편안한 것만은 아니었다. 강화에 보관할 때는 왜구의 침략이 강화에 미쳐 언제 약탈되거나 화마(火魔)에 변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고, 해인사에 옮겨진 이후에도 편할 날이 없었다. 성리학을 국시로 하는 조선에게 대장경은 나랏일에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다. 반면 일본은 이 시기에 불교에 심취해 있었는데 필요없게 된 대장경을 달라는 요구와 애걸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자주 있었다.

이 기록들을 살핀 어떤 분의 이야기로는 태조 원년부터 중종 34년까지 무려 87차례에 걸쳐 조선에 대장경을 달라고 요구해 무언가 45차례나 받아갔다는 것이다. 한 예를 보자. 필자가 쓴 ‘옛절터 가는 길 26편 강화 용장사터’에서 쓴 글 일부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4년(1422년) 11월 기사를 보면 일본 국왕과 그 어머니가 승려 규주(圭籌)를 보내어 대장경을 청하였다. 1년 뒤 일본은 135명이라는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해 토산품을 바친다. 이에 팔만대장경을 제외한 삼종(三種)의 대장경을 일본에 넘겨주었다.

임금이 말씀하시기를 “국왕이 요구했으나 대장경판(大藏經板)은 우리나라에 오직 한 본 밖에 없으므로 요청에 응하기 어렵고, 다만 밀교대장경판(密敎大藏經板)과 주화엄경판(註華嚴經板)과 한자대장경(漢字大藏經)의 전부를 보내고자 한다.

上又曰: 國王所求大藏經板, 我國唯有一本, 難以塞請, 但欲以密敎大藏經板、註華嚴經板、漢字《大藏經》全部送之.

이렇게 일본으로 간 세 종(種)의 대장경은 그 후 화재로 소실되었으니 인류(人類)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재(灰)가 되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어지는 기사(記事)를 보자.

임금께서 대장경판을 무용지물로 여겨, 이웃나라에서 청구하니 처음에는 이를 주려고 했는데, 대신들이 논의해 말하기를, “경판은 비록 아낄 물건이 아니오나, 일본의 요구가 그침이 없고 지금 만약에 일일이 따르다가는, 나중에 줄 수 없는 물건을 청구하면, 이는 먼 앞날을 고려하는 것이 못됩니다.”

上以大藏經板無用之物, 而隣國請之, 初欲與之, 大臣等議曰: 經板雖非可嗇之物, 日本之求無已, 今若一一從之, 後有求其不可與之物, 則非所以慮遠也.

다행히 지금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국보 32호이며 세계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은 일본에 주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무용지물이지만 일본의 요구를 일일이 들어주다가는 나중이 곤란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때 팔만대장경을 일본에 주려했던 분이 세종대왕이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해인사 앞에 공군 항공기가 전시된 이유

다행히도 일본으로 넘어가지 않은 팔만대장경은 또 다른 위험을 넘겨야 했다. 바로 화마(火魔)였다. 기록에 의하면 최근 300여 년간에 7번의 화재가 있었으니 기록에 남지 않은 이전 기간에는 또 얼마나 많은 화재가 있었겠는가?

또 우리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 사건은 바로 전쟁이었다. 1592년 4월 부산 앞바다 절영도에 나타난 왜병은 4월 13일 상륙하더니 2주일만인 4월 27일 해인사 옆 고을 성주까지 입성하였다. 이제 해인사도 이들의 손에 들어갈 것은 순간의 일이었다. 이때 분연히 일어난 이들이 있었다. 서산대사의 제자 소암이 이끄는 승병, 곽재우 김면 정인홍이 이끄는 의병이 모이니 자그마치 5000이었다 한다. 이들은 세 차례에 걸친 성주성 공격으로 성주를 탈환하고 왜병은 물러가니 팔만대장경은 지켜졌다.

한국전쟁 때는 또 어떠했을까? 해인사 아랫마을 대장경테마파크에 가면 대장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전시물이 있다. 공군 항공기 F 86F가 그것이다. 어인 전투기?

1951년 8월, 우리 공군의 김영환 장군은 지휘부 미 공군으로부터 경남 합천의 해인사를 거점으로 활동 중인 900여 명의 북한군 게릴라 무리들을 소탕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김 장군은 4기 편대의 편대장으로서 비행기들을 이끌고 목표 지점으로 출격하였다. 전투기에는 해인사를 당장 날려버릴 폭탄들이 가득했다. 해인사 경내에 숨어있는 북한 게릴라들을 폭격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는 편대원들에게 자신의 명령 없이는 폭격을 일체 금한다는 지시를 내리고 적정을 살폈다. 그리고 산 주변 게릴라들만 폭격하고 끝내 해인사를 지키고 돌아왔다. 팔만대장경은 이렇게 지켜졌다. 반면 이 시기에 소백산 희방사에 있던 민족의 보물 훈민정음해례본은 폭격으로 사라졌으니 김영환 장군의 결단은 시간이 갈수록 빛이 난다.

이제 장경판전을 내려오면서 겸재의 해인사를 그린 두 그림과 김창업의 서자 김윤겸(1711~1775)이 그린 영남기행첩 속 해인사도를 참고하면서 가람 배치를 살펴본다. 앞에서도 소개했지만 겸재의 해인사도 두 점은 국박 소장 부채 그림과 ‘옥션 단’에 출품되었던 해안사도이다. 해인사는 1817년 대화재를 겪고 다시 재건되었다. 기본적으로 화재로 불탄 자리에 재건하였기에 주요 건물의 가람 배치는 현재의 배치와 차이가 없다.

 

부채 그림 속 건물 배치.
겸재 작 해인사 비단 그림(옥션 단 출품). 

해인사는 비스듬한 기슭에 세워졌기에 일주문부터 장경판전까지는 비스듬한 오르막이다. 따라서 뒷건물에서 앞을 보면 앞이 트인 시야가 확보되는 멋진 배치를 가지고 있다. 필자가 편의상 위로부터 각 건물에 번호를 붙여 보았다. 1 장경판전, 2 대적광전, 3 구광전, 4 해탈문, 5 봉황문, 6 일주문이다. 현재의 가람배치나 겸재의 두 그림과 김윤겸의 그림에도 가람 배치는 변화가 없다.

각각의 건물을 보면, 1 장경판전은 1817년 화재를 면하였기에 현재의 모습과 세 그림은 일치한다.

2 대적광전은 큰 변화가 있다. 현재의 대적광전은 단층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그런데 김윤겸의 그림이나 겸재의 ‘옥션 단’ 그림에서 보면 대적광전은 지금의 화엄사 각황전에서 보듯 중층(重層)의 팔작지붕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1817년 화재 후 제대로 복구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부채 그림 속 대적광전의 모습이다. 두 채의 건물을 그린 것인지 중층의 건물을 그린 것인지 분별하기 어려운 건물이 그려져 있다. 건물 표현도 조악한 편이다. 왜 그랬을까? 이어서, 해인사에 가 보면 알지만 본당인 대적광전 앞마당은 넓은 공간으로 3층탑과 석등도 서 있다. 겸재의 ‘옥션 단’ 그림에는 이 넓은 마당과 탑의 윗모습까지 그렸고 김윤겸의 그림에도 넉넉한 마당이 그려져 있다. 다시 말하면 건물의 배치가 그림에서도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부채 그림에서는 공간을 느낄 수 없다. 부채(부채: 扇面)에 그리다 보니 공간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까? ‘옥션 단’ 그림과 부채 그림은 동일한 밑그림을 모본으로 그렸을 터인데 디테일 차이가 크다.

이어지는 건물은 3 구광루로, 절 본당으로 오르기 전 거쳐 가는 공간이다. 위의 그림들을 보면 세로의 누각 아래를 지나 본당 마당으로 이르게 한 것으로 보인다. 1817년 화재 전 구광루는 T자형(T의 아래 I 즉 세로 전각 부분이 중앙보다 오른 쪽에 가까이 있는 비대칭 형태) 건물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지금은 T의 아랫부분은 없는 一자형 건물로 복원되었다. 그런데 부채 그림을 곰곰 살피면 다른 두 그림과 달리 세로로 선 누각 부분(I)이 一 자 부분에 이어져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디테일이 섬세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이어지는 건물들은 해탈문, 봉황문, 일주문이다.

 

현 해인사의 가람 배치. 
김윤겸 작 해인사.

 

겸재의 ‘옥션 단’ 그림은 하양 현감 시절 그렸을 것으로 보이는 달성원조나 쌍도정 회연서원(청하 현감 때 그렸다고도 함)처럼 디테일하며 문인의 안온함과 품격이 배어나는 듯하다. 겸재 중년의 솜씨로 보이는 그림일 것이다. 주변의 가람 배치와 산세의 모습도 안정적이다. 김윤겸의 그림도 같은 구도를 취하고 있다. 앞 언덕 보현암쯤 되는 위치에서 비스듬히 내려다 본 그림이라서 눈높이가 편안하다. 주변 산도 가람을 둘러싼 옆 산만 그렸다. 반면 부채그림에서는 가람 저 멀리로 가야산 영봉을 그려 넣어 한 여름 더위에 눈을 시원하게 하고 있다.

팔만대장경이여 영원하라.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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