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청와대발 개헌 발의가 결국 ‘조건부 유보’됐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중심당, 통합신당추진모임 등은 4월 11일 오전 회담을 갖고, “개헌 문제는 18대 국회 초반에 처리하기로 한다”는 데 합의하고,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중 개헌 발의를 유보해주실 것을 정중히 요청한다”고 밝혔다. 청와대도 이에 화답했다. 청와대는 11일 국회 원대대표 6인이 차기 국회 초반에 개헌 문제를 처리하기로 합의하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임기 중 개헌 발의 유보를 요청한 것에 대해, “오는 18일로 예정된 개헌 발의를 조건부로 유보할 수 있다”고 밝혔다. ■청와대 “당론으로 결정하고 국민들에게 약속하라”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은 이날 오후 춘추관에서 가진 브리핑에서 “각 당이 당론으로 결정하고 국민들에게 책임 있게 약속하려는 의지를 보인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정당 대표들과 개헌의 내용과 추진 일정 등에 대해 대화하고 협상할 용의가 있다”고 전했다. 문 실장은 “그동안 대통령은 여러 차례 개헌에 대한 정치적 대화를 제안한 바 있다”며 “원내대표단의 합의는 늦었지만 이에 대한 응답이거나 새로운 제안으로 보며, 이것으로 대화의 문이 열렸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그는 “다만 이 사안의 중대성으로 볼 때 각 당이 차기 국회에서 개헌을 당론으로 결정하고 정당 간 합의 등을 통해 국민들에게 책임 있게 약속하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본다”면서 “각 당이 당론으로 결정하고 국민에게 책임 있게 약속하는 의지를 보인다면 대통령은 개헌 내용과 일정에 대해 대화하고 협상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문 실장은 이어 “개헌에 관한 의지는 변함이 없다”면서도 “원칙적으로 당초 정해진 절차대로 진행해갈 계획이지만, 중요한 사정의 변경이 생겼기 때문에 원내 대표단의 합의로 인해서 정치적 대화가 결실을 맺을 전망이 보인다면, 그동안까지는 개헌의 발의를 유보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그러나 “그런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청와대는 당초의 일정대로 즉시 개헌 발의를 하겠다”고 밝혔다. 즉, 17일 국무회의에서 개헌안을 의결하기로 한 일정은 일단 유보하고 정치권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게 청와대의 입장이다. 문 실장은 노 대통령이 지난 8일 ‘개헌 발의에 즈음한 특별 기자회견’에서 “개헌을 다음 정부와 다음 국회에 넘길 경우 대선주자들이 임기 단축을 약속해야 한다”고 조건을 단 부분에 대해서도 협상과 대화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뒀다.
문 실장은 “대화를 하는 마당에 있어서 사전에 아주 까다로운 조건을 설정해놓고 하는 것이 어떤지 모르겠다”며 “구체적 내용은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합의돼야 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대선주자들의 임기 단축 부분도 대화와 협상을 할 수 있다고 열어둔 것으로 받아들여 달라”며 “임기 단축 부분도 협상할 수 있다는 뉘앙스로 해석해 달라”고 주문했다. ■ ‘명분’보다 ‘실리’ 선택한 청와대 청와대가 정치권의 요청을 전격 수용한 것은 ‘명분’ 보다 ‘실리’를 선택한 것이라는 게 정치권 전반의 분석이다. 실제로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 역시 “그 동안 대통령께서 여러 차례 개헌에 대한 정치적 대화를 제안한 바 있으며 이번 원내대표단의 합의는 늦었지만 거기에 대한 응답이거나 새로운 제안으로 보며 이것으로 대화의 문이 열렸다고 본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는 ‘발의’라는 절차보다 ‘개헌’ 그 자체에 목적이 있다는 노 대통령의 인식과도 일맥상통한다. 노 대통령은 지난달 8일 정부의 개헌 시안 발표에 맞춰 가진 특별기자회견에서 “각 정당과 대선후보 희망자들이 책임 있고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면 개헌 내용과 추진 일정 등을 협상할 뜻이 있다”고 제안한 바 있다. 당시 노 대통령은 비록 “합의나 공약에 차기 대통령 임기를 1년 가까이 단축한다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지만, “개헌의 내용과 일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신뢰할 수 있는 당론과 대국민공약을 한다면 개헌안 발의를 차기정부와 국회에 넘길 용의도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당시 노 대통령의 이 같은 제안에 대해 정치권 일각에서는 “당초보다 후퇴한 모습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은 “발의 자체에 높은 가치를 두고 있는 게 아니라 성사 가능성이 낮아도 발의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다”고 답했다. “대화가 진행되고 있는데 (발의) 날짜를 정해놓고 싹둑 자르는 것은 제안한 사람의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며 대화의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또한 청와대가 개헌 발의 유보를 전격 결정한데는 개헌 발의로 야기될 수 있는 국회의 ‘발목잡기’를 염두에 둔 것으로 분석된다. 이는 향후 국정 운영에 있어 국회 협조가 어느 시기보다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또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될 경우 입을 수 있는 정치적 타격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정치권이 개헌 문제에 대한 논란에 휩싸일 경우, 당장 시급히 통과시켜야 할 국민연금법 개정안부터 뒷전으로 밀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고려의 대상이다. 또한 국회의 동의를 구해야 할 한미FTA 비준 과정도 개헌 정국 여파로 난항을 겪을 수 있다. 이 경우 ‘임기가 끝나는 날까지 고삐를 놓지 않겠다’는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 의지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레임덕 현상이 가속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결국 개헌 발의 후 국회의 처리과정을 지켜보기보다는 개헌 이슈를 능동적으로 이끌어 갈 필요가 있다고 청와대는 판단한 듯 하다. ■ 열린우리당, 현안 처리에 걸림돌 될까 전전긍긍 열린우리당의 입장 변화 역시 한미FTA, 국민연금법, 사학법, 로스쿨법 등 현안 처리 등에 대한 부담감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는 한미FTA 체결로 모처럼만에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는 상황에서, 개헌 발의 이후 부결에 대한 정치적 부담감도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장영달 원내대표는 “개헌 유보 문제로 정세균 의장과 최고위원들이 모여 정치권에서 풀고 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고 의견 조율도 했다”고 이 같은 관측을 뒷받침했다. 장 원내대표는 “11일 아침 회동에서 나로서는 몇 가지 중요한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기왕 원내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 합의된 방향으로 결단하고 사후 보완은 각 당과 협의해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장 원내대표는 “정세균 의장과의 협의는 합의문을 작성하는 도중에 이뤄졌다”고 밝혔다. 또 청와대 문재인 비서실장과의 협의에 대해서는 장 원내대표는 “며칠 전 개헌 발의 유보에 대한 생각을 전했고 ‘한번 고민해봐야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장 원내대표는 “제 정당이 개헌 문제로 소용돌이치는 것에서 해방되고자 한다”며 “국민연금법, 사학법, 임대주택법 등 모든 민생 법에 충실히 임해주길 바라는 뜻이 있었다”고 밝혔다. ‘18대로 넘긴다는 것은 개헌을 하지 않겠냐는 것 아니냐’는 일부의 지적에 장 원내대표는 “안하겠다는 것이 아니다”며, “각 정파의 정책위의장이 참여하는 개헌 추진기구 설치를 제안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정세균 의장도 “국민을 배려하는 정치권의 노력이라고 생각한다”며 “국정 현안에 집중하도록 하기 위한 결단”이라고 공감을 표했다. 그는 “개헌의 필요성을 국민은 공감하지만 현실을 감안해서 국회가 잘 처리하기 위한 방안으로 결단한 것”이라며 “국회의 긍정적 역할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권의 개헌 유보 요청과 청와대의 ‘조건부 수용’의 배경에는 영남친노그룹의 좌장 격을 맡고 있는 김혁규 의원의 역할도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의원의 한 측근은 “6인 원내대표 모임이 있기 하루 전 김 의원이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을 만나 ‘조건부 개헌 유보의 입장을 취하라’고 주문했다”고 전했다. 김 의원은 특히 이 자리에서, “한미FTA 등으로 고무된 현재의 분위기에서 개헌 발의는 찬 물을 끼얹는 일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고 이 측근은 전했다. 한편 이기우 열린우리당 공보담당 원내부대표는 “우리당이 대통령의 개헌 발의를 막아서는 안 되고 헌법상 보장된 설명의 권한을 막아서도 안 되고 국회가 논의해야 하는 헌법개정 연구 임무를 방기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며 “실질적인 해결을 위해 이 같은 제안을 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부대표는 “노 대통령의 원포인트 개헌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정치권 합의는 있지만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법과 시기에 대한 이견은 존재했다”며 “18대 초반에 처리하기로 합의한 것은 17대 권한 밖이지만 현실적 여건상 정치권의 국민에 대한 약속으로 보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재성 열린우리당 대변인도 “제 1당이라도 개헌은 처리하기 힘들다”며 “2당의 한계로서 개헌 문제를 양보하지 않으면 국정 현안을 풀 수 없다”고 말했다. -유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