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해재단’(현 세종연구소)-전두환 전대통령. ‘아·태평화재단’-김대중 전대통령 두 전직 대통령이 퇴임후 국가정책을 연구하기 위해 설립한 재단이다. 카터 등 외국 대통령들이 퇴임 후 재단을 설립해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 사실을 보더라도 재단 자체를 비뚫어진 시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국가에 귀속후 민간연구소로, 후자는 지금 민간연구재단으로 세계 평화관련 단체로 성장한다. 퇴임 대통령들이 설립한 연구재단이 명암이 교차한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후 국가정책과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연구재단 설립을 추진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정치세력 간 분화의 창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정치권의 노선중심의 재편흐름에 따라 새로운 정당운동이나 정치운동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부루킹스 재단’ 같은 가칭‘싱크탱크’를 설립하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싱크탱크의 생생한 사례인 미국의 경우, 특정 독지가의 막대한 후원금을 기초로 싱크탱크들이 출발하고 규모의 성장을 이루고 있는 점에서 기업의 후원금으로 운영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어 미국 등 선진국과는 달리 기업 정치자금에 의해 운영될 수도 있다. 이와 관련, 친노그룹의 한 관계자는 “지금은 정책이념중심의 구도를 형성하고, 이 위에서 대선과 향후 총선을 준비해야 할 필요성이 범진보개혁진영에 있으며 따라서 총체적 국정운영을 위한 진보개혁진영의 정책생산단위로서 규모 있는 싱크탱크를 만들고 정책을 개발하는 것이 매우 시급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 외국 대통령 재단 설립, 사회봉사활동 나서 정치권에서는 이를 두고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후 개헌 등 정치현안에 대해 계속 관여하겠다고 밝힌 점으로 봐 퇴임후 정치 관여의 수단으로 연구소를 만들려는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이 재단은 늦어도 8월경에 설립될 예정이어서 올 대선에도 깊이 관여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아태재단을 설립해 지금까지도 정치에 관여하고 있어 퇴임후 두 대통령 간의 파워게임이 벌어질 수도 있다. 경기도 성남에 소재하고 있는 세종연구소는 남북 관계 및 대외정책에 필요한 연구 기능을 수행하는 순수 민간 연구소다. 분야별로 중장기 정책연구를 수행하고 안보 문제와 국제정세에 대해 시의적절한 정책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우리나라 유수의 민간 연구소로 성장했다. 그런데 이 세종연구소의 전신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설립한 일해재단이다. 1983년 10월 9일 버마(현 미얀마)의 아웅산묘소 폭발사건 발생 후 전 씨는 순직한 희생자들의 유족에 대한 지원과 장학사업을 목적으로 이 해 12월 1일 일해재단을 발족시킨다. 일해(日海)는 전씨의 아호다. 85년 말에 연구소 건물이 완공되고 86년 1월에 `일해연구소가 정식으로 개소했다. 13대 총선 후 여소야대가 되고 5공비리가 불거지면서 일해연구소는 세종연구소로 명칭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일해재단 비리는 13대 국회가 우리나라 의정사상 처음으로 구성한 5공특위 청문회에서 그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우선 일해재단은 전씨가 퇴임 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목적으로 설립했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졌다. 현장조사에서는 1-2영빈관 등 호화시설물과 당초 설립 목적과 달리 전씨의 사유물임을 입증할 수 있는 여러가지 증거들이 드러났다. 또 84년부터 87년까지 장세동 당시 경호실장의 주도로 기업인 등으로부터 598억5천만원에 달하는 기금을 출연받은 사실도 밝혀졌다. ■ 전두환, 일해재단 이용 정치관여하다 팽 당시의 일해재단 비리가 국민들의 뇌리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이번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설립한 아·태평화재단이 몇가지 의혹에 휩싸이면서 도마에 오르고 있다. 야당과 보수언론은 아태재단의 일부 비리 의혹이 나오면서 ‘제2의 일해재단’이라고 공세를 펴고 있다. 그러나 아태재단은 김 대통령이 이미 야당 총재시절인 94년에 설립한 것이고, 그동안의 활동 등을 봐도 일해재단과는 분명히 성격이 다르다고 아태재단은 밝혔다. 친노그룹은 ‘싱크탱크’를 정부와 기업의 연구프로젝트 수주 및 공적 기부와 민간 기부는 영향력 있는 정치인들이 적극 주선하고 지원하는 형태로 재원안정성을 확보키로 했다. 또 미국 부르킹스연구소(우드로윌슨연구소 등 개혁진영 싱크탱크 등)와 스웨덴 팔메재단 등 국제연대를 통해 지원받을 수 있는 해외협력체제구축으로 안정적 재원을 마련하는 한편 필요할 경우, 국회 법인등록을 통해 국회재원을 지원받는 방법도 모색키로 했다. 싱크탱크는 정책을 생산하고 정책을 유통시키는 한편 생산과 유통에 온라인 지지자들을 결합해 나간다는 전략이다. 정책생산은 기존 연구개발된 정책수집하고 수집된 정책을 국회예산을 대입한 시뮬레이션 결과 등 선거정책으로 내세울 수 있는 현실적 정책대안을 마련해 이 과정에서 정책을 수립과 집행에 대한 유경험자를 결합해 나간다는 것이다. ■ 대선에도 직접 관여 대선판도 영향일 듯 또 정책유통은 개발된 정책대안을 이슈별·아이템별로 유통할 수 있는 유통망을 확보키로 했는데 원포인트 개헌에 대한 대중적 확산을 위한 활동 등에 나서는 한편 24시간 체인점이나 영화관 등에서 가볍게 무료로 볼 수 있는 타블로이드 무가지 형태의 (격)주간지를 발행한다. 이와함께 연구원의 방송출연 등을 통해 홍보하고 온라인을 통한 일상적 지지자들에의 홍보를 강화키로 했다. 싱크탱크는 생산과 유통에 온라인 지지자들을 결합시키기 위해 정책 생산시 온라인 생활인들과 전문가의 자문을 구해 정책현실성을 제고하고 정책 유통시 회원과 온라인 지지자들을 통해 배포망을 확보키로 했다. 특히 싱크탱크는 정책생산의 경우 전문가들이 중심이 되도록 하되, 생활(전문인)인들의 검증을 통해 정책시장의 적용가능성이 높은 정책을 생산토록 하고 정책유통에서도 관련지지자들이 결합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전통적인 싱크탱크운동과 시민운동방식을 결합하는 것이 효율극대화를 기할 것으로 보고 있다. ■ 재단운영, 기업 기부금 운영… 기업 정치관여 우려 친노그룹은 직업 정치인·시민사회인사 및 온라인 지지자·준비위 운영위원회 등으로 재단 준비위원회를 구성키로 했다. 싱크탱크는 준비위 발족과 더불어 사무실을 확보하는 한편 대대적인 발기인 모집을 위한 실절차를 진행키로 했다. 친노그룹은 재단 연구기금마련과 관련, 준비위원회에서 논의하되, 사무실확보 및 최소 상근시스템 구성을 위한 초기출연금을 갹출하고 각종 후원회비와 사업수익금으로 재단을 운영키로 했다. 이와 관련, 친노세력은 범 진보개혁진영에 인물이나 조직운용방식에 따른 조직화와 집단화라는 비정치노선적 흐름이 퇴조하고 정책이념을 중심으로 분화되고 결집되는 바람직한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고있어 싱크탱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근 진보논쟁에서 드러나듯이 진보개혁적 정책이념을 의제화 할 수 있는 정치사회세력이나 진보매체의 역부족현상이 일고 있다. 즉 개혁적인 정책노선을 어느 누구도 의제설정하는 데 실패하고 부분적이고 파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친노그룹은 보고 있다. 또한 논쟁이란 미명하에 창조적 분화와 단결이 아니라 불필요한 감정싸움으로 인해 대동단결의 분위기를 저해하는 측면마저 나타나고 있다. 이에 반해 지역주의정당이자 범보수진영인 한나라당은 지역거점을 명백히 가지고 있는 ‘올드라이트’와 신보수 정책이념을 중심으로 하는 ‘뉴라이트’가 결합되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도 정책을 개발하는 싱크탱크는 존재하지만 집권과 집권이후의 정책프로그램에 대한 마스터플랜이 없거나, 혹은 정책노선의 관점이 없이 ‘좋은 아이디어’만 주장하는 수준. 친노그룹은 아무리 좋은 정책아이디어라 해도 그것을 정책으로 적용할 수 있는 능력, 즉 집권을 준비하는 정치세력과의 연대가 없이는 한낱 공허한 주의주장이라고 보고 있다. -------------------박스처리------------------- 연구기관? 권력기관? ■ 아태평화재단 한반도 평화통일과 아시아의 민주화, 나아가 세계평화에 기여하기 위해 세운 학술·연구재단. ‘재단법인 아태평화재단’(아태재단)쪽에서 설명하는 재단의 설립 취지다. 설립 취지만 놓고 본다면 아무런 문제될 게 없는 조직이다. 그러나 아태재단은 1994년 1월 설립 이후 줄곧 논란에 휩싸여왔다. 순수한 학술·연구재단을 넘어서는 ‘무엇’이 있을 거라는 의혹이 늘 시빗거리였으며, 그런 의혹은 재단 살림을 맡아왔던 이수동 전 상임이사가 이용호 씨로부터 5천만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어느 때보다 증폭됐다. 지난2001년 말 아태재단은 김 대통령의 동교동 사저 바로 옆에 빌딩을 신축해 사무실을 옮겼다. 7년 동안의 ‘셋방살이’를 끝내고 김 대통령 퇴임에 대비해 영원한 둥지를 튼 것이다. 지상 5층, 지하 3층, 연건평 1,489평 규모로, 394평의 터는 야당 시절 김 대통령 집을 감시하던 사찰 가옥 2채를 포함해 모두 4채를 사들여 조성했다. 터를 사는 데 30억원이 들었고, 건물을 짓는 데도 별도로 50억원 정도가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통령 임기중에 퇴임 뒤를 대비한 재단 건물을 신축한 것을 두고 한나라당 등은 아태재단을 일해재단과 빗대 공격하기도 한다. 퇴임 뒤에도 ‘수렴청정’을 하기 위한 정지작업이라는 얘기다. 물론 아태재단쪽은 “비교할 걸 비교하라”며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 재단 이름을 아태평화재단으로 한 것도 김대중 대통령을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아우르는 세계적 지도자의 이미지로 만들기 위한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아태재단은 순수 학술단체라고 보기에는 규모가 컸고, 고문과 자문위원 등으로 참여한 인물들도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과 코라손 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 등 해외 저명인사들과 김수환 추기경, 조순 씨 등 매우 화려했다. 또한 내부 진용은 김대중 대통령의 급진적 이미지를 상쇄하기 위해 군 출신인 임동원 현 청와대 통일특보가 사무총장으로 영입되는 등 대부분 보수적 인사들로 짜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에 큰 영향을 끼친 디제이피연합 아이디어가 아태재단 안에서 나오는 등 대선 싱크탱크 구실도 톡톡히 했다. 97년 대선 뒤에는 아태재단 출신들이 정권 요직에 대거 포진했다.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 전도사 역할을 해온 임동원 특보를 비롯해 이강래 전 청와대 정무수석 비서관, 나종일 전 안기부 1차장, 신건 국정원장, 유종근 전북지사, 박태영 전 건강보험공단 이사장, 남궁진 문화관광부 장관, 김삼웅 <대한매일> 주필, 황용배 전 마사회 감사 등도 아태재단을 거쳤다. 아태재단 출신들의 요직 포진은 김대중 대통령의 대통령 만들기에 대한 논공행상 성격과 함께 정권의 정책 브레인 구실을 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아태재단이 김대중 대통령의 정계복귀와 대선 과정에서 당시 여권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던 것은 무엇보다 아태재단이 김 대통령의 정치자금 모금 창구 구실을 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태재단은 설립 당시 외교통상부에 신고한 기본자산이 17억6500만원이었다. 설립 과정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출연한 금액은 15억1천만원으로, 부인 이희호씨의 명의로 되어 있던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대지와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임야 등을 팔아 마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제2 일해재단 일해재단은 대통령이 재임중 설립했다. 출범 목적은 아주 단순했다. 1983년 버마 랑군 국립묘지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유자녀 교육을 지원한다는 목적으로 서울시교육위원회의 허가를 받아 설립됐다. 84년 11월에는 일해재단의 목적이 국가의 안전보장과 평화통일·외교전략을 연구하는 것으로 바뀌고, 87년 8월에는 일해연구소로 이름이 변경돼 외무부 등록단체로 바뀌었다. 그러나 정권 교체 뒤 일해연구소가 5공의 유산으로 지탄받자 88년 5월 다시 세종연구소로 이름을 바꾸었고, 89년 7월에는 정계·학계·재계·언론계·문화계·사회계 등 각계 원로인사로 임원진을 개편했다. 91년에는 국가연구소로 재편하는 문제와 거액의 자산처리 문제 등으로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정치색을 완전히 탈색하고 순수 민간연구소로 축소돼 재출범했다. 일해재단의 암울한 미래는 출범 당시부터 내재된 것이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재벌급 기업인들로부터 거의 강압적으로 거액의 기부금을 받았다. 네 차례에 걸쳐 60억원을 낸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은 돈을 내는 과정 자체가 첩보극을 방불케 했다. 김 회장은 경호실 근처 골목길에서 경호실 차량으로 바꿔탄 뒤 청와대 부근 안가에서 대통령과 독대했다. 기업 국영화 등으로 재계가 바짝 긴장한 상태에서 청와대로부터 암시를 받고 돈을 냈다는 게 김 회장이 검찰에서 진술한 내용이다. 모두 50억원을 낸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은 부친이 합수부에서 3개월간 조사받은 악몽 때문에 돈을 냈다. 특히 김 회장은 동부그룹이 일해재단 설립자금 모금 대상에서 빠지자 “왜 우리만 빠졌느냐”며 50억원을 자진납부한 것으로 밝혀졌다. 장치혁 고합그룹 회장은 검찰에서 “84년까지 성금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청와대 공식만찬에도 초청되지 않아 극도로 불안해하다 대통령과 독대하고 자금사정이 어려웠지만 부랴부랴 돈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일해재단은 처음부터 연구목적이 아니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퇴임 뒤 수렴청정을 위해 설립한 것으로 5공 청문회 등을 통해 드러났다. 500억원의 기금, 20만평이 넘는 대지에 초호화판 영빈관까지 갖추고 있었으며, 연구인력은 20명선인데 비해 관리인력은 120명이나 되는 기형적 구조를 하고 있었다. 결국 대지 20여만평 가운데 19만평은 국가에 귀속시켰으나, 15만평을 기증했던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비롯해 ‘기금 기부자’들이 연고권을 주장하며 거세게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태재단과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김원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