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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넘을 수 없는 벽”을 향한 핏빛 느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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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0호 ⁄ 2007.07.03 11:38:42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는 3만 6천의 병력으로 20만의 페르시아 군대를 물리쳤다고 한다. 그런데 그 데이터가 재미있다. 페르시아 군의 희생자는 10만에 육박했던 것과는 달리, 마케도니아 군의 희생자는 불과 몇 백 단위다. 그보다 조금 더 현실적인 수치는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보여준다. 알프스를 넘어 살아남은 5만의 병력을 거느린 그는, ‘칸나이’에서 8만 7천의 로마 부대를 만나 4200명을 제외한 전원을 전사시키거나 포로로 잡았다. 한니발이 치른 희생은 5,500명이었으며, 그중의 2/3은 비주력 갈리아인 부대였다. 앞서 이야기한 만큼 황당한 수치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놀라운 전과다. 그래서일까? 한니발이 거둔 최고의 승리 무대 ‘칸나이 전투’는 전 세계의 육군사관학교에서 반드시 가르치는 전투라고도 한다. 뛰어난 전략가와 절박함을 인식한 의지, 뚜렷한 목표의식이 있기에 거둘 수 있는 승리였을 것이다. 한니발이 거둔 성과는 분명 엄청난 것이지만, 지난 14일에 개봉한 영화 <300>의 홍보문구대로라면, 이 성과는 너무나도 초라해진다. <300>은 페르시아의 100만 대군과 맞서 싸운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의 이야기를 담았다고 한다. ■ 이란은 왜 <300>에 격분했을까? 스파르타는 서양 문화의 뿌리 그리스 문화권의 도시국가였으며, 페르시아는 지금의 이란을 기반으로 둔 왕조국가였다. 굳이 동양과 서양, 혹은 백인과 유색 인종의 구도로 보자면, <300>은 자연스레 불씨를 내포하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스파르타 전사를 소재로 한, 그리고 그들의 장렬한 죽음을 그린 영화. 안봐도 짐작할 수 있다. 페르시아 왕국은 광대한 영토를 자랑하던 초강대국이었지만, 역사는 서양 문화의 뿌리가 된 그리스 문화를 승자로 그리는 만큼 다윗 앞에 골리앗 신세로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이 영화에서 다루는 이야기도 그렇지만,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을 다룬 이야기를 보면 더욱 그렇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와 맞붙기만 하면 처참한 결과만 남긴 채, 그의 이름을 드높이는 역할만 할 뿐이다. 이란은 북한과 함께 미국이 지정한 ‘악의 축’ 국가 중에 하나이며, 최근에는 핵무기 개발을 놓고 민감한 상황이기에 그들의 심기는 더욱 불편했던 듯하다. 사실 300명이 100만 대군을 맞상대한다는 것은 심한 과장이다. ‘대첩’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패자의 전력을 부각시키는 것이 더욱 강한 인상을 줄 수도 있다. 페르시아의 군대는 사실은 100만이 아니며, 20만 가량(이것만 해도 놀라운 숫자다)이었다고 하며, 그에 맞선 그리스 군도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과 700명의 테스피스인이 ‘포함된’ 수천의 병력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 수치도 말도 안되는 숫자다.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 당시에 월왕 구천이 5천의 병력으로 70만의 오나라 군대를 물리쳤다고 하는데, 역사는 이렇게 이해가 안갈 정도로 수치를 과시하면서, 서로를 부각시키는 일이 잦다. 역사를 볼 때, 언제나 냉정한 시선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그렇듯 불편한 ‘숫자의 설정’도 그렇지만, 영화에서 다루는 페르시아 군대의 구성원도 이란인들의 심기를 자극할 것들이 많았다. 영화 속의 페르시아 군은 일종의 유색인종 연합군이며, <삼국지연의>에서 맹획이 거느렸다는 남만 병사들을 연상시키는 ‘오랑캐 스타일’의 병사들도 다수 등장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단순, 무식, 과격이며, 왕은 허울좋은 권위에 사로잡혀 허세를 부린다. 그리고 백인들이 버린 추한 외모의 사나이를 내부배신자로 활용하는 간교한 이미지도 덧칠돼 있다. 조상의 역사가 ‘초강대국’을 이룬 영화로운 역사였다면, 후손에게도 영광일수도 있다. <300>은 이런 설정 등을 계기로 가뜩이나 현실적으로 민감한 정세를 이루는 이란인의 감정을 제대로 자극한 것이다. 물론 연출자인 잭 슈나이더 감독보다는, 이 이야기를 그래픽 노블로 꾸민 원작자인 프랭크 밀러에게 따져야 한다는 어느 누리꾼의 지적이 일리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 역시 책임이 아주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시각에 따라서는, 끝없는 시련을 거치며 살아난 잘 생긴 근육질의 백인 전사들의 이미지를 극대화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일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편 병사들의 이미지를 극단적으로 그릴 필요가 있다. 페르시아 군은 그런 이유로 ‘추한 유색인종 연합군’이 된 것이다. ■ 남자는 무엇을 위해 살고 죽는가? <300>은 일종의 느와르다. 비극을 통해 남성의 판타지를 자극하며, 피를 끓게 하는 느와르다. 십 수 년 전에 우리를 열광시켰던 주윤발의 출연작을 연상시키면 된다. <첩혈쌍웅>의 주윤발은 이수현과 콤비를 이루며, 1개 중대는 족히 될 악당들을 모조리 물리친다. 그에게는 지켜야 할 품위와 의리가 있었으며, 사랑이 있었다. <300>도 그렇다.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과 그들을 지휘하는 ‘레오니다스 왕(제라드 버틀러)’에게도, ‘스파르타’라는 지켜야 할 가치와 전우애, 그리고 가족과 사랑이 있었다. 남자는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불가능을 알면서도 목숨을 버릴 수 있다.

<300>은 능란한 비주얼,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그리고 <새벽의 저주>에서 좀비들의 목 자르는 솜씨를 과시한 잭 슈나이더 감독 특유의 인체 절단 묘사가 과감한 하모니를 이룬다. 남자의 피를 끓게 하기에는 좋은 작품이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거대한 세상과 싸워나가는 것, 얼마나 피를 끓게 하는가? 거기에는 태어났을 때 신체에 중대한 이상이 있을 때에는 버려지며, 건강한 사내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전사로 길러져 7세가 돼서는 집을 떠나 실전감각까지 기르는 스파르타 전사들의 삶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다소 극단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스파르타 전사들만의 삶이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의 삶, 살아남기 위한 지속적인 투쟁이다. 그렇게 살아남아 드넓은 세상으로 진출하지만, 세상은 이미 전쟁터다. 더 거대한 상대를 만날 수도 있으며, 거기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상황도 마주친다. 결국 <300>은 남성의 현실이며, 남성이 꿈꾸는 장엄한 비극의 판타지를 그린 작품이다. ■ 넘을 수 없는 벽, 그리고 꿈도 언젠가는 이루어진다 <300>을 보면서 필자가 떠올린 인물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였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페르시아 군에게 처절한 패배를 안긴 역사상 최고의 전략가 중 한 사람이다. 한니발이 그토록 흠모했던 인물이었으며, 전술의 상당 부분을 참고했던 적도 있다. 신흥강국은 기존의 강국을 이겨내야만 진정한 강국으로 거듭나면서, 새로운 지배체제를 완성할 수 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관계가 그랬으며, 훗날의 로마와 카르타고의 관계가 그랬다. 남자의 일생도 마찬가지다. 특정분야에서 자신의 발전을 일궈내기 위해서는 ‘넘어야 하는 대상’이 있기 마련이며, 이루지 못한 꿈이 후대로 이어져 기어코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다. <300>의 스파르타 전사들이 거침없이 휘두르던 창의 숨결과 굵은 핏방울은 훗날 알렉산드로스에게로 이어진다. 굴하지 않고 꾸준히 도전한다면 언젠가는 이루어지며 넘을 수 있게 된다. 그게 남자의 집념이며, 인간의 집념이다. <300>은 그 집념을 환상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다. -박형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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