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그림 길 (104) 반구대] 그림·자연·유적이 모두 다채로운 명소 반구대

이한성 옛길 답사가 기자 2022.07.14 09:27:40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08년 옥소(玉所) 권섭(1671~1759)이 엮은 공회첩(孔懷帖)에 실린 겸재의 그림 두 점이 세상에 알려졌다. 옥소 권섭은 이미 졸고 ‘겸재 그림 길(73) 단양의 구담봉 옥순봉’에 소개한 바 있는 문인이며 학자에 그림도 즐기고 여행가로도 빠지지 않는, 겸재(1676~1759)와 같은 시대를 산 인물이었다. 그가 엮은 공회첩에는 아우 권영(1678~1745)의 편지와 겸재의 그림 2점(반구, 옹천), 그리고 자신의 발문이 수록돼 있다 한다.


울주 대곡천 대곡박물관에서 펴낸 자료에 따르면 권섭의 아우 권영은 문과에 급제하고 대사간을 역임한 인물인데,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에 형 옥소에게 편지와 겸재의 그림을 보냈다. 형 옥소는 이것들을 화첩으로 묶어 발문을 붙였던 것이다. 공회(孔懷)란 가슴에 크게 간직한다는 뜻이니, 아우가 죽기 9일 전에 그림을 보내왔다고 발문에 밝힌 것을 보면 아마도 이 형제는 함께 겸재의 그림을 좋아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화첩을 엮을 당시 75세였던 권섭은 발문에서 “아침저녁으로 그림을 감상하면서 동생을 향한 그리움에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반구대 전경.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 화첩 속에 실린 반구(盤龜)는 울주 대곡천(大谷川, 옛 이름 반구천)에 있는 명승(名勝)인데 예부터 많은 이들이 찾고 즐기는 이 골짜기 최고의 명소였다. 겸재가 현감을 했던 청하(淸河)에서는 경주를 거쳐 한 나절에 올 수 있는 가까운 지역이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겸재가 청하 현감 시절(1733~1735, 겸재 58~60세) 그린 그림이라 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겸재 작 ‘반구대’. 
교남명승첩 속 반구대.

이 그림과 함께 철해진 옹천(甕遷)은 강원도 고성에서 통천으로 넘어가는 험로를 그린 것인데, 겸재가 36세(1711년) 때 이미 그린 신묘년풍악도첩 속에 있는 그림과 구도가 같다. 권영이 죽기 9일 전(1745년)에 형에게 보냈다는 내용으로 보나, 두 그림을 그린 지역의 거리로 보나, 시간의 간격으로 보더라도 아마도 겸재가 양천 현감을 마치고 인왕곡으로 돌아온 70세 무렵(1745년)에 옛 그림본을 바탕으로 다시 그린 그림으로 보면 자연스러울 것 같다.

 

언양 지역의 옛 지도. 
반구대 지역의 현재 지도. 

같은 노론으로서 교류가 있었을 겸재와 이들이기에 겸재가 집으로 돌아오자 권영은 형님이 좋아하는 겸재의 그림을 요청해 그려 보낸 것은 아닐까? 이 추측이 맞는다면 언젠가는 겸재가 청하 현감 시절 그린 최초의 반구대 그림도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한편 반구대를 그린 그림은 또 한 폭이 전해진다. 간송에 소장된 교남명승첩(嶠南名勝帖) 속 언양 반구대(彦陽 盤龜臺)이다. 아마도 겸재의 손자 손암(巽菴) 정황(鄭榥)의 작품이 아닐까 여겨지고 있다.

반구대에는 암각화가 없다?

이제 겸재의 그림 속 반구대를 찾아서 길을 떠나자. 반구대라는 이름은 이미 전국민이 알고 있는 낯익은 이름이다. 그러면 겸재는 암각화(岩刻畵)가 그려진 그 반구대를 그림으로 남긴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암각화가 그려져 있는 암벽은 반구대에서 좀 떨어진 대곡천 암벽에 그려져 있다. 별도의 이름이 없다 보니 주변의 명승 반구대란 이름을 빌려 ‘반구대 암각화’라고 썼는데 어느새 주객이 바뀌어 혼란이 일어났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반구대 계곡의 암각화’ 또는 ‘대곡리 암각화’로 부르고 있다.

 

대곡리 암각화 바위.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언양의 동북쪽 울주 땅의 대곡천은 예부터 빼어난 자연 경관과 살기 좋은 환경으로 유명했다. 이 계곡 길은 경주와 울산을 이어주는 지름길의 교통로로도 가치가 높았다. 울산과 포항은 경주에서 바다로 나아가는 통로였기에 그 주변에 일찍이 사람들이 자리 잡았는데 경주에서 울산으로 통하는 대곡천에는 근년에 대곡댐을 쌓으면서 많은 지역이 수몰되었다. 대곡리 암각화도 장마철에는 물에 잠긴다. 댐을 쌓기 전 대곡천 주변을 발굴했는데 그 결과 대곡천 주변에서 주거지, 절터, 도요지, 고분군 등 수준 높은 문화의 흔적이 대량 발굴되었다.

이런 대곡천을 따라가며 만나는 문화 유적들은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문화의 집결체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대곡리 암각화(반구대 암각화), 암각화의 많은 지식을 알려 주는 울산암각화 박물관, 대곡리 공룡 발자국 화석, 옛 선비들의 놀이터이며 겸재와 손자 정황의 그림이 그려진 반구대, 반구서원, 포은 정몽주의 이야기가 서린 반고서원 유허비, 집청정, 천전리 공룡 발자국 화석, 천전리 각석,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집대성되어 있는 대곡박물관, 그리고 잊혀진 옛 절터, 대곡천에 숨겨진 구곡문화 등이다. 겸재의 그림을 기화로 대곡천으로 떠나 본다.

1971년 동국대 답사 팀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원효대사와 인연을 가진 옛 절터 반고사 터를 찾아 대곡천으로 들어온다. 이때 이들은 우리 역사와 자연사에 한 획을 그은 문화 유적과 만난다. 천전리 각석과 대곡리(반구대) 암각화였다.

 

대곡리 암각화의 고래, 범 그림. 
암각화 속 거북이.

대곡리(반구대) 암각화는 울주군 두동면 반구대안길 254, 대곡천 건너 큰 바위 절벽 좌측 위치에 선각(線刻)으로 그려져 있다. 모두 300여 점의 그림이 빼곡히 그려져 있다.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때부터 많은 형태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고래, 거북, 물고기 등 다양한 바다 동물들이 그려져 있고, 육지 동물들도 범, 표범, 여우, 늑대, 너구리 등 다양하다. 사람의 얼굴도 빠지지 않았는데 ‘군살 없는 작은 얼굴’이라서 흥미롭다. 고래잡이 모습에다가 그물 등 어구(漁具)도 그려져 있고 활을 이용해 사냥하는 모습도 있어 그 시대의 생활상도 우리에게 전한다.

1995년 국보 285호로 지정되었고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7000년 전부터의 기록으로 여겨진다 하니 우리는 물론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직접 바위 앞에 가서 확인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으니 암각화 박물관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들 암각화의 모습을 접할 수 있게 하였다. 이제 우리의 박물관 전시도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어 뿌듯하다. 근처 대곡천변에서는 공룡 발자국 화석도 발견되어 공룡 시대에 숲이 우거졌을 대곡천을 상상하게 한다.

대곡천을 따라 내려가 다음 찾아가는 곳은 겸재 그림 속 대상인 반구대(盤龜臺)이다. 반구대는 반구산의 반구천(대곡천)에 솟은 높다란 바위이다. 대곡리 마을 지도자께서 알려 주시는 대로 방향을 잡고 산을 보니 거북의 모습처럼 보인다. 그래서 반구산이라 했다 한다.

 

거북이가 앉은 모습이라는 반구산.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곳은 고려말 포은 정몽주가 즐겨 찾던 곳이라 한다. 포은은 고려말 언양 요도(蓼島)로 유배를 온 일이 있다. 신진사류인 그는 이인임 등 친원파와 갈등을 빚어 유배길에 오른 것이었다. 그는 요도에 머물러야 했던 심한 제약이 풀리자 이곳 명승 반구대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반구대를 포은대(圃隱臺)라 부르는 까닭이다. 이때의 포은 마음을 알 수 있는 시가 그의 문집에 전한다.

언양 중양절의 감회, 유종원 시를 차운하여 (彦陽九日有懷 次柳宗元韻)

客心今日轉凄然 나그네 마음 오늘 더 처연하여
臨水登山瘴海邊 물 옆 산 올라 바다 봐도 무겁구나
腹裏有書還誤國 뱃속 지식 오히려 나라를 그르쳤고
囊中無藥可延年 주머니에 약 없으니 몇 년 더 살겠나
龍愁歲暮藏深壑 용은 세모에 수심 깊어 깊은 골짜기에 숨었고
鶴喜秋晴上碧天 학은 푸른 가을 하늘에 기쁘게 날아오르네
手折黃花聊一醉 손에는 국화 꺾어 한 순간 취하니
美人如玉隔雲烟 어여쁘신 우리 님은 구름 넘어 계시구나

 

반구서원 입구.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포은이 정치적 이유로 언양으로 유배 온 것과는 달리, 작은 고을 언양 입장에서는 중앙에 연(緣)을 댈 큰 인물도 없고 세력가도 없었으니 포은의 이곳 유배가 언양 선비들에게는 큰 위안처가 되었던 것 같다. 그들은 포은을 등에 업고 서원을 세웠다. 한국관광공사의 반구서원 설명 자료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712년(숙종38)에 언양 사람이 반구대는 고려 말 정몽주가 유배 온 곳이어서 ‘포은대(圃隱臺)’ 3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고, 조선조에는 이언적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으며, 정구가 이곳에 복거(卜居)하려 한 행적이 서간에 나타나는 곳이므로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건립 주체 사림은 이위, 김영하(金英夏), 김지(金志), 박문상(朴文祥) 등이며, 착공 1년 만에 완공하고 1713(숙종 39)에 위의 3선현을 봉안하였다. 선현 중 정몽주와 이언적은 울산의 구강서원에 이미 봉안되었거니와, 정구를 봉안한 것은 그가 퇴계 문인이면서 언양과 그리 멀지 않은 성주 출신이라는 데서 근거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반구서원은 끝내 사액서원이 되지 못했는데 대원군 때에는 서원철폐령으로 문을 닫아야 했다. 이제는 복원해서 대곡천 건너 반구대 반대편에 서 있고 이곳 선비들은 포은을 기억하며 반구산 기슭에 ‘반고서원(반구서원의 옛 이름) 유허비’를 세웠다. 지금도 그 비각이 반구서원을 바라보고 있다.

호랑이 명소이기도 했다는 반구대

반구대 건너편 반구서원 옆으로는 또 하나의 건물 집청정(集聽亭) 있다. 겸재의 반구(盤龜)도(圖)를 보면 수직 절벽으로 높이 솟은 반구산 바위가 화면 우측을 채우고 그 옆 중앙에는 비교적 평평한 바위 반구대를 그려 놓았다. 실제 모습과는 달리 과장되어 있지만 그림 자체로는 겸재 노년의 상당한 완성도가 느껴진다. 이 그림을 화첩으로 묶은 옥소 권섭도 그 자신 글도 쓰고 그림도 수준급이었으니 상당히 만족했을 것이다. 더욱이 여행가이기도 했던 옥소는 일찍이 이 대곡천을 다녀가면서 그의 영호남 여행기 중 남행일록(南行日錄)에 기록하였으니 겸재의 이 그림을 받고는 상당한 감회가 일었을 것이다.

 

반구대 건너편 반구서원 옆의 건물 집청정(集聽亭).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옥서 권섭은 1731년(영조 7년) 대곡천에 와서 지금은 절터도 온전하게 보전하지 못한 장천사(障川寺)에 묵으면서 반구대와 집청정을 다녀갔다. 그때 그는 황백색의 큰 범도 만났다. “散步川之南 見黃白色大虎 坐臥於峰腰 數變化其身 略驚動我輩(개울 남쪽을 산보하는데 황백색의 큰 범이 보였다. 몸을 자주 움직여 우리들을 놀라게 했다)”는 것이다. 대곡리 암각화에는 범도 9마리나 그려져 있다 하니 이 골짜기는 범 또한 많이 살던 곳이었다. 금년에는 암각화박물관에서 ‘반구대 虎전’도 연다 한다. 필자는 살짝 마음이 설렌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자. 대곡천에 흐르는 개울물 사이로 돌들과 작은 바위를 많이 그려 놓았다. 돌돌돌 물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와 같은 돌 모습은 지금도 다름이 없다. 이백칠팔십 년 전 모습이 어제인 양 느껴진다. 개울 건너편에는 정자 하나가 보인다. 옥소가 1731년(영조 7년) 다녀갔던 집청정일 것이다. 그러니까 옥소는 이곳을 다녀간 지 14년 뒤 반구대와 집청정을 그린 겸재의 그림을 만났던 것이다.

한편 손자 정황이 그린 것으로 여겨지는 또 하나의 반구대 그림이 교남명승첩에 있다. 선입견 때문에 그런가, 아무래도 이 그림은 겸재의 그림과 같은 위용은 부족하다. 그림을 그린 각도는 겸재와는 반대 방향으로, 반구대는 반구천의 좌측에, 집청전은 우측에 그려져 있다. 반구대 위 가운데에는 갓을 쓴 선비가 앉아 있는 것이 보이고 앞뒤로는 동료인지 시중드는 이들인지 구별이 안 되는 두 사람이 있다. 반구대 앞쪽 지금 유허비각이 있는 곳에는 지금과는 달리 제법 많은 인가들이 보인다. 요사이 대곡리 마을은 개울 건너 집청정 쪽에 형성되어 있다.

집청정(集淸亭)은 설명 자료를 요약하면, 1713년(숙종 39년) 병조판서를 지낸 최신기(1673~1737)가 건립한 정자로 반구정(盤龜亭)이라 불렸다고 한다. 최신기는 정몽주의 흔적이 남아 있는 반구대 경관이 감추어진 것을 애석히 여겨 반구대 개울 건너편에 정자를 세워 벗들이 학문이나 마음을 닦는 장소로 삼았다고 한다.

 

반구대에 새겨진 학. 사진 = 대곡리 마을지도자

이만부(1644~1732)는 반구기(盤龜記)에 ‘옥천선동, 완화계라는 글자를 돌에 새기고, 또 학을 그려 넣었는데, 이것은 모두 최 군이 한 것이다(上曰玉泉仙洞. 曰浣花溪. 又畵鶴. 俱石刻. 皆崔君爲之.)’라고 기록했다 한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자료 요약)

 

반구(盤龜) 각자.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렇게 새겨 놓은 盤龜(반구)라는 각자와 무수히 많은 이름 자, 학 그림이 반구대 아래 개울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학처럼 살고자 한 조선 산림(山林, 재야) 선비들의 마음이리라. 이런 마음을 퇴계의 문인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은 시로 남겼다.

반고동에 들어가서. 지금 명칭은 반구이다 (入磻高洞 今稱磻龜)
입석 천 길 우뚝하고 石立危千丈
시냇물 절로 백 번 서리네 溪流自百盤
깊은 못은 갈아 놓은 옥 거울 泓潭磨玉鏡
거센 물결은 솟아 오른 은산 激浪湧銀山
면면이 가을 노을 찬란하고 面面秋霞爛
머리머리 서리내린 국화는 차네 頭頭霜菊寒
긴 회포 누가 알리오 永懷誰會得
德者의 넉넉함 말 안 하네 弗告碩人寬
 

천전리 각석.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공룡 발자국의 명소 천전리

이제 또 하나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만나러 천전리(川前里)로 향한다. 반구대나 대곡리 각석에서 대곡천을 따라 가는 길은 없다. 이곳에 올 때마다 느끼는 아쉬움이다. 산길을 넘든지 대곡댐을 돌아 가야 한다. 천전리에는 대곡리에서 만났던 공룡 발자국보다 더욱 선명하고 많은 발자국을 만날 수 있다. 공룡 발자국에 관심이 많은 이들은 천전리로 가시기를 권한다. 남쪽 지방 어느 바닷가보다 확실한 공룡 발자국을 만날 수 있다.

또 하나 필자를 설레게 하는 것은 국보 147호 천전리 각석이다. 1971년 반고사터를 답사 왔던 동국대 학술팀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각석인데, 선사시대 다양한 기하학적 문양 이외에 신라 왕족이 새긴 글씨가 또렷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두 번에 걸쳐 쓴 글인데 처음 글은 갈문왕이 이곳에 누이와 함께 놀러 왔다는 내용이다. 두 번째 글은 14년 뒤 그 갈문왕의 아내가 기록한 글인데 이미 갈문왕은 세상을 하직하고 죽은 갈문왕을 그리며 아들과 함께 이곳에 온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비록 전문 분야이지만 대곡박물관 전시 자료와 2004년 간행된 단행본 ‘고대로부터의 통신’에 의거해 간단히 내용을 소개하려 한다. 앞의 글은 을사년(525년, 신라 법흥왕 12년) 글로 보고 있다(원문은 사진 참조). 두 번째 글은 14년 뒤인 기미년(539년)에 쓴 글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전리의 을사년 글씨.
천전리의 기미년 글씨. 

을사년 글(525년)

을사년에 사달부 갈문왕이 찾아 놀러 와서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았다. 오래 된 이름 없는 골짜기였다. 좋은 돌을 얻어 ( )을 만들게 하시고는 서석곡(書石谷)이라 이름 짓고 쓰게 했다. 함께 놀러온 우매(友妹)는 성스러운 덕을 지닌 밝고 신묘한 어사추여랑님(왕)이시다.

기미년 글(539년)

과거 을사년 6월 18일 새벽 사달부 사부지 갈문왕과 매(누이) 어사추어랑님(왕)이 함께 놀러온 후 ( )년이 지났는데 매왕을 생각하니 매왕은 죽었다. 정사년(537년)에 (갈문)왕도 떠났다. 그 왕비인 지몰시혜부가 왕을 사랑하고 그리워하여 기미년 7월 3일에 왕과 매가 함께 보았던 서석을 보러 계곡에 왔다. 이 때 셋이 함께 왔는데 무즉지태왕비인 부걸지비와 사부지 길문왕의 아들인 심맥부지가 함께 오셨다.

 

‘반구대 虎전’ 포스터.

해설에 의하면, 법흥왕의 딸이며 갈문왕의 부인 지몰시혜부가 어머니 부걸지비(법흥왕비)와 아들 심맥부지를 데리고 남편 갈문왕이 써 놓은 서석을 보러 온 기록이다. 아들 심맥부지(진흥왕)는 7살에 왕위에 올랐는데 아들이 왕위에 오를 것이 정해지자 고인이 된 남편의 기록물 앞에 어머니와 아들을 데리고 온 기록이 아닐까 하는 해설이다. 1500년 전 사람들의 삶이 시간을 넘어 전해져 온다. 갈문왕과 같이 왔던 우매(友妹)는 한 어머니 여동생은 아닐 것일 텐데 누구였으며 갈문왕과 결혼은 하고 죽었을까? 바위에 기록까지 남겼으면 오래오래 사랑하며 살기를 바랐을 텐데 어쩌다가….

이미 고인이 된 남편 앞에 7살 아들의 등극을 알리러 온 지몰시혜부 부인의 마음은 어땠을까? 천전리 골짜기에는 시간 속에 묻힌 삶이 있었다.

이 골짜기에는 옛 절터들도 있다. 원효가 저술 활동을 했던 반고사(磻高寺), 옥소가 머물다가 범을 만난 장천사(障川寺), 이름도 잃어버린 방리의 백련사(白蓮寺) 등이다. 작지도, 역사가 일천하지도 않은 절들이었다. 절터를 남겨 마음이 쉬어가는 자리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또 하나 대곡리 골짜기에서 소홀히 힐 수 없는 문화가 있다. 이미 한강 정구의 회연서원에서 다루었듯이 조선 선비들에게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골짜기는 그냥 자연의 골짜기가 아니었다. 그들은 주자의 무이구곡을 그곳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대곡천에도 구곡의 꿈을 이루려는 선비들이 있었다.

한 사람은 도와(陶窩) 최남복(1759~1814)이다. 그는 천전리 일대에 백련구곡(白蓮九曲)을 설정하였다. 그는 백련구곡도가(白蓮九曲櫂歌)도 지었다. 이제는 대곡댐으로 구곡의 많은 부분이 수몰되었다 한다.

언양 선비 송찬규(1838~1910)도 대곡천에 반계구곡(磻溪九曲)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반계구곡음(磻溪九曲吟)도 지었다.

누구의 흔적인지 아직은 밝혀지지 않은 구곡(九曲)의 각자도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이곳의 구곡문화는 향후 더 밝혀질 것이다. 짝퉁 문화의 산물인 구곡문화가 우리 시대에 뭐가 중요하냐 하겠지마는 중국에서도 무이구곡을 제외하면 거의 찾을 수 없는 구곡문화는 우리 땅의 또 하나 정신문화 산물이다.

끝으로 겸재 반구대 그림 길은 대곡박물관을 거치도록 하자. 먼 곳이라서 자주 들리는 곳은 아니지만 이곳 전시물은 대곡천의 문화를 밝히려는 노력의 결집물들이다. 들릴 때마다 관장님이나 학예사님의 설명에 감사할 따름이다. 대곡천이 오래도록 보존되기를 기원하며 글을 맺는다.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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