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그림 길 (113)] ‘인왕제색’ 그린 곳이 청와대 경내 아닌 이유

이한성 옛길 답사가 기자 2022.11.30 09:15:40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 그림 길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연재를 마무리하기에 앞서 겸재를 사랑하는 이들이 다시 한 번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하는 그림 두 점이 있다.

하나는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로, 어디에서 그렸을까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인암(舍人巖)으로, 어디에 있는 폭포를 그린 것일까 하는 점이다. 이 두 주제에 대해서는 기존에 연재한 글에서 이미 언급하였지만 자료를 보완하여 다시 한번 짚어 보려 한다.

1. 인왕제색도는 어디에서 그렸을까?

기존의 정설로 되어 있는 내용은 인왕제색도는 북악산 남쪽 기슭, 즉 지금의 청와대 경내에서 그린 것이며 그림 속 집은 칠궁 옆에 있었다는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의 집 취록헌(翠麓軒)이라는 것이었다. 이 내용은 국영 방송의 특집으로도 방영되어 관심 있는 국민들 뇌리 속에 깊이 박혔다.

이제 삼성가의 방대한 컬렉션 속에 있던 이 그림도 기증되었고, 청와대도 열렸으니 이런 내용을 검증하기에는 제약이 없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가 기정사실이 된 것일까?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이런 이유는 아니었을까?

겸재와 둘도 없이 막역하게 지낸 사천 이병연(槎川 李秉淵)의 졸기(卒記: 죽음을 적은 기록)가 1751년 음력 윤 5월 29일 실록에 실려 있음을 연구자들이 밝혀냈다(실록을 찾아보니, 영조실록에 사천의 졸기가 실려 있다).

한성 우윤 이병연(李秉淵)이 졸(卒)하였다. 병연의 자(字)는 일원(一源)이며 한산(韓山) 사람이고, 호(號)는 사천(槎川)이다. 성품이 맑고 넓었으며, 어려서 김창흡(金昌翕)을 종유(從遊)하였다. 부(賦)와 시(詩)가 수만 수(首)인데, 그의 시는 강건하고 웅장하여 왕왕 옛것을 압도함이 있어, 세상에서 시를 배우려는 이들이 많은 본보기로 삼았다. 음사(蔭仕)로 벼슬길에 나와 아경(亞卿)에 이르렀다.

漢城右尹李秉淵卒 秉淵, 字一源, 韓山人, 號槎川 性淸曠, 少從金昌翕遊 賦詩數萬首, 其詩道健奇崛, 往往有逼古者, 世之爲詩學者, 多取則焉 從蔭仕, 至亞卿而止

 

청와대에서 바라본 인왕산.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 작 ‘인왕산’. 동쪽에서 본 시선이다. 

또 하나 찾아낸 것이 승정원일기에 이 해 5월 19일에서 25일까지 비가 내렸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인왕제색도 화제(畵題)에 辛未閏月下浣(1751년 신미년 윤5월 하순)이라 썼으니 사천의 졸기가 실린 29일보다 4일쯤 앞선 25일 비가 그친 후 그린 그림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막역한 사천을 위해 ‘비 그친 인왕산처럼 시원스레 병석에서 일어나라’는 염원을 담은 그림이라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그러다 보니 인왕제색도 우측 하단에 있는 집이 육상궁 뒷담 쪽에 있었다는 사천의 집 취록헌(翠麓軒)이라는 추론이 가능하고 취록헌에 집착하다보니 자연스레 취록헌을 바라볼 수 있는 지점을 인왕제색도를 그린 위치로 추정하고 있는 것 같다. 과연 이 추론은 타당한 것일까?

 

고미술 연구가 이ㅇㅇ 교수가 한산 이씨 세보(世譜)를 살펴보니 사천의 사망일은 1월 4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 실록에 졸기가 실린 날을 사망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올해 뜻밖에 청와대가 개방되자 필자는 인왕제색도를 들고 청와대와 북악산을 올랐다. 학창시절부터 청와대와 인왕산 사이에 자리한 학교에서 10대를 보낸 필자에게는 익숙한 인왕산의 모습이지만 열린 청와대에서 다시 보고 싶어서였다.

청와대와 북악산 기슭에서 바라본 인왕산은 인왕제색도 그림보다 훨씬 위쪽(동쪽)이 바라보인다. 그림에는 백련봉(기차바위) 위쪽이 앞 봉에 가려 살짝만 보이지만 청와대에서 바라본 인왕산은 기차 바위는 물론 북쪽 능선길인 탕춘대 가는 능선길이 훤히 보인다. 참고로 이 각도로 그린 겸재의 인왕산도를 보면 인왕제색도와 바라본 위치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그러면 인왕제색도는 어디에서 그린 것일까?

어떤 사건이 생기면 실마리는 현장에 있다 했으니 인왕제색도를 다시 한번 곰곰 살펴보자. 새로 열린 송현(松峴)공원에 미술관이 생겨 삼성가가 기부한 원본을 볼 수 있게 될 때까지는 도록에서 보는 아쉬움을 참을 수밖에.

 

겸재 작 ‘인왕제색’. 

그림에 위치별로 번호를 붙여 보았다. 1은 인왕산 정상이 있는 봉우리 즉 치마바위다. 2는 창의문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앞 봉 312봉이다. 1과 2 사이 잘룩한 안부(鞍部)에는 성벽이 확연히 보인다. 즉 이 그림은 이 두 봉 사이로 한양도성이 보이는 위치에서 그렸다는 말이다. 물론 청와대나, 북악산 남쪽 기슭, 칠궁 쪽에서는 이 성벽이 보이지 않는다. 312봉 뒤로는 기차 바위(번호 3 백련봉)이 성벽길 능선 너머로 삐죽이 보이고 그 앞쪽에는 공깃돌 같은 해골 모양 바위(겸재 그림 길 110 홍지문 참조)를 그려 놓았다.

지금도 한양도성 순성길에 오르면 312봉에는 기차 바위 갈림길 이정표가 있다. 번호 4는 석굴암 계곡 길이다. 지금도 석굴암 오르는 길로 사용되고 있다. 그림에서는 장마 뒤라 흰 물줄기가 시원스레 흐르고 있다. 5는 어느 집 옆에 있는 버드나무의 윗모습이다. 수양버들 가지가 칭칭 아래로 가지를 뻗었다. 번호 6은 이 집 별채인지 동네 정자인지 달랑 지붕 하나 보이고 번호 7엔 번듯한 ㄷ자(字) 집 지붕이 보인다. 기존의 연구자들이 사천 이병연의 집이라 한 집이다.

 

겸재 작 ‘인곡유거’.

다음 그림은 인곡유거(仁谷幽居)다. 초년 가난하던 유란동 집을 떠나 50이 넘어 마련한 인왕산 옥류동 아래 집을 마련한 겸재의 한없는 한가로움이 보인다. 번호 1은 인왕산 정상, 번호 2는 312봉, 번호 3은 기차바위, 그 위에는 예의 공깃돌만 한 해골 모양 바위도 보인다. 번호 5는 칭칭 늘어진 버드나무이다. 인왕제색도의 그 버드나무인지는 모르지만 그림의 각도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 나무는 줄기가 올라오다가 좌우로 Y자(字)로 갈라지고 갈라진 좌우 가지는 다시 각각 Y자로 갈라져 있다. 솟을대문은 전원을 꿈꾸는 주인의 마음인지 아직 초가로 덮여 있다.

다음 그림은 조선미술박물관 도록에 있는 인왕산(仁王山) 그림이다. 번호 2 312봉이 자리하고 뒤로는 번호 3 기차 바위가 있다. 인왕제색, 인왕유거와 같은 각도에서 그린 그림인 것이다. 번호 5 반가운 버드나무의 갈라진 Y자 모양이 참 낯익다, 번호 7은 위 그림에서도 본 그 집 지붕이다.

 

겸재 작 ‘인왕산’.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다음 그림은 수성구지(壽城舊址)다. 자수궁(慈壽宮) 옛터라는 말이다. 옥인동(군인)아파트 안내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자수궁 터(慈壽宮址): 자수궁은 조선 태조의 일곱째 아들 무안대군 방번이 살던 집이다. 문종 때 세종 후궁들의 거처로 삼은 이후 궁궐에서 나온 후궁들이 살았으며, 자수원이라고도 하였다.”

 

겸재 작 ‘수성구지’. 

겸재의 인왕산 집은 자수원 터에 있었다 한다. 겸재 자신의 집을 포함하여 주변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보면 번호 1은 인왕산 정상봉, 4는 석굴암 계곡, 5는 반가운 버드나무. 이 버드나무와 그림을 그린 각도는 인왕제색도를 어디에서 그렸는지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 번호 7은 바로 그 집이다. 솟을대문은 어느새 기와로 바뀌어 있다. 집은 ㄱ자(字) 집이다. 인왕제색도에 보이던 집은 분명 ㄷ자 집이었다.

다음 그림을 보자. 만년 겸재가 자신의 집을 그린 인곡정사(仁谷精舍). 집만 그려서 주변은 알 수 없으나 솟을대문에 반듯한 ㄷ자 집이다. 초가의 솟을대문 집을 거치고, ㄱ자 집을 거쳐 번듯한 ㄷ자 집까지 증개축을 해 온 것인가?

 

겸재 작 ‘인곡정사’. 

이제 겸재의 인곡정사가 있었던 곳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 인왕산을 바라본다. 위에 보아온 그림들과 시선이 겹친다. 이 연장선상은 경복궁이다. 참고로 경회루에서 바라본 인왕산 모습도 인왕제색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옛 경기고등학교가 있었던 정독도서관 앞마당에는 인왕제색도를 기념하는 조형물이 있다. 90년대에 문화부가 세운 것인데 겸재와 연고도 그렇고 그림의 각도도 잘 맞지 않는다. 혹시 이곳을 찾는 이들이 이곳이 인왕제색도를 그린 장소로 여길까 걱정도 된다. 다시 주제로 돌아오면 겸재는 자신의 집이 있던 자수궁 옛터에서 위의 그림들을 그렸을 것이다. Y자로 갈라진 버드나무와 기차 바위 위 공깃돌 같은 바위를 살려 가면서.

 

정독도서관 조형물에 새겨넣어진 ‘인왕제색’.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어렵게 살아오다가 안정이 되고 눈 익은 인왕산의 모습을 그리다가, 이제는 부러울 것 없는 자신의 삶을 인왕산을 통해 당당히 그린 것이 인왕제색도 아닐까? 더욱이 이 그림은 팔지 않고 손자에게로 이어졌으니 분명 여느 그림과는 다른 겸재의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2. 사인암(舍人岩) 도(圖)는 어느 폭포를 그린 것일까?

겸재의 그림 중 사인암(舍人岩)을 그린 것은 두 점이 전해진다. 하나는 단양의 사인암이며, 다른 하나는 알 수 없는 곳의 폭포를 그린 사인암(舍人岩)이다. 필자는 이미 이 두 사인암에 대해 썼다. 오늘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사인암(겸재 그림 길 85)에 대해 다시 요약 글을 쓰려고 한다.

 

해악전신첩에 실린 ‘사인암’.

이 그림은 겸재 나이 72세, 1747년(영조 23년) 두 번째 그린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속 그림이다. 겸재는 해악전신첩이라는 이름으로 그림첩을 두번 그렸는데 첫 번째 그림첩은 1712년 30점의 그림을 그린 해악전신첩이다. 이 첫 번째 해악전신첩이 일실되었기에 겸재는 9점의 그림은 제외하고 21점의 그림을 다시 그려 동일한 해악전신첩을 만들었다.

이 그림첩 속 21점의 그림을 분류하면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으로 나눌 수 있다. 이렇게 분류하면 남북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그림첩이 된다. 갈 수 있는 곳은 옛 영평, 철원, 평강, 김화 남쪽 지역으로 이제껏 글을 써온 화적연, 삼부연, 화강백전, 정자연이 있다. 갈 수 없는 곳은 금강산 지역(금강산 초입, 내금강, 외금강)이다. 일단은 금강산 길이 열릴 때까지 유예해 둔다. 그런데 21점의 그림 중 아쉽게도 갈 수 있는 곳인지 아닌지 몰라서 못 가는 그림이 한 점 남는다. 그 그림이 사인암(舍人岩)이다. 정리하면,

△갈 수 있는 곳: <화적연禾積淵>, <삼부연三釜淵>, <화강백전花江栢田>, <정자연亭子淵>,

△갈 수 없는 곳: <피금정>, <단발령망금강산>, <장안사 비홍교長安寺飛虹橋>, <정양사正陽寺>, <만폭동萬瀑洞>, <금강내산金剛內山>, <불정대>, <문암門巖>, <해산정>, <사선정(삼일호)>, <문암관일출>, <총석정>, <시중대>, <용공동구龍貢洞口>, <당포관어唐浦觀漁>, <칠성암七星岩>

△모르는 곳: <사인암舍人岩>

여기에서 사인암이라는 제목의 그림은 바위와 폭포를 그렸다. 어디를 그린 것인지, 왜 폭포가 중심이 된 그림에 바위 이름을 붙였는지 궁금할 뿐이다. 이제부터 소설을 쓰는 기분으로 비약과 추리를 해보려 한다.

1712년 그림첩이 완성되자 겸재로부터 화첩을 넘겨받은 사천 이병연은 자신은 물론 삼연 김창흡에게도 제발(題跋)을 의뢰하였다. 삼연집에 실린 ‘제이일원해악도후(題李一源海嶽圖後)’ 글은 이 30점 그림의 내용을 제발과 함께 전하고 있다. 일원(一源)은 이병연의 자(字)이며 사천은 호(號)이기에 일원이라 썼다. 의미는 “이일원의 해악도(海嶽圖) 뒤에 붙여” 이렇게 쓴 글이다.

舍人巖
谷雲釜淵之側. 自謂杖鞋殆遍. 而猶漏此境耶. 窈然煙霞之窟中. 作雷雪久矣. 猶存舍人之號. 發其慳而摸其勝. 今之康樂. 在花江矣.

곡운과 삼부연 주변은 지팡이 짚고 짚신 신고 거의 다 다녔다고 말해 왔는데 여전히 이런 경치 놓쳤단 말인가. 아련한 연하 굴 중에 우레와 눈발 같은 물보라인지 오래구나. 오히려 사인이란 이름이 감춘 것 들어내고 빼어남을 모색하니 지금의 안락함은 김화에 있구려.

삼연은 곡운(지금의 화천 사창리 주변)과 삼부연(철원 삼부연) 주변에서 이미 거처했었기에 모르는 명승이 없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글을 쓴 것은 사인암이 금강산 주변이 아니라 이 지역을 그렸다는 뜻이다. 그런데 자신이 모르는 저런 폭포가 있었으니 위와 같은 글을 쓴 것이다. 사인암이라는 제목으로 그린 폭포는 화천, 철원(김화) 지역 폭포를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다.

첫 번째 화첩은 남아 있지 않지만 두 번째 화첩은 이 30점 중 21점을 그린 것이니 같은 그림본의 그림일 것이다. 필자는 화천, 철원, 김화 지역 폭포를 찾아다녔다. 그 결과 가강 근접하는 폭포를 찾았는데 김화 복계산의 매월대폭포였다.

매월대에는 계유정란에 세상을 등진 사람들 이야기가 전해진다. 세조의 왕위찬탈로 도(道)가 땅에 떨어지자 세상과 벼슬을 버리고 김화 사곡마을(지금의 매월대 아랫동네)로 들어온 이들이 있었다. 병조판서를 지낸 박계손(朴季孫) 등 영해 박씨 일가, 집현전 부재학 조상치, 게다가 매월당 김시습도 이곳으로 들어왔다 한다. 인간세상(人間世上)을 버린(舍) 사람들이 머문 곳인 셈이다. 사인(舍人)이란 고려, 조선 초 벼슬 이름이지만 겸재는 글자의 뜻을 살려 ‘인간 세상을 버린’이란 뜻으로 사인(舍人)이라 한 것은 아닐까, 소설을 써 본다.

 

필자가 답사한 폭포 중 ‘사인암’과 가장 비슷한 매월대 폭포.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마을 뒤 산줄기 복계산이 마을로 내려오는 능선길에는 바위들이 우뚝한 곳이 있는데 창암(蒼岩), 선암(仙岩)이라 부르며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던 곳이라 하여 매월대(梅月臺)라고 한다. 그 아래 골짜기의 폭포는 매월대 폭포, 또는 선암폭포(仙岩瀑布)라 한다. 겸재의 사인암도를 연상케 하는 폭포다.

 

매월대 창암.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사천은 이곳 매월대에서 시 한 수 남겼다. 사천시초에 전해진다.

천년 쓸쓸한 곳 찾아갔더니 幽獨訪千載
옛사람 살던 터전만 있네 古人多草萊
고요히 흐르는 물구비에는 蕭條流水曲
마음 닦던 열경대(매월대) 있고 蕪沒悅卿㙜
해 지니 두견 울음 소리만 日落杜鵑哭
산은 깊고 송백은 애닲구나 山深松栢哀
처량히 고사리 캐던 곡조인데 凄凉採薇曲
그 곡조 끝나고 다시 배회라 歌罷更徘徊

매월대에 와서 매월당을 생각하며 쓴 시다. 겸재와 함께 왔던 것일까?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