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싯길 (27) 다시 오대산] 눈 내려 장엄한 숲속, 봄나물이 솥 두드리는 소리

이한성 옛길 답사가 기자 2026.03.11 11:12:21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강릉에서 여름을 보내던 매월당은 삼일포, 총석정을 지나 영흥 땅 국도(國島)까지 가려던 계획을 접고 일찍이 넘었던 대관령을 거꾸로 넘는다. 그의 발길이 닿은 곳은 다시 오대산. 특별한 연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매월당의 마음에 은자(隱者)가 머물 만한 곳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곳에 오래 머물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딘가 양지 바른 곳에 터를 닦고 집을 지어 남으로 창을 내었다. 세상과는 은둔하고 싶었지만 자연과는 함께 하고 싶었다. 새소리 들으며 저 높은 봉우리에 떠가는 구름 벗 삼고 남쪽 창으로 떨어지는 해를 보고 싶었다.

처음 작은 집을 짓고
작은 집 처음으로 땅 가려 지으니
뜰 나무에 새소리 들리네
제사 올려 삼생의 원을 빌고
일찍이 이 한마음 헤아렸다네
골짜기의 구름은
첩첩이 봉우리에 비껴 있고
산비는 텅 빈 숲에 개이는구나
움켜쥘 세상사 남은 게 없으니
남쪽 창에 해는 지려 하는구나

初構小堂
小堂初卜築. 庭樹聽鳴禽. 已賽三生願. 曾參一箇心. 洞雲橫疊巘. 山雨霽空林. 嘯傲無餘事. 南窓日欲陰.

이렇게 자리 잡으니 그는 여느 여염집 아낙처럼 나물도 따보고 싶어진다. 산속 은자(隱者)가 사는 일, 찬거리 마련하고 쌀 씻어 밥하는 일 아니겠는가? 살지게 올라오는 늦여름 푸성귀를 광주리 가득 따 담는다. 작은 솥에 넣어 삶으니 향이 가득 피어오른다. 국 끓이고 아마도 묵나물용으로 말려도 두었겠지. 모처럼 흰 구름 떠가는 산속 오두막에서 청허(淸虛)한 복(福)을 누린다.

나물을 따며
나물 줄기 마치 묶음인 듯 섰고
그 속은 옥처럼 살지네
후닥 북쪽 고개에 올라
캐고 캐니 광주리에 가득하네
작은 솥에 불 지펴 끓기 시작하더니
푹 끓어 향이 뚜껑 두드리네
고관 국으로도 풍성하기에는
어찌 미칠까. 개울가 푸성귀를
누가 알려나. 흰 구름 속에
절로 청허한 복 있는 것을

摘蔬
菜莖立如束. 菜心肥如玉. 薄言登北嶺. 采采筐筥足. 小鬵火初沸. 爛煮香豉泣. 飽飫大官羹. 那及溪邊蔌. 誰知白雲中. 自有淸虛福.

 

오대산 북쪽의 옛 지도

그런데 매월당이 집 짓고 나물을 캔 곳은 오대산 어디쯤이었을까? 북령(北嶺)에 올랐다고 했으니 오대산의 북쪽 언덕이었을 것이다. 실학자 유형원이 1656년 편찬한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를 보면,

“오대산(五臺山)은 일명 청량산(淸涼山)이라 한다. 강릉부 서쪽 130리에 있다. 높고 거대하며 매우 깊다. 산에 다섯 봉우리가 있으니, 동쪽 봉우리는 만월(滿月)이라 하고, 남쪽 봉우리는 기린(麒麟)이라 하고, 서쪽 봉우리는 장령(長嶺)이라 하고, 북쪽 봉우리는 상왕(象王)이라 하고, 가운데 봉우리는 지로(智爐)라고 한다. 다섯 봉우리가 고리처럼 늘어서 있고 규모가 대등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하였다.

본조 세조가 일찍이 순행하다가 이곳에 올랐다. 허목(許穆)의 기문(記文)에 산 기운이 최대로 쌓인 것이 5개이므로 오대(五臺)라 부른다. 그 북쪽은 상왕봉(象王峯)인데 지극히 높고 험준하며, 그 정상은 비로(毗盧)가 된다. 그 동쪽이 북대(北臺)인데 감로수(甘露水)가 있다. 비로봉 남쪽이 지로봉(智爐峯)이고, 지로봉 위에 중대(中臺)가 있는데, 산이 깊고 기운이 서늘하여 새도 날아들지 않는다. 중대 남쪽에 쌍옥정(雙玉井)이 있다. 북대 동남쪽이 만월봉(滿月峯)인데, 정상이 동대(東臺)이고…”

(五臺山. 一名淸涼山. 在府西一百三十里. 高大深邃. 山有五峯:東曰滿月,南曰麒麟,西曰長嶺,北曰象王,中曰智爐. 五峯環列,均敵故名. 本朝世祖嘗巡幸登此. 許穆記:“山氣最積者五,謂之五臺. 其北爲象王峯,極高峻,其絶頂爲毗. 其東爲北臺,臺有甘露水. 自毗,南爲智爐峯,智爐峯上有中臺. 山深氣淸,飛鳥不至. 中臺南有雙玉井. 北臺東南爲滿月峯,絶頂爲東臺 …)

유형원이 이 지리지를 쓴 후 20년 뒤인 1676년 문신 송광연(宋光淵)은 오대산을 유람하고 오대산기를 남겼다. 아마도 매월당이 나물 캐러 간 주변 언덕과 골짜기를 200여 년 뒤 지나간 것이겠지. 그의 기록이다.

“비로봉에서 왼쪽으로 돌아간 것이 북대(상왕대)이다. 그 아래 고운암이 있고 수좌승 성영이 산다. 그 아래에 상두암과 자시암이 있는데 수좌승 육화가 살고 그 아래가 신성굴이며, 다시 그 아래가 정신 왕자가 머물던 옛터다. 북대에서 동쪽으로 달린 것이 동대(만월대)이며 아래에 동관음암이 있고 수좌승 종택이 산다.(自毗盧左旋者爲北臺. 其名爲象王臺. 下有孤雲庵. 首座僧性英居之. 其下爲象頭庵,爲慈施庵. 首座僧六和居之. 其下爲神聖窟. 其下爲凈神所住舊址. 自北臺東馳爲東臺. 其名爲滿月臺. 下有東觀音庵. 首座僧宗擇居之)

 

눈 쌓인 나옹선사 수행길. 사진=이한성 옛길 답사가

필자도 송광연이 다녀온 350년 뒤 매월당이 나물 캐고, 유형원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지리지에 기록한 그곳을 찾아 길을 나서 본다. 북대와 동대 사이 상왕봉 오르는 길은 마침 서설(瑞雪)로 가득하다. 기존 도로와 달리, 요즈음은 이 길을 ‘나옹선사 수행 길’로 이름 붙여 트레킹 길로 조성해 놓았다. 일찍이 매월당도 북대의 눈과 봄나물에 대한 감회를 읊었다.

북대에는 4월에도 남은 눈이 쌓였는데
푸성귀 흰구릿대 흙을 이고 나오네.
나옹대 가에는 높은 구름 떠 있는데
치솟은 봉우리 아득하여 헤아리기 어려워라.
北臺四月積殘雪 靑蔬白芷戴土出 懶翁臺畔有高雲 岑崟幽邃杳難測

 

상원사에 들어가기 전 관(갓)과 대(허리띠)를 풀어놓고 예를 갖추라고 세워놓은 관대걸이. 사진=이한성 옛길 답사가

북대와 나옹대를 읊는 것을 보면 매월당이 집 짓고 산 터는 아마도 북령(北嶺: 오대산의 북쪽 언덕) 가까운 곳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상원사 주변에서 북대 미륵암으로 이어지는 어딘가였을 것이다. 상원사 입구에는 큰 안내석과 ‘관대는 걸어놓고 가라’고 관대석(冠帶石)을 세워 놓았다.

북대 미륵암에는 고려말을 대표하는 선승 중 한 분인 나옹선사가 한때 수도하였고, 중대 적멸보궁을 태고보우가 중수하는 등, 고려말을 대표하는 나옹, 태고, 백운 세 화상 중 두 분이 오대산과 인연을 맺고 있다. 매월당이 오대산에 자리 잡았을 때는 나옹선사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전해지기로 나옹은 중국에서 돌아와 북대에 자리 잡고 상왕봉 산줄기 바위에 앉아 중대 적멸보궁을 바라보며 참선에 들곤 했다 한다.

 

추억의 북대 미륵암 너와지붕 자료사진.

이곳에 돌 몇 개로 축대를 쌓아 후세에 나옹대(懶翁臺)라 했는데 이곳을 찾는 이들은 여기에 앉아 적멸보궁 쪽을 바라보며 선정에 들기도 했다. 지금은 이 나옹대 대신 루(樓)를 세워 나옹대라는 편액을 달았다. 북대 미륵암(옛 상두암)도 너와지붕에 물씬 정감 풍기던 산골 암자였는데 지금은 대찰이 되었다.

매월당은 그때까지 남아 있던 나옹의 유품을 보며 흠모의 마음을 가득 담는다. 향반(香槃: 향 받침)과 승상(繩牀: 끈으로 엮은 침상)이 있는데 좀이 슬 듯해진 노끈 침상은 매월당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한다(시가 길어 생략함).

이렇게 지내는 사이 오대산에도 조금씩 서늘한 바람이 들기 시작한다. 여름 반딧불이 담을 넘고 달빛도 희어지는데 이슬이 내리기 시작한다. 이곳이 과연 영원히 은거할 곳인가? 문득 자문도 해 본다. 찬바람은 사내들에게 생각을 많게 한다. 밤이 되면 더욱 그렇다.

맑은 밤 오대산에서 노닐며
산속 밤은 깊어 가고
찬이슬 옷에 스미네
잠든 새 놀라 깨 꿈결이고
반딧불 흐르듯이 낮은 담 넘네
이내 걷힌 온 골자기 고요하고
달은 희고 오대는 청량하네
어느 곳에서 지긋이 진정 은거할까?
소나무 삼나무는 향이 십리로다

淸夜遊五臺
山中夜將半. 寒露襲衣裳. 宿鳥驚殘夢. 流螢過短墻. 煙收萬壑靜. 月白五峯涼. 何處堪眞隱. 松杉十里香.

이런 때는 그 놈의 여우가 나타나 왜 또 정신을 산란케 하는지. 요사스런 놈. 구미호 이야기도 생각나고, 호가호위(狐假虎威: 여우가 범의 위세를 빌려 설침)하는 여우도 생각나서 교활하고 못된 짓에 물든 사람들 생각도 떠오른다.

여우를 노래함
바위 바위 곁 해는 떨어지고
억울함 호소하듯 바람은 으르렁대네
황폐한 들에 미인이 되기도 하고
옛 절 퇴락한 담에 굴을 파네
잘 듣더니 얼음에 빠질까 의심하고
위엄 보일 때는 범의 위세 빌리네
요염하고 예쁜 미물이라 하지 마소
연나라 무덤에서 고상한 논설을 듣네

詠狐
落日千巖畔. 風嘷似訴冤. 荒郊爲美女. 古寺穴頹垣. 善聽嫌氷陷. 宣威假虎尊. 莫言妖媚物. 燕墓聽高論.
*燕墓聽高論의 댓구는 齊壇竊太牢: ‘제나라 제단에서 제물을 훔쳐 먹네’로 교활하고 못된 짓을 묘사함

이럴 때 그래도 마음을 달래 줄 세 어른이 오대산에는 계셨다. 순로(淳老), 여로(如老), 선로(禪老)였는데 매월당은 이 분들을 찾아가 불법을 논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큰 위로였다. 세 어른을 읊은 시(詩) 중 한 편만 읽는다.

산중에 순로(淳老)가 계시는데 연세가 높고 불법울 잘 안다. 며칠 동안 말을 나누었다.
소나무 창가에서 한 번 대화로 천 년 마음 나누었네
한 마디에도 어제 오늘 내일이 없네
턱없이 뜰에 잣나무로 화두(話頭: 禪旨)를 삼았다는데
누가 말했나 계곡 물소리가 부처님 말씀 같다고
귓전 때리는 말 이제 알 것 같은데
습(習: 몸에 밴 버릇)으로 밴 기운 없애려 이제 뵈러 나서네
서녁에서 온 직지(直指)의 가르침으로 문자를 벗어났는데
깨달으면 어찌 일찍이 깊고 얕음을 논하리오

山中有淳老. 年高知法. 對話數日.
一話松窓千古心. 箇中無有去來今. 謾將庭柏爲禪旨. 誰道溪聲演佛音. 撞倒語言方解會. 消磨習氣始參尋. 西來直指離文字. 悟了何曾論淺深

*직지(直指): 선종(禪宗)의 핵심 사상으로 사람의 마음이 곧 부처이니,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직시하여 그 심성을 보아 곧 부처임을 깨달음에 이르는 것(直指人心 見性成佛). 우리 금속활자본인 백운화상의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은 이런 사상을 책으로 엮은 것임.

찬바람이 불면서 매월당은 자리 잡지 못하고 다시 방랑길로 접어든다. 떠도는 이 고향이 따로 있겠느냐만 세 어른 중 한 분인 선로(禪老)의 말씀이 귀에 닿았는지(“정선의 벽파산이 은거해 살기는 최적이지/旌善亦有碧波山 最好 可以棲隱”) 평창, 영월 쪽으로 발길을 잡았다. 필자도 이제 매월당 따라 오대에서 나오려 한다. 최근에는 매월당 찾아 종종 왔었는데 이제 좀 뜸할 것이다. 둘러보고 가야 할 곳이 있다.

상원사 깨진 탑은 어부의 작품?

첫째가 삼국유사 탑상조의 ‘오대산 문수사석탑기’ 내용의 궁금함이다.

“정원에 있는 석탑은 신라 사람이 세운 것 같다. 비록 순박하여 정교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영험이 매우 많아서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그중 여러 옛 노인들에게 들은 한 가지만 기록하면 이러하다. ‘옛날 연곡현(連谷縣)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는데, 갑자기 탑 하나가 배를 따라 오는 것을 보았다. 그 그림자를 본 물고기들은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그래서 어부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하자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그림자를 찾아보니 아마도 이 탑인 것 같았다. 어부는 도끼를 휘둘러 탑을 부셔버리고 떠났다. 그래서 지금 탑의 네 모퉁이가 모두 떨어진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거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놀라서 한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탑의 위치가 약간 동쪽으로 치우쳐 중앙에 있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며 현판을 우러러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다. ‘승려 처현(處玄)이 일찍이 이 절에 머물러 있다가 문득 탑을 뜰 가운데로 옮겼다. 그러자 20여 년 동안은 적막하니 아무런 영험이 없었다. 풍수를 보는 자가 터를 찾으려 이곳에 왔다가 탄식하기를, ‘이 뜰 가운데는 탑을 세울 자리가 아닌데, 어찌하여 동쪽으로 옮기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승려들이 그제서야 깨닫고 다시 옛 자리로 옮겼는데, 지금 서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때는 정륭(正隆) 원년 병자(서기 1156) 10월 일. 백운자(白雲子) 씀.”

(원문은 삼국유사 탑상조 4를 참고하세요)

 

상원사 영산전 앞 석탑. 사진=이한성 옛길 답사가
오대산 사고. 사진=이한성 옛길 답사가
오대산 사고를 그린 단원의 그림. 

고려 중기 때 스스로를 백운자라 칭하는 이가 들렀다가 쓴 글인데 이 이야기를 접한 뒤 오랫동안 궁금했다. 문수사는 어디이며 그 탑은 어디 있을까? 상원사 영산전 앞 깨진 탑을 볼 때면 이 글이 생각난다. 근거는 없다.

두 번째는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와 사고를 지키는 절 영감사(靈鑑蘭若)다. 임진란 이후 재인쇄한 실록을 보관했는데 일제가 동경제국대학으로 반출했다. 그 후 동경대지진 때 대부분 소실된 후 돌아왔다. 사고는 사람들이 잘 들르지 않는 곳이지만 산 속 그윽한 곳 찾은 발길이 아깝지 않다.

 

눈과 숲에 둘러싸인 오대산 부도전. 사진=이한성 옛길 답사가

세 번째는 부도전이다. 오대산에서 마음을 닦던 이들의 흔적이다. 두 손 모으고 내려온다. 탄허스님의 제자로 머리 깎고 정진했던 박용열 시인은 ‘오대산 가는 길’이라는 시에서 ‘이 자리가 그 자리인 것을 내 어찌하여 그렇게도 몰랐을까’라 했다. 문득 저 부도전에 매월당의 부도도 함께였다면 그의 삶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춘설이 가득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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