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연구원의 조민 선임연구위원은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로 규정된 2·13 공동성명의 도출로 인해 핵문제로 인한 위기국면이 ‘동결(crisis freeze)’됐다고 정의내렸다. ‘2·13 공동성명’의 합의는 한반도 비핵화의 첫걸음이며, 이것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통일로 가는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는 게 조 연구위원의 진단이다. 지난 13일 평화재단이 주최한 제7차 전문가 포럼에서 조 연구위원은 3단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로드맵을 제시하며, 2013년 북한의 핵무기 완전폐기 및 핵물질 반출이 완료될 것이라는 비핵화 일정에 대한 청사진을 내놓았다. ■‘2·13 합의’는 부시의 전략적 선회(Strategic Swing) 먼저 조 연구위원은 2·13 공동성명 합의는 ‘미국판 대북포용정책’이라는 관점에서 “북한의 변화가 아닌 미국의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냉전체제 이후 미국유일의 헤게모니를 수용해 왔던 국제정세가 점차 사라지면서 미국의 일방주의에 비협조적이거나 심지어 거부하는 현상이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요인이라는 설명이다. 이에 따라 조 연구위원은 2·13 공동성명의 합의는 부시 정부의 전략적 선회(Strategic Swing)라고 결론내렸다. 2·13 공동성명의 합의가 의미하는 미국의 대북정책은 북핵의 ‘완전폐기’가 아니라 핵무기 ‘확산방지’ 정책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는 것. 이라크 문제에 비해 쉽게 진화할 수 있는 문제부터 해결하여 ‘성공사례’를 만들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동북아 북핵해결을 계기로 중동문제의 추진력을 삼으려는 의도다. ■ 미국의 2·13 합의 목적은 핵무기 ‘확산 방지’에 불과 이어 조 연구위원은 2·13 공동성명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난 2월초 방북 후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에 제출된 올브라이트 보고서에 의하면 북한은 최대 64kg의 플루토늄을 확보하고 있다. 이 가운데 최소 28kg은 핵무기 제조에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핵 무기 제조에 약 6kg 정도의 플루토늄이 사용되는 것으로 볼 때 북한은 최대 8개의 핵탄두를 제조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번 2·13 공동성명은 북한의 핵보유 자체를 문제삼으면 협상을 진전시킬 수 없다는 판단하에 ‘모든 핵무기’문제는 9·19 공동성명의 제1조를 ‘상기’하는 수준에 그쳤다. 북핵이 실질적으로 미국의 안보에 심각한 문제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현존하는 핵 무기가 아니라 앞으로의 핵계획만을 중심으로 합의를 이뤘다는 것. 이에 반해 북핵을 ‘머리에 이고’ 안보와 평화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한국의 입장은 상당히 난처하고 어려운 국면에 있다는 지적이다. 또 하나 2·13 공동성명이 가진 문제점은 고농축 우라늄(HEU)과 관련된 사안이다. HEU 프로그램이 무기급으로 발전되기에는 기술적으로 수준미달이라는 점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조 연구위원은 HEU의 핵심은 ‘신뢰의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북한이 94년 제네바 합의의 준수 의무를 위반하고, 은밀히 파키스탄과 거래를 통해 HEU 핵 프로그램을 추진했다는 사실은 신뢰를 무너뜨린 행위라는 것. 이와 관련 조 연구위원은 “많은 돈을 훔쳐야 도둑놈이 아니다 ”라고 비유해 좌중의 주목을 받았다. 적은 돈을 훔쳤더라도(HEU가 수준미달이라도) 절도(제네바 규정위반) 자체가 이미 규탄받아야 할 행동이라는 설명이다. ■ 한반도 평화체제, 남한 배제 우려 한 가지 특이할 만 한 점은 이번 2·13 합의로 북한이 얻는 경제적 이익은 예상보다 크지 않다는 것. 다만 북한은 핵 폐기에 대한 상응조치로 미국의 대북적대시 정책의 변화 가능성에 주목했을 뿐이다. BDA 문제만 해도 미국이 한발짝 물러섰다는 점에서 결국 북한의 기본 입장이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조 연구위원은 북한의 바뀌지 않는 입장은 대남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제시했다. 미국과는 대화하되 남한과의 의사소통은 봉쇄시키는 이른바 ‘통미봉남’정책은 변함이 없다는 사실에 천착한 것. 이에 조 연구위원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정에서 한국이 배제되는 결과를 초래할 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이에 대해 김영호 국방대학교 교수도 북·미 수교가 빨리 이뤄질수록 한국은 주도권을 상실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동조했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안보’하는 사람과 ‘평화’하는 사람의 의견은 다르다”고 전제한 뒤 안보의 차원에서 볼 때 평화체제 논의는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이 하나 만들어 질 때도 먼저 정치인이 앞장서서 법제화의 물꼬를 트면 맨 마지막에 법조인들이 천천히 명문화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 ■‘안보’하는 사람 VS ‘평화’하는 사람 또 하나, 김 교수는 북·미 수교와 평화체제 이후 주한 유엔사령부의 위치에 대해 염려했다. 김 교수는 “종전 선언 후 (북한이) 유엔사령부를 없애라고 하면 어쩔 것이냐”며 유사시 군사조직 및 투입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지적했다. 안보의 입장에서 마지막 보루는 살려둬야 한다는 주장이다. 더 나아가 김 교수는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이 있느냐고 반문하며, 북핵 위기가 해소되는 국면이 아니라는 뉘앙스를 풍겼다. 반면, 전현준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북·미 중심으로 한반도판이 짜여지고 있는 현실을 비판했다. 김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평화’하는 사람에 속하는 전 연구원은 “정말 획기적인 판이 올 것 같은 생각이 든다”면서도 2·13 공동성명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하는 문제가 빠져있다고 지적했다. 전 연구위원은 한국이 직접 주도권을 잡고, 통일의 의지를 키울 역량을 키우고 있느냐고 일침을 놓았다. 이에 전 연구위원은 “(현재의)코페르니쿠스적 대 변화에 동의한다면 진정으로 남북 화해 협력에 앞장서서 나가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 북핵 해결되면 평화체제 구성되나? 한편, 백승주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은 북핵문제만 해결된다면 한반도의 평화가 이뤄질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대한 경계를 내비쳤다. 이날 토론의 패널로 참석한 백 연구위원은 “예전에 핵이 없었을 때도 평화체제는 요원하지 않았나”라고 되물으며 2·13 합의의 불완전성을 경고했다. 김영호 국방대학교 교수도 북한이 핵 시설을 불능화한다고 해서 평화체제를 해도 되는 것이냐고 우려했다. 윤덕민 한국외교안보연구원 교수도 핵과 평화는 관련이 없다며 백 연구위원의 의견을 동의했다. 그러면서 윤 연구위원은 94년 제네바 합의 이후 4자회담에서 한반도 평화를 논의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다는 근거를 댔다. 당시 북한은 4자회담에 참석한 이유가 미국과 고위급 회담을 노린 것이었지만 이제는 직접 북미 양자대화가 가능해 질만큼 정세가 크게 변화했다. 따라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핵이 아니라 북·미 관계정상화가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결국 북·미관계가 평화와 관련이 있다는 설명. ■ 미, 북한의 기존 핵무기 묵인 약속? 북·미 관계진전과 관련, 백 연구위원은 지난 1월 베를린에서 북·미간의 전략적 비밀거래가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 미국은 오로지 핵 물질이 이라크 등 중동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 실제적인 비핵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미국은 지난 베를린 회동에서 북한에게 과거의 핵은 묵인해주겠다는 제안을 했을 수도 있다는 것. 이 같은 관측의 연장선에서 백 연구위원은 15일부터 시작되는 경제·에너지 실무회의를 비롯한 5개 실무그룹 회의가 똑같은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북·미 관계정상화 회의가 가장 중요했다는 해석이다. ■ 북·미간 전략적 비밀거래 경계해야 두 번째 비밀거래로 북한은 급부상하는 중국을 미국이 견제하는 데 대해 일조하겠다는 약속이다. 이에 대해 백 연구위원은 북한이 미국에 6자회담에서의 중국 역할을 크게 기대하지 말 것을 주문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중국이 아무리 북핵사태를 막으려고 했지만, 결국 자신들(북한)은 핵실험을 강행하지 않았느냐는 주장이다. 한편, 조민 연구위원은 이날 토론회에서 한반도 평화로드맵으로 1단계 2008년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2단계 모든 핵무기 신고·검증·사찰·폐기 시작, 3단계 2013년 남북연합에 진입하는 일정표를 제시해 관심을 모았다. -최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