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전북 군산새만금컨벤션센터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손을 맞잡았다.
현대차그룹이 전북 새만금 지역 112만 4,000㎡(약 34만 평) 부지에 약 9조 원을 투입해 AI 데이터센터, 로봇 제조·부품 클러스터, 수전해 플랜트, 태양광 발전, AI 수소 시티 등 5대 첨단 인프라를 구축한다는 내용의 ‘새만금 로봇·수소 첨단산업 육성 및 AI 수소 시티 조성을 위한 투자협약(MOU)’에 두 사람이 서명을 마친 직후였다.
이 대통령은 이날 행사에서 “국가와 국민이 함께 키워낸 현대차그룹이 새만금에 대대적 투자를 시작한다. 정주영 회장님께서도 자랑스러워 하실 것”이라며 “새만금은 누구나 일상에서 로봇을 편리하게 사용하는 미래 도시로 거듭날 것”이라고 치하했다.
이 사업은 현대차그룹이 지난해 11월 발표한 국내 125조 2000억 원 투자 계획의 첫 번째 ‘대형 착공 프로젝트’이자, 단일 기업 투자로는 전북 역사상 최대 규모여서 국내외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한국은행의 산업연관 분석에 따르면, 이 사업의 경제 유발 효과는 약 16조 원에 달하며, 직·간접적으로 약 7만 1000명의 고용 창출이 예상된다.
정부는 3월 11일 ‘새만금·전북 대혁신 TF’를 출범시켜 5월까지 종합지원계획을 마련하기로 했고, 현대차는 2026년 착공, 2029년 주요 시설 완공을 목표로 ‘초속도’ 실행을 선언했다. 35년 가까이 ‘잠자는 땅’ 혹은 ‘애물단지’로 불리던 새만금 간척지가 미래산업의 새로운 거점으로 탈바꿈을 시작하는 출발점이었다.
35년 ‘희망고문’의 역사… 왜 ‘애물단지’였나
새만금 사업은 과거 노태우 정부의 대선 공약으로 1991년부터 시작된 국책 간척 프로젝트다. 서울 면적의 약 2/3 규모인 총 4만900헥타아르의 매립지를 조성하기 위해 33.9km에 달하는 세계 최장의 방조제가 무려 19년에 걸친 공사 끝에 지난 2010년 완공됐다. 방조제 건설에만 약 1조 2000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됐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거대한 공간의 사용처가 마땅치 않았다.
초기 목적은 부족한 쌀을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한 농지 확보였으나, 이후 쌀이 과잉 생산되고, 한국의 사회·경제 구조가 빠르게 변화하며, 농업보다는 산업·도시·관광의 비중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개발 계획은 계속 수정됐다.
그 결과 방조제 완공으로 조성된 4만 900헥타아르(토지 2만 9100헥타아르, 호수 1만 1800헥타아르)에 달하는 거대한 매립지가 여전히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2025년 7월 기준 전체 매립 진척률은 49.2%(완료 41.7%, 진행 중 7.5%)에 불과하며, 그나마 농생명용지(농업용)는 81.4% 진척된 반면, 산업연구용지·복합개발용지는 10% 미만 수준이다.
이런 가운데 행정구역 분쟁, 환경단체 소송, 정치적 갈등이 끊이지 않으며, 새만금은 35년간 지역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가 됐다. ‘혈세 낭비’ 논란 속에 국내외 여러 대기업들의 투자를 유치하며 활로를 찾았지만, 대부분 사업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특히 지난 2023년 8월 새만금에서 열린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는 약 4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 행사임에도, 주최측의 준비 부족, 정부의 과도한 개입, 지자체 간 업무 혼선 등 온갖 논란을 낳으며 중도에 종료돼 ‘건국 이래 최악의 부실행사’로 기록되는 오점을 남겼다.
현대차가 새만금을 택한 이유… “RE100·입지·정부 지원”
이처럼 ‘투자·행사 불모지’로 꼽혀온 새만금에 현대차가 과감히 9조 원 투자를 결정한 이유는 뭘까? 현대차그룹 측은 이렇게 설명한다. “새만금은 단순 부지가 아니라 ‘비어 있는 캔버스’”라고. ‘애물단지’인 줄로만 알았던 새만금이 사실은 현대차에 지금 필요한 광활한 부지와 항만·도로 인프라, 풍부한 일조량 등을 갖춘 최적의 장소라는 얘기다.
먼저, 새만금은 재생 에너지 확보에 유리한 지리적 특성을 갖췄다. 이번 투자 계획의 핵심인 ‘AI 데이터센터’와 ‘수전해 플랜트’는 전력 소모가 극심하다. GPU 5만 장급 데이터센터 하나만 100MW 이상의 전기를 필요로 한다. 여기에 RE100(재생에너지 100%) 요건을 달성하려면 지산지소(地産地消) 에너지 시스템이 필수인데, 다행히 새만금은 GW급 태양광 발전이 가능한 최적지다.
둘째, 현대차그룹은 새만금의 넓은 공간을 미래 비전 실현을 위한 실험장으로 활용할 수있다. 올해 들어 현대차의 주가는 로봇 기술에 힘입어 급등했다. 정의선 회장은 현대차를 자동차 제조사를 넘어선 ‘로봇·AI·에너지 솔루션 중심 미래기술 기업’으로 탈바꿈시키려 하고 있다. 새만금은 보스턴다이내믹스 인수, 엔비디아 협력 등으로 현대차그룹이 그간 쌓아온 로봇·AI 신기술과 수소 에너지 기술력을 한 곳에 모아 건설할 AI 수소 시티를 지을 수 있는 최적의 입지다.
셋째, 정부와 지자체의 전폭적인 지원도 빼놓을 수 없다. 당장 이날 이재명 대통령은 "큰 결단을 내려주신 정의선 회장님을 비롯한 현대차그룹 임직원께 깊이 감사드린다"며 “기업의 과감한 결단에 정부는 더 과감한 지원으로 화답하겠다. 기업이 마음껏 역량을 펼치고 성장할 수 있도록 규제와 행정 지원의 문턱을 파격적으로 낮추겠다”고 약속했다.
김민석 국무총리도 이후 열린 TF 회의에서 “현대차 투자를 정부가 확실하게 적극, 전면 지원해 성과를 내자”고 화답했고, 김관영 전북특별자치도지사도 “현대차그룹과 협약을 바탕으로 새만금을 ‘대한민국 로봇 산업의 중심지’로 만들겠다”고 천명했다. 법인세 감면·인허가 원스톱 등 다양한 국가산업단지 혜택은 기본이고, 정부, 지자체의 수많은 지원이 잇따를 것으로 예상되는 대목이다.
2029년까지 5대 프로젝트 완공…피지컬 AI·수소 순환 생태계 구축
현대차그룹의 새만금 투자는 ▲AI 데이터센터 ▲로봇 제조 및 부품 클러스터 ▲수전해 플랜트 ▲태양광 발전 ▲AI 수소 시티 등 5대 첨단 밸류체인 구축이 핵심이다.
먼저, 현대차그룹이 가장 많은 약 5조 8000억 원 규모의 투자를 진행하는 분야는 ‘AI 데이터센터’다. 2027년 착공, 2029년 완공 목표로 지어지는 AI 데이터센터는 단계적으로 GPU 5만 장급 초대형 연산 능력을 갖추고 SDV(Software Defined Vehicle, 소프트웨어 정의 차량) 개발, 스마트 팩토리 구현 등에 필요한 막대한 데이터를 처리 및 저장하게 된다.
현대차그룹은 피지컬 AI 구현에 필요한 핵심 데이터를 제조, 물류, 판매 등 모든 밸류체인에 걸쳐 확보 가능한 기업으로서, 현장 데이터를 AI 학습에 사용하고 이를 다시 제품에 적용하는 선순환 체계 구축을 통해 기술 및 제품 개발의 속도와 안정성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두번째로 ‘로봇 제조·부품 클러스터’에는 약 4000억 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2028년 착공, 2029년 완공 예정인 이 클러스터는 로봇 완성품 제조 및 파운드리 공장과 부품 단지로 구성된다.
연 3만 대 규모로 들어서는 로봇 제조 공장은 현대차그룹의 제조 설루션 및 AGV(무인운반차) ·AMR(자율주행 물류 로봇) 기반의 스마트 물류를 도입하며, 제조 노하우가 부족한 중소기업 제품을 위탁 생산하는 역할도 담당한다. 특히 중소 자동차 부품 협력사의 로봇 산업 확장을 촉진, 모터 및 센서 등 핵심 부품의 대외 의존도를 낮추는 한편, 국내 로봇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에 기여할 계획이다.
세번째는 약 1조 원을 들여 건설 예정인 200MW 규모 ‘수전해 플랜트’다. 이곳에서는 새만금의 풍부한 재생 에너지를 활용해 하루 약 80톤의 청정 수소를 생산하게 된다. 태양광 전력으로 물을 전기분해해 수소를 만들고, 이를 로봇·모빌리티·산업용으로 공급, 현대차 수소 모빌리티(수소차·드론·선박) 실증 베이스로 활용할 계획이다.
네번째는 새만금의 풍부한 일조량을 활용해 필요 분야에 원활한 전기를 공급하는 GW급 ‘태양광 발전시설’로, 약 1조 3000억 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이미 현대차그룹은 지난 2021년 이후 새만금 육상태양광 1구역에서 99MW 규모 태양광 발전시설 운영에 참여하고 있으며, 2035년까지 태양광 발전시설을 단계적으로 확충해, AI 데이터센터와 수전해 플랜트의 핵심 전력원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마지막 다섯째는 약 4000억 원이 투자될 ‘AI 수소 시티’다. 정부가 6.6㎢(약 2백만 평) 부지에 기반 시설을 공사 중인 새만금 스마트 수변도시에 구현될 예정으로, 인근 수전해 플랜트에서 생산된 수소를 활용하는 지산지소(地産地消)형 에너지 순환 시스템이 도입되고, 피지컬 AI가 교통, 물류, 안전 등 생활 전반에 적용되어 미래형·무공해 AI 도시의 표준 모델이 될 전망이다. 현대차그룹은 새만금에서의 도시 단위 실증 경험을 향후 세계 각국의 AI 도시 건설에 적극 반영할 계획이다.
현대차는 이 5대 사업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데 방점을 찍고 있다. 태양광 → 수전해 → 그린수소 → 로봇·AI 데이터센터 → 실증(시티)으로 이어지는 ‘폐루프(closed loop) 생태계’를 완성하겠다는 전략이다.
“새만금, 전북 넘어 대한민국 대전환 이끈다”
현대차그룹의 이번 새만금 투자는 로봇, AI 기술 혁신 및 수소 에너지 생태계 대전환을 이끌고, 신규 일자리 창출과 지역 균형 발전 촉진 등 즉각적이며 실질적인 경제적 성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투자가 본격화하면 새만금을 중심으로 로봇, AI 및 수소 에너지 등 첨단 산업 생태계가 조성되고, 지속가능한 지역 성장의 기반이 마련될 전망이다. 나아가 산학 협력 강화 등으로 신규 유입되는 우수 인재들은 서남해안권 지역에 중장기적 혁신 역량이 뿌리내리는데 이바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북 지역사회에서는 새만금이 이번 투자로 개발 지연을 해소할 경우, 전북 GRDP(지역내 총생산)의 20% 성장과 약 10만 명의 고용 유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기대하는 분위기다. 국가적으로는 탄소중립 가속, 지방균형발전 모범 사례, AI·로봇 산업 경쟁력 제고라는 삼중 효과가 기대된다.
현대차그룹은 국가와 지역사회의 기대에 부응, 반드시 이번 새만금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겠다는 각오다. 이날 협약식에서 장재훈 현대차그룹 부회장은 “새만금에서 시작되는 차세대 산업 패러다임은 전북을 넘어 대한민국의 미래를 설계하는 대전환 중추가 될 것”이라며 “제조 전문성을 비롯해 로봇, AI, 수소 에너지 역량을 두루 갖춘 현대차그룹은 첨단 산업 생태계 구축에 나설 준비가 됐다”고 포부를 드러냈다.
<문화경제 정의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