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고의 진화④] LP바의 부활과 주류업계 복고 열풍은 무슨 관계?

하이트진로, 오비맥주 등 주류업계 몇 년 새 레트로 제품 잇달아 출시… 최근 LP 인기 힘입어 LP바도 계속 새롭게 변신

김응구 기자 2023.03.06 10:01:35

레트로 술, 레트로 술집, 하면 떠오르는 건 LP 그리고 LP바다. 오래 묵은 추억을 소환하는 아주 좋은 도구이기 때문이다. 사진=김응구 기자

언제부턴가 레트로(retro·복고) 움직임에 술집도 가세하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술과 음식 외에 추억까지 팔 수 있는 곳이니.

대폿집을 대표하는 드럼통은 오래된 복고 이미지다. 최근엔 분위기마저 1960~70년대를 쏙 빼닮은 술집도 속속 들어서고 있다. 메뉴판 역시 그 시절로 돌아가 있다. 프랜차이즈 대표가 프로야구 ‘OB베어스’의 열혈팬인지는 몰라도 홀 구석구석에 곰 캐릭터를 덕지덕지 붙여놓은 맥줏집도 한창 인기를 끌었다. 그런가 하면 몇 해 전에는 경성(京城)시대 콘셉트의 경양식 술집도 생겼다.

복고든 그 복고가 진화했든, 옛 시대의 우리와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고 재미난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즘의 복고 술집은 복고 술을 만나며 더욱 바빠졌다. 요 몇 년 국내 주류업계는 과거의 추억을 소환하는 디자인을 앞다퉈 선보였다. 그에 부응하듯 소비자들은 열렬히 환호하며 이 술들을 반겼다.

레트로, 복고는 때마다 아주 잘 먹히는 마케팅이다. 잊을 만하면 또 한 번 소개하고, 완전히 잊혔다 싶으면 어느샌가 바짝 다가와 있다. 누구나 추억을 먹고 살고, 복고는 시대를 관통한다. 이 얼마나 좋은 마케팅 도구인가.

최근의 LP바는 계속 진화 중이다. 디제이가 신청곡을 들려주는 것에서 손님이 직접 음반을 골라 자리에서 듣는 시대가 됐다. 사진은 경기도 수원의 한 LP바. 사진=김응구 기자

레트로 술집, 하면 떠오르는 ‘복고의 상징’ LP바

복고 그리고 술‧술집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소품이 하나 있다. LP다. 영어인 ‘롱 플레잉 레코드(Long-Playing Record)’를 줄여 쓴 단어다. ‘LP판’, ‘레코드판’으로 주로 불렀다. 요즘엔 바이닐(Vinyl)이라고 한다.

턴테이블 카트리지를 LP에 올려놓을 때의 간지러움, ‘치직, 치직’ 타들어 가며 조용히 시작하는 첫 곡, 저음의 베이스에 따라 퉁 퉁 튀는 앰프, 이 같은 아날로그 감성은 LP를 영원한 복고로 만든다.

몇 년 전만 해도 LP바는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에는 간단한 검색만으로도 별 어렵지 않게 찾는다. 그런 LP바도 진화한다. 젊은 세대가 찾기 시작하니 바뀌지 않을 수 없다.

2월 22일 저녁 8시, 서울 종로구 통인동의 LP바 ‘밥딜런 & The Band’. 서촌의 유명 해산물가게 위층의 이곳은 LP 가짓수나 앰프 등이 다른 곳과 비교해 확실히 비교 우위다. 근처 직장인들이 주로 찾지만, 소문이 많이 번진 탓인지 지금은 먼 곳 손님도 적잖다.

손님의 취향만큼 신청곡도 다양하다. 상호나 분위기가 그렇듯 록 사운드가 주를 이루지만 가요나 팝송도 비교적 자주 들린다. 이곳은 대개 즐기기 위해 찾는다. 술을 적게 마셨든 많이 마셨든, 이곳에선 유명한 곡이 흘러나오면 모두 하나가 된다. 몇몇은 옆 테이블 손님과 어깨동무하며 목청이 찢어질 듯 노래 부른다. 괴성이 끝나면 서로 자신의 잔을 들고 건배하거나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는다. 처음 겪는 일이어도 잠깐만 당황할 뿐, 금세 무리 속에 녹아든다. 그리고 후련해진다.

서울 연남동의 ‘신군신양’도 LP바로 알려질 만큼 알려졌다. 2월 24일 저녁 7시 반. 앞서 통인동의 그곳보단 훨씬 밝은 분위기다. 아무래도 지역 특성상 젊은 층이 많다 보니 분위기가 밝은 편이다. 소품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많이 쓴 듯 보인다. LP 수 역시 다른 곳 못지않다.

1980년대 한창 활동했던, 아는 사람만 아는 영국 밴드 ‘아웃필드(The Outfield)’의 ‘얼론 위드 유(Alone with you)’를 신청했다. 디제이 겸 사장은 “이 곡을 신청한 사람이 그간 한 명도 없었다”며 신기해했다. 찾는 고객 연령층이 어떠냐고 물으니 아무래도 젊은 사람이 많다고 했다. 대개 병맥주를 들고 있지만 둘러보니 와인을 즐기는 테이블도 몇 보인다.

밥딜런은 어둡지만 LP바의 존재 이유인 음악에 충실하다. 거기서 한 차례 진화한 신군신양 역시 음악에 진심이지만 젊은 고객을 위해 밝음과 차분함을 더했다. 그렇듯 시대와 고객에 따라 LP바도 진화한다. 최근에는 한 차례 더 진화했다. 서울 을지로의 ‘뮤직 콤플렉스 서울’이 좋은 예다.

이곳은 아예 테이블마다 턴테이블과 헤드셋을 올려놓았다. 한쪽 벽을 가득 메운 LP 중에서 내가 원하는 음반을 고른 후 자리로 돌아와 듣기만 하면 된다. 주로 찾는 고객은 아이러니하게도 20~30대. 턴테이블이나 LP와 친숙하지 않은 세대다. 그러나 최근의 LP 붐을 이끄는 주인공들인 만큼 이처럼 핫한 공간을 그냥 내버려 둘 리 만무다.

지난해 5월 인사동에 문을 열자마자 인기는 금세 퍼졌다. 지금은 최소 30분에서 한 시간, 길면 두세 시간의 기다림은 감수해야 한다. 맥주나 커피의 가격이 깨나 센 편인데, 바 이용료임을 고려하면 납득할 만한 수준이다.

이제 LP바도 참여형이 됐다. 디제이가 신청곡을 받아 틀어주는 게 아니라 손님이 직접 음악을 골라 스스로 듣는다. 그렇게 LP바 그리고 술문화는 또 한 번 변신 중이다.

LP의 매력은 아날로그 감성이다. LP의 질감부터 듣는 행위에 이르기까지 아날로그를 욕심내는 이들로 인해 LP와 LP바는 꾸준히 소비되고 있다. 사진=김응구 기자

몇 년 새 앞다퉈 복고 디자인 선보인 소주업계

그럼, 술은 안 변할까? 그럴 리 없다. 최근 열기가 좀 식은 듯 보이지만 요 몇 년 새 국내 주류업계도 복고 열풍에 휩싸였다. 서울술, 부산술, 광주술 가릴 것 없이 저마다 복고 감성을 내세우며 경쟁하듯 제품을 내놓았다.

전국에 퍼져있는 지역 소주들, 그러니까 ‘진로’, ‘무학’, ‘대선’, ‘보해’ 등 유명 소주들은 모두 복고 소주 하나 정도는 출시했다.

가장 많은 화제를 모았던 건 하이트진로가 2019년 4월 내놓은 ‘진로(眞露)’다. ‘진로 이즈 백’이라고도 부른다. 당시 빠르게 퍼진 ‘뉴트로’(new+retro) 트렌드를 반영해 소비자층을 더욱 넓히겠다며 시장에 도전장을 냈다. 특히, 오래전 감성을 새롭거나 흥미로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20대를 주요 대상으로 설정해, 젊고 트렌디한 이미지를 강화하겠다는 전략도 내비쳤다. 이에 따라 알코올도수도 저도주(低度酒)에 맞춘 16.9도로 개발했다.

병 모양이나 색깔, 라벨을 보면 옛날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과거 디자인을 그대로 복원해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하이트진로는 지난 1월 19일 제로 슈거 콘셉트로 리뉴얼한 ‘진로(眞露)’를 출시했다. 사진=하이트진로

하이트진로는 이 소주를 개발할 당시 소비자와 내외부 전문가를 대상으로 수차례에 걸쳐 연구조사를 진행했다. 이에 따라 선호도가 가장 높았던 1970~80년대 블루톤의 진로 라벨 디자인을 전면에 내세웠다. 소주병 색상은 기존 제품과 달리 투명한 스카이블루를 적용해 새롭고 순한 느낌을 줬다. 라벨에는 한자로 쓴 ‘眞露’와 브랜드를 상징하는 두꺼비 디자인을 재현해 넣었다. 그 밑에는 작은 글씨의 한글도 함께 표기해 가독성을 높였다. 병뚜껑은 과거와 같은 블루톤 색상이지만 트위스트 캡으로 편의성을 높였다.

한편, 하이트진로는 헬시플레저(Healthy Pleasure) 등 최근의 트렌드에 발맞춰 제로 슈거(zero sugar) 콘셉트로 리뉴얼한 진로를 1월 9일 출시했다. 알코올도수는 기존보다 0.5도 낮춘 16.0도로 정했다. 2월 14일에는 봄을 앞두고 핑크 라벨의 제로 슈거 진로를 한정 출시하기도 했다. 라벨 위쪽 핑크 두꺼비에는 리본을 달아 아기자기한 맛도 냈다.

하이트진로는 1955년부터 두꺼비를 진로의 상징으로 활용해왔다. 2020년부터는 파란 두꺼비와 함께 핑크 두꺼비가 활약하며 TV 광고나 SNS(사회관계망서비스), 굿즈 등으로 팬층을 넓히고 있다.

지방 소주업체들도 제각각 복고 트렌드 따라

역시 2019년 10월에는 부산의 대선주조가 뉴트로 열풍에 합류했다. 소주 ‘대선’의 라벨 디자인을 리뉴얼해 새로 출시했다.

새 옷을 입은 대선의 라벨은 한글‧한자 버전 두 가지로 내놓았다. 한글 버전은 기존과 같이 한글로 ‘대선’을 크게 표기했고, 상단에는 ‘大鮮酒造 株式會社(대선주조 주식회사)’를 작게 넣어 옛 감성을 녹여냈다.

한자 버전은 1965년 첫 출시 당시의 한자 필기체를 살려 뉴트로적인 해석을 더했다. 더불어 한글과 한자 두 라벨 모두 하단에 파도를 상징하는 물결 디자인을 넣어 과거부터 이어 온 고유의 개성을 담았다.

대선주조는 2019년 10월 ‘대선’의 라벨을 한글과 한자 버전으로 리뉴얼해 출시했다. 사진=대선주조

사실 대선주조는 국내 주류업계의 뉴트로 열풍을 이끈 기업이다. 1970년대 부산 등에서 엄청난 인기였던 대선을 2017년 1월 부활시켰다. 잠깐의 이벤트로 이목을 확 잡아끌려는 목적의 한정판이 아닌 정규 상품으로 출시해 소비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소비자와 애주가의 호응이 이어지면서, ‘추억 보정’이 심하게 들어간 50~60대 소비자들은 오래전 됫병 사이즈의 소주까지 판매해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부응하듯 대선주조는 4홉들이 소주를 부활시켜 700㎖ 용량을 내놓기까지 했다.

경남기업 무학도 가만있지 않았다. 창립 91주년을 맞은 2020년 2월 뉴트로 열풍에 맞춘 ‘완전히 새로운 브라보 청춘!’ 리뉴얼 제품을 출시했다.

소주병 색상은 투명하고 시원한 느낌의 하늘색을 그대로 유지했지만, 경쟁사와 확연히 차별화하고자 병뚜껑 색깔을 빨갛게 했다. 라벨 밑부분에 청색으로 쓴 ‘MUHAK’과 빨간색 바탕의 ‘청춘’ 글자가 조금은 투박해 보여도 복고를 표현한 장치임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온다.

보해양조는 2014년 1월 복고 감성의 ‘잎새주’ 한정판을 내놓았다. 사진=보해양조

사실 주류업계에서 복고를 논할 때면 보해양조의 ‘잎새주’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미 2014년 1월 복고 감성을 듬뿍 담은 ‘잎새주’ 한정판을 내놓으면서 애주가들의 옛 감성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잎새주 출시 12주년을 기념해 선보인 이 소주는 1970~80년대풍의 라벨을 제품 전‧후면에 부착하고, 그 안에는 투박한 글씨체로 새긴 제품 이름과 강렬한 원색으로 가득 채웠다.

올해로 창립 50주년을 맞은 맥키스컴퍼니는 3월 2일 국내 최저 알코올도수‧칼로리 소주를 표방한 ‘선양(鮮洋)’을 출시했다. 선양은 맥키스컴퍼니의 옛 사명(社名)이다. 같은 날 대전광역시 신세계백화점에 마련한 팝업스토어에는 2030세대부터 중·장년층까지 여러 애주가가 모여들어 문전성시를 이뤘다.

핵심은 최저 도수인 14.9도와 최저 칼로리(360㎖ 기준 298㎉) 그리고 제로 슈거 소주라는 점이지만, 병 모양 등을 뉴트로풍으로 재현해낸 것에 관심이 더욱 쏠렸다. 이 제품은 기존 소주병과 달리 짧고 둥글둥글한 디자인이다. 더구나 소주업계에선 유일하게 크라운 캡을 적용해, 병뚜껑을 병따개로 따도록 한 점도 특이하다.

맥키스컴퍼니 관계자는 “창립 50주년을 맞아 소주의 본질적인 가치는 유지하고, 그 외 모든 것을 완전히 바꿔 국내 소주시장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선양을 출시하게 됐다”고 말했다.

오비맥주는 2019년 9월 뉴트로 맥주인 ‘OB라거’를 출시했다. 사진=오비맥주

맥주업계의 복고, 한국 초창기 역사에 가까이 


맥주업계도 레트로 바람에 편승했다. 오비맥주와 하이트진로는 일찌감치 옛 분위기 물씬 풍기는 아이템을 선보였다.

레트로 맥주를 알려면 우리나라 맥주 역사에 대해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한다. 1933년 대일본맥주주식회사는 지금의 영등포구에 조선맥주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해 12월에는 쇼와기린맥주가 역시 영등포에 설립됐다. 조선맥주는 하이트맥주, 쇼와기린맥주는 오비맥주의 전신(前身)이다.

먼저, 오비맥주는 2019년 9월 뉴트로 맥주인 ‘OB라거’를 출시했다. 1952년 처음 세상에 나와 한 시대를 풍미했던 ‘OB’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제품이다. 중년 소비자층에겐 향수를, 20대 밀레니얼 세대에겐 흥미와 즐거움을 주고자 기획했다.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어도 곰 캐릭터 ‘랄라베어’ 정도는 안다. 동네 호프집 간판이나 프로야구 ‘OB베어스’를 추억하는 이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OB라거는 이 캐릭터와 복고풍 글씨체를 제품 전면에 내세우며 대놓고 레트로 제품임을 알리고 있다.

오비맥주 브랜드 매니저는 “OB 브랜드에 대한 아련한 기억과 감성을 젊고 트렌디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말했다.

‘랄라베어’는 2021년 영국의 유명 매거진 ‘모노클’이 선정한 ‘디자인 어워즈 톱 50’에서 ‘최고의 마스코트 상(Best Mascot)’을 수상하기도 했다. 옛 마스코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은 물론, OB라거의 브랜드 리뉴얼을 성공적으로 이끈 점을 인정받았다.

하이트진로는 지난해 5월 BGF리테일과 협업해 만든 ‘크라운맥주’를 선보였다. 사진=하이트진로

하이트진로는 지난해 5월 25일 BGF리테일과 협업해 만든 ‘크라운맥주’ 캔을 출시, 편의점 CU에서 단독 판매했다. 하이트진로의 유일한 에일(ale) 타입 맥주다.

조선맥주는 1952년 ‘크라운맥주’를 처음 출시했다. 하이트진로가 선보인 크라운맥주는 그 당시의 추억을 상당 부분 가져와 만든 제품이다. 크라운맥주의 상징인 왕관을 활용해 현대적으로 디자인한 패키지가 그래서 낯설지 않다. 촌스러운 ‘후리미엄맥주’와 ‘오리지날에일’이라는 글자도 옛날 느낌을 그대로 가져왔다.

레트로의 사전적 의미로 복고 말고도 재유행이 있다. 그렇다. 복고는 돌고 돈다.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러니 이 감성이 지나간다고 허탈해하지 마길. 언젠가 또 올 테니.

 

<문화경제 김응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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