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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의 꺼지지 않는 불꽃

[서평] 이수병 평전, <암장>을 다시 읽다이수병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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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3호 ⁄ 2007.07.03 10:41:18

서도원(52·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도예종(51·삼화토건회장), 하재완(43·양조장 경영), 이수병(37·삼락 일어학원 강사), 김용원(39·경기여고 교사), 우홍선(45·한국골든스탬프사 상무), 송상진(46·양봉업), 여정남(31·전 경북대학생회장). 이 이름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극히 적다. 아니, 이 이름들이 어떠한 이유로 이 자리를 빌려 등장했는지를 아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소수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들이 속해 있던 시대를 너무나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 시대는 우리 현대사에 ‘길가의 풀꽃들마저도 짐승처럼 보이던’ 시절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9일은 이들의 생명이 육신을 빠져나간지 꼭 32년이 되는 날이다. 그리고 얼마 전 법원은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32년 전 내려진 사형 결정이 ‘합법의 외피를 두른 살인 행위’였다고 법원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날 법정을 지켜본 이들은 “진실은 결국 밝혀지게 돼 있다”는 익숙한 교훈을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유가족의 눈물 앞에서는 할 말을 찾기 힘들었다. 32년이 지났다. 사람의 나이 30은 ‘이립(而立)’이라고 부른다. 논어(論語)의 ‘三十而立(서른 살에 인생관이 서다)’에서 온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얼마나 그 뜻을 세웠는가. ■그대 타는 불길로, 그대 노여움으로 서두에서 말했듯이,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민청학련 사건’을 자신의 경력에 자랑스럽게 포함시키는 사람은 우리 정치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 두 사건은 분명 단단한 고리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민주화투쟁’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고, 나머지 하나는 ‘빨갱이’의 상징으로 둔갑되어 왔다. 동학농민전쟁 이후,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줄기의 뿌리는 ‘민족’이라는 일종의 공동체 개념과 맞닿아 있다. 일제시기 좌우익을 막론하고 치열하게 진행되었던 민족해방투쟁이 그러하고, 해방 후의 남북합작 운동과 통일정부 수립 운동이 그러하며, 4·19 이후 한꺼번에 분출되었던 남북학생회담 투쟁 등이 그러하다. 물론 그러한 일련의 운동의 순기능적 유산은 지난 1980년대의 민주화 투쟁과 1990년대의 통일투쟁을 거쳐 오늘날의 남북교류 운동의 그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만, 그 투쟁의 양상과 방법론이 시기 혹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발전하고 있을 따름이다. ■반역의 어둠 뒤집어 새날을 여는 사람들 4·19를 일컬어 흔히들 ‘미완의 혁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한 편으로는 타당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부적절한 표현이다.

4·19는 ‘시민혁명’의 색깔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전 계층 전 계급이 참여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실제로 4·19의 주역은 학생과 도시 인텔리겐차였으며, 바로 거기에 4·19의 시작점과 변곡점이 있다. 3·15 부정선거와 그에 따른 민중의 저항, 그리고 다시 그것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독재정권의 피의 진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젊은 학생층을 제외한 지식인 계층은 대부분의 시간을 침묵으로 소일했다. 4·19 기간 동안 흘린 피의 대부분은 어린 학생들의 몫이었다. 중견소설가 김원일의 중편소설 <마음의 감옥>에는 이 당시의 부채의식을 원죄처럼 품고 사는 한 형제의 이야기가 지극히 담담한 어조로 흐르고 있다. 우리는 하나의 혁명이나 변혁을 이루고 난 후, 그 주역세대의 변화를 예의주시한다. 4·19 세대와 6·3세대, 긴급조치 세대와 민청학련 세대, 그리고 광주항쟁 세대와 6월항쟁 세대 등으로 대표되는 우리 현대사의 각 세대들 중에 부침(浮沈)이 가장 극명한 이들이 바로 4·19 세대와 6·3 세대이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 구호를 1980년대 학생운동 진영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한국현대사에 대해 조금 더 공부해야 한다. 이 구호는 바로 4·19 직후 남북학생회담을 추진하던 이수병 등이 선도적으로 외친 구호이다. 내 앞에 있는 이 책, <이수병 평전(민족문제연구소 펴냄)>은 1992년 4월 <암장>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던 이수병 선생의 일대기를 보강된 내용과 자료를 통해 새로이 펴낸 책이다. 무엇보다도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관련한 충실한 증언을 담아냄으로써, ‘단절된 시간의 나이테’와 오래 만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대학 다닐 때 내 곁에는 한 명의 특별한 벗이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수병 선생은 나에게 있어 ‘한 명의 민주열사’ 이상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선생의 첫째 아들이 나와 같은 과 동기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 참 ‘평범’했다.

‘데모질’을 권유하는 선배들을 피해 다녔고, 조금이라도 ‘의식화된’ 말은 꺼려했다. 그때 나와 다른 ‘운동권(참 오래된 말이다)’들은 그것을 의아해했다. “아버지가 그런 분이면, 아들은 당연히 ‘데모꾼’이 되어야 하는 거 아냐?” 철없는 우리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어쩌면, 그때 우리가 살던 시간대가 ‘동지가 아니면 모두 적’인 ‘이분법의 시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벗은 지극히 평범하고 소리 나지 않게 학교를 다녔다. 그러다가 1990년 4월 9일 ‘이수병 선생 추모제’가 돌아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랄탄’에 눈물도 흘려보고, 이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조금씩 익혀가고 있던 새내기에게 그러한 행사는 참으로 경이로웠다. 문익환 목사, 백기완 선생, 이부영 의원(당시에는 ‘꼬마 민주당’), 민가협 어머님들, 민자통 어르신들, 경희 민주동문회, 그리고 장기수 어르신들. 당시 행사에 오신 분들의 면면이었다. TV에서나 만나던, 더구나 ‘남한 빨갱이들 중에 가장 지독한 놈들’이라고 일컬어지던 분들을 직접 뵐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전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 암흑의 날 우리에게는 이런 과거가 있었다. “유신헌법을 개정하자고 하거나 그런 말을 들었다고 전하는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해서 비상군법회의에 회부해서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정권의 뜻에 따르지 않고 간첩이라고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온갖 고문으로 만신창이를 만들어 자백을 받아 낸 다음 대법원 사형확정 판결을 내린 다음날 가족도 모르게 사형에 처해서 화장시켜버렸다. 소위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이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란 지난 1974년 4월 3일 박정희 유신 독재정권에 맞서 전국 대학생들이 총궐기했던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23명을 지목, 국가 변란과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했던 사건을 말한다. 이들 중 서도원, 하재완·김용원·송상진·도예종·이수병·우홍선·여정남 씨 등 8명에 사형, 15명에게 무기에서 징역 15년의 중형이 선고되었다. 특히 사형이 선고된 8명은 다음해인 75년 4월 9일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있고서 하루도 채 되기 전 20여 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소위 ‘사법살인’ 사건의 피해자들이다. 이를 두고 스위스 국제법학자협회는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평가하기도 했다. 이들이 독재정권에 의해 ‘살인’을 당했을 때, 내 벗은 겨우 여섯 살이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 자신이 여섯 살 때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벗은 그때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야만의 역사’를 품고 사는 사람들 우리는 저마다의 가슴에 굵은 상처 하나씩을 품고 살아간다. 아무리 밝아 보이는 사람도 미소 뒷켠에 숨겨진 눈물빛 기억이 있다. 하물며 지아비와 아버지를 영문도 모른 채 잃은 사람들은 어떠할까.

사형이 집행되던 날, 사형장이 있는 서대문형무소로 향하는 호송버스 앞에 드러누워 울부짖던 문정현 신부는 호송버스에 치여 평생 다리를 저는 불구자가 되었다. 형 집행에 항의하던 가족들은 ‘검은 가죽 잠바’들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가고 협박을 당했다. 그리고는 다시는 망자(亡子)들과 만날 수 없었다.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누런 사각봉투에 담긴 죽은 이의 뼛가루와 조작된 유서뿐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조국 근대화’와 ‘한국적 민주주의’와 ‘7·4공동성명’을 치적으로 내세우는 박정희 정권의 본질이다. ‘농촌을 죽여서 도시를 개발하는’ 박정희 식 경제개발은 수많은 ‘공돌이, 공순이’와 ‘쪽방촌’과 ‘도시빈민’과 ‘농촌 공동화’를 야기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지만 말이다. 언젠가 그 벗에게서 “고등학교 때까지 형사들이 늘 따라다녔다”는 말을 듣고 나는 비로소 국가보안법과 ‘연좌제’의 짙은 그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벗이 왜 그리 소극적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 먼 곳의 벗에게 보내는 편지 앵무새를 기르는 가장 큰 매력은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생물’이라는 점이다. ‘국가보안법 폐지 = 묻지마 빨갱이’, ‘사립학교법 재개정 반대 = 묻지마 빨갱이’, ‘언론관계법 개정 = 묻지마 빨갱이’, ‘과거사 진상규명 = 묻지마 빨갱이’라는 아주 속편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정녕 세뇌된 사람들은 그들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전철에서 늘상 마주치는 “불신 지옥, 믿음 천국” 류나 “도(道)나 기(氣)에 관심있으세요?” 류처럼 무지는 광신을 낳고, 광신은 다시 무지를 생산하는 ‘세뇌의 순환고리’ 속에서 그들은 살아가고 있다. 무지와 광신을 넘어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으로 가는 길은 어찌 보면 쉽다. 그것은 우리 안의 냉소와 불신을 걷어치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의 제일 쉬운 방법론은 바로 ‘가끔씩 멈춰 서서 되돌아보기’이다. 지나간 과거의 일 중에서 어두운 부분이 있다면, 마땅히 그 잔재를 처리하고 가야 한다. 수구진영이 말끝마다 내뱉는 “경제도 어려운데” 따위의 말들은 그들의 인분을 먹고 사는 짐승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다. ‘진도 나가자’는 말들을 많이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진도를 나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마음이 갇혀 있는 감옥부터 탈출해야 한다. 4·19는 ‘미완의 혁명’이 아니라, ‘5·18’과 ‘12 ·19’를 지나 여전히 ‘현재진행 중’인 ‘시민혁명’이다. -유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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