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현장] 포스코미술관에 펼쳐진 ‘한지’ 예술의 장

안치용 한지장 필두로 박송희·소동호 작가까지 소개

김금영 기자 2026.01.21 09:55:16

포스코미술관 입구. 사진=김금영 기자

멀리서 볼 땐 마치 한 폭의 추상화 같았다. 언뜻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풍경화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정체는 ‘한지’다. 포스코미술관이 한지를 중심으로 다채로운 예술의 세계를 소개하는 ‘한지 스펙트럼’전을 선보였다.

오랜 시간 우리 문화의 역사 속 살아온 한지에 집중

모네의 '수련' 그림을 연상케하는 한지 작업들이 설치돼 있다. 사진=김금영 기자

포스코미술관은 포스코홀딩스가 추구하는 배려와 공존, 공생의 가치를 예술을 매개로 나누고 실천하는 포스코그룹의 아트플랫폼이다. 1995년 포스코갤러리로 개관, 1998년 문화체육관광부에 제1종 미술관으로 정식 등록한 이래 기업 미술관으로 꾸준히 운영돼왔다. 대표적인 활동으로 ‘신진작가공모전’(2014~2020)과 ‘중진작가 초대전: 하태임, 강박적 아름다움에 관하여’(2024) 등이 있으며, 다양한 전시해설 프로그램 등도 운영해왔다.

그룹의 중심에 ‘철강’이 있기에 관련 전시도 선보였다. 실제로 ‘제철비경-위대한 순간의 기록’전 등을 기획해 선보이며 그룹의 역사를 짚기도 했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미술관은 경계와 장르를 한정짓지 않고 폭넓게 다뤄왔다. 고미술 또한 그렇다.

한지의 알록달록한 색감과 독특한 무늬가 눈길을 끈다. 사진=김금영 기자

전시를 기획한 강정하 포스코미술관 선임 큐레이터는 “다양한 예술 장르를 아우르며 사람들과 소통해왔다. 이번 전시 이전에도 조선서화를 중심으로 한 고미술 전시를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돌아봤다. 미술관에서 선보인 열 번째 고미술 전시이기도 했다”며 “이번엔 오랜 시간 우리 문화의 역사 속에 살아 숨쉬어온 한지에 집중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안치용 한지장(韓紙匠·전통한지를 제작하는 장인)을 필두로 구성됐다. 그는 지난해 5월 ‘글로벌 볼런티어 위크’ 당시에도 지역 초등학생들이 함께 한지를 만들어 태극기를 그리는 봉사활동을 진행하는 등 포스코그룹과 꾸준히 인연을 맺어왔다.

다양한 한지가 설치된 모습. 사진=김금영 기자

안 한지장은 국내에 단 4명뿐인 국가무형유산 한지장 중 1명으로, 3대째 한지를 만들어 왔다. 유년 시절부터 그의 일상과 놀이는 모두 한지 제작과 맞닿아 있었다고 한다. 23살 아버지의 한지 공방을 물려받으며 본격적인 장인의 길로 들어섰고, 이후 중요무형문화재 고(故) 류행영 한지장의 기술을 사사하며, 한국 전통지 중 가장 얇고 정교한 ‘옥춘지’를 만들 수 있는 고난도 기술까지 습득했다.

한지, 단순 종이가 아닌 작품으로

한지의 주재료인 닥나무와 작가가 직접 쓰는 작업 도구 등도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다. 사진=김금영 기자

이번 전시는 안 한지장의 다양한 한지 작업과 더불어, 한지가 탄생되는 과정, 재료까지 두루 살펴볼 수 있도록 꾸며졌다. 특히 단순히 정통을 계승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가 보여주는 ‘한지의 다양성’과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한다.

실제로 첫 시작부터 봄을 연상케 하는 알록달록한 한지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캔버스 위에 천연염색한 한지를 붙여 서양화를 보는 듯도 했다.

다양한 크기의 액자에 배치된 한지들. 사진=김금영 기자

강 큐레이터는 “우리는 일반적으로 한지라 하면 어린 시절 서예 시간에 사용했던 하얀 화선지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전시를 준비하면서 충북 괴산의 안 한지장 작업 공간에 갔을 때 ‘이게 한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색감, 형태가 다양했다. 쌓여 있는 한지 하나하나가 모두 작품이었다”며 “이처럼 한지의 다양한 예술적 면모를 살펴보고, 고정된 인식을 깨보고자 전시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공간에서는 한지가 하늘부터 지상까지 너풀너풀 내려오는 듯 작품을 배치해 놓았다. 마치 한지의 숲 사이를 거니는 느낌이었다. 방울이 맺혀있는 듯 독특한 무늬도 눈에 띄었다. 강 큐레이터는 “동글동글한 무늬는 작가가 한지를 자연 건조할 때 갑자기 비가 내렸는데, 빗방울 흔적의 결과물”이라며 “자연스럽게 생긴 이 형태에 영감을 받은 안 한지장은 이후 샤워기를 한지에 뿌리는 등 여러 방법으로 의외성을 불어넣는 작업도 이어오고 있다. 자연스러운 번짐이 피어난 화면은 마치 우주의 별들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안치용 한지장이 괴산에서 운영하고 있는 한지박물관의 소장품들 일부. 사진=김금영 기자

이어지는 공간엔 안 한지장의 터전인 괴산을 엿볼 수 있는 영상과, 실제로 현장에서 공수해온 한지 재료, 도구들을 배치해 놓았다. 강 큐레이터는 “안 한지장은 한지를 만들기 위해 주재료인 닥나무를 직접 키운다. 닥나무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좋은 토양과 일정한 온도의 물이 필요한데, 괴산이 이 자연조건을 잘 갖췄다고 한다”며 “닥나무뿐 아니라 황촉규(닥풀)도 직접 재배하며 자연과 재료, 공정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전통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다양한 크기의 액자에 배치된 한지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강 큐레이터는 “일반적으로 한지는 외발틀 사이즈에 맞춰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선 다양한 크기의 한지들을 만나볼 수 있게 구성했다”며 “작품 구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크기 또한 고려 사항 중 하나인데 이에 대한 부담 없이, 일상생활 속 자연스럽게 한지에 접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직접 한지의 질감을 만져볼 수 있는 공간. 사진=김금영 기자

안 한지장이 괴산에서 운영하고 있는 한지박물관의 소장품들 일부도 볼 수 있다. 한지로 만들어진 소반, 항아리, 인형, 부채 등이다. 강 큐레이터는 “한지는 우리 생각보다 질기고 단단해서 섬유, 도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된다”며 “얇아서 잘 찢어질 것 같지만, 꼬아서 실처럼 만들거나 옻칠, 기름칠 등을 하면 질감이 단단해져 사용할 수 있는 분야가 무궁무진하다”고 설명했다.

한지의 매력을 더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됐다. 직접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한지들을 벽에 걸어놓은 것. 아주 얇은 것부터 생각보다 두껍고 질긴 한지까지 다양한 질감을 느낄 수 있다. 한지로 만든 날개 오브제를 등에 달고 추억을 남길 수 있는 깜짝 포토존도 마련돼 눈길을 끈다.

안치용 한지장과 박송희·소동호 작가의 새 시도

소동호 작가의 '오리가미 연작'. 사진=김금영 기자

또 이번 전시가 특별한 건 안 한지장과 젊은 예술가들의 교차점이라는 점에서다. 안 한지장의 한지를 박송희·소동호 작가가 자신들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현대적 오브제를 선보인다. 먼저 1983년생인 소동호 작가는 2009년 한지를 손으로 접는 단순하면서도 정교한 반복 행위를 바탕으로 한 ‘오리가미 연작’을 통해 한지와 연을 맺어왔다. 이후 2011년 본격적으로 작업의 주재료를 한지로 전환했고, 이후 안 한지장과 교류하며 조형 실험의 폭을 넓혀왔다.

이번 협업에서도 새로운 시도는 이어진다. 오리가미 연작을 통해 조명을 기능적 대상이 아닌 ‘빛 조각’으로 제시하며 빛과 형태가 공간과 관계 맺는 방식을 색다른 시각으로 풀어낸다. 특히 빛 조각으로 환하게 밝혀진 공간, 그리고 반대로 어둠 속 마치 달 항아리처럼 빛을 발하는 조각을 통해 각각을 색다른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마치 달 항아리처럼 보이는 소동호 작가의 작품. 사진=김금영 기자

강 큐레이터는 “소동호 작가는 기존 한지로는 원하는 형태를 만들기 쉽지 않았다고 한다. 시중의 한지는 크기와 두께 등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하지만 안 한지장이 작업에 맞는 두께와 크기의 한지를 제작해 주며 마음껏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었다. 현대 예술품으로 태어난 종이조명을 이번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다”고 말했다.

1985년생인 박송희 작가는 재작년 괴산에서 진행된 청년작가 지원 작업을 통해 안 한지장과 인연을 맺었다. 박 작가는 전통 회화, 일상적인 사물, 자연 이미지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시각적 풍경을 구축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박송희 작가의 '이해관계' 작품. 사진=김금영 기자

이번 전시에서는 한지를 전시 공간에 구름처럼 흩뿌린 듯한 ‘이해관계’ 작품을 선보였다. 전시 공간을 부유하듯 떠 있는 나뭇잎과 반복된 ‘人(사람 인)’자의 중첩이 인간관계, 서로에게 기대고 얽힌 모습을 상징하는 작업이다.

강 큐레이터는 “박송희 작가가 이 작업을 준비하던 중 안 한지장을 만나 전통 한지를 사용하게 됐다. 왜 한지를 사용했는지 물어보니 ‘한지가 마치 천 같다’고 답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한지가 종이에만 국한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느꼈다. 이 작업을 통해 한지의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박송희 작가가 한지를 활용해 책가도를 구현했다. 사진=김금영 기자

또 다른 한켠엔 옛 책가도를 벽에 한가득 구현해 놓았는데, 이 또한 한지를 사용했다. 강 큐레이터는 “전 세계적으로 K팝, K푸드, K드라마 등 한국 고유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이에 따라 한지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며 “박송희 작가는 한지를 활용한 작업으로 해외에서도 여러 전시를 열고 있다. 작가 또한 과거와 비교해 높아진 관심을 체감한다고 한다”고 말했다.

안 한지장은 후배 작가들과 함께한 뜻 깊은 소감을 전했다. 그는 전시 도록 인사글을 통해 “젊은 예술가들의 시도를 곁에서 함께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일은 늘 내게 큰 즐거움”이라고 했다.

이어 “소동호 작가와 각자의 방식으로 작업하던 우리는 함께하며 새로운 시도를 통해 한지의 쓰임을 발견했다. 소동호 작가와의 협업으로, 과거의 일상 속 종이조명은 현대의 예술품으로 되살아나 삶의 공간에 자리한다”며 “박송희 작가는 한지가 지닌 숨결을 더 섬세하게 드러낸다. 이는 한지가 담아낼 수 있는 이야기의 폭을 한층 넓혀주는 뜻 깊은 경험”이라고 전했다.

한지 건조기 지원으로 ‘지원의 선순환’도 이뤄

안치용 한지장은 포스코그룹으로부터 건조기를 지원받아 이번 전시를 준비할 수 있었다. 사진은 인터뷰 영상. 사진=김금영 기자

한지의 여러 가능성을 탐색함과 동시에 이번 전시는 ‘지원의 선순환’의 장이라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포스코 철강제품을 활용해 전통문화의 맥을 이어가기 위한 실질적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예술을 통해 ‘세상에 가치를 더하다’라는 그룹 브랜드 슬로건을 실천하는 장이다.

포스코미술관은 관람객이 도록과 기념품을 구매해 모인 수익금을 포스코1%나눔재단에 기부했다. 이는 포스코 스테인리스 강재를 활용힌 ‘맞춤형 한지 건조기’ 제작으로 이어졌다. 안 한지장은 작업 진행 시 노후화된 기계와 환경 등으로 인해 한지를 건조하는 공정에서 어려움을 겪어왔는데, 이 건조기를 지원받아 작업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작업은 또 이번 전시로 이어져 관람객과 조우할 수 있었다.

전시장에선 안 한지장이 건조기를 활용하는 모습 및 인터뷰 영상도 볼 수 있다. 안 한지장은 “포스코그룹의 건조기 지원은 단순한 물품 후원을 넘어, 한지 문화가 대를 이어 전승될 수 있는 든든한 토대를 마련해준 것”이라며, “젊은 감각과의 협업을 통해 한지가 우리 일상의 예술로 다시금 자리 잡길 기대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강 큐레이터는 “요즘 K팝, K드라마 등이 인기인데 한지야말로 주목해야할 대표적인 K예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산업화 이후 한지의 일상 쓰임이 많이 줄어들며 잊힌 시기도 있었으나, 한지는 전통 기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염색기법을 활용한 색한지, 빛과 질감을 활용한 입체문양한지 등 다양한 변모를 거치며 우리의 일상생활에 스며들어왔다”며 “이번 전시는 한지 재료의 특성과 여기에 담은 시간의 흔적을 통해 한지를 새롭게 바라보는 경험을 제공한다. 평일 오후 12시 반, 3시엔 도슨트도 진행해 전시에 대한 이해도 돕는다”고 말했다.

이어 “포스코미술관은 앞으로도 다양한 전시를 기획해 선보일 예정”이라며 “아이들이 편하게 접할 수 있는 그림책 전시부터 깊이 있는 동시대미술과 현대미술까지 다양한 장루를 아우르며 사람들의 일상에 예술이 스며드는 데 미술관도 일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포스코미술관에서 다음달 1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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