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표 한나라당 의원이 지난 5일 ‘한나라당 혁신론’을 제기해 눈길을 끌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부패로부터 해방 △특권의식 배제 △대미 자주외교 강화 △대북 유화정책 추구 △성장과 분배의 조화 △무사안일에서 탈피 △기득권 타파 등을 주장하고 있다. 그야말로 옳은 소리요, 그야말로 한나라당에 없는 ‘시대정신’이다. 홍 의원은 이와 같은 내용의 혁신을 외치면서 “보수가 혁명을 해야 집권할 수 있는 길이 보이는데 지금처럼 대안 없는 반대와 앉아서 반사적 이익만 누리는 그런 정책은 곤란하다”고 한나라당에 ‘쓴 소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홍 의원의 주장을 가만히 놓고 보면 참여정부가 말하는 ‘시대정신’의 성격과 흡사하다. 참여정부 기간 내내 주장하고 해 온 것이 ‘정부 혁신’이며, ‘기득권 타파’였다. 전시작전권 환수와 한미관계의 재조정을 통해 대미자주외교의 강화했을 뿐 아니라 대북 유화정책 역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트레이드마크다. 또한 성장과 분배 역시 한미FTA협상을 진행하면서 복지예산을 늘리는 참여정부의 정책과 일맥상통한다. 홍 의원이 누군가? 모래시계에서 박상원 씨가 연기한 검사 역할이 홍 의원을 모델로 한 이야기라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지난해 한나라당 혁신위원회를 주도하면서 한나라당의 개혁 작업에 큰 공이 있으며 ‘반값 아파트’ 등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노동당 다운 정책으로도 유명하다. 서울시장 후보에 나가고자 한참 열이 올라 있던 2005년, 홍준표 의원은 4월에 출판한 책을 6개월이나 놔두다가 10월 출판기념회를 하며 서울시장 선거전에 나섰다. 그런데 이 책 제목이 멋있다. 설경구씨가 주연한 박하사탕을 연상하듯 <나 돌아가고 싶다>다. 이 책에서 홍 의원은 자신의 지난날을 회상하며 정치권의 씁쓸함을 전한다. 홍 의원은 도대체 어디로 돌아가고 싶은 것일까? ■홍준표 의원, 그냥 보면 꽤 괜찮은 아저씨 홍 의원은 사실 인상이 무척 좋은 편이고, 서글서글하면서 미소가 살짝 담겨 있는 눈이다. 하는 행동도 보수주의자라기보다는 자유주의자에 가깝다. 홍 의원은 국회 기자실에서 한나라당에 적대적이라고 말하는 인터넷 언론들과도 친한 편이다. 한나라당에서 몇 안 되는 쓸 만한 ‘말’들을 해 주는 의원이기 때문이다. 그런 홍준표 의원이 주도했던 ‘한나라당 혁신위안’은 열린우리당의 국민경선제를 도입하는 등 한나라당의 구습 정치를 탈피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이런 안이 쉽게 통과되지는 않았다. 당시 한나라당 지도부에선 혁신위안을 수정할 기세였고, 홍 의원은 연일 기자실을 들락거리며 혁신위안 원안 통과를 외쳐야 했다. 이 안이 부결될 위기에 처하자 한나라당 소장파인 원희룡 의원은 밤중에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의 관사를, 다음날 아침 일찍 이명박 서울시장을 찾아가는 등, 당시 당 집권층인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측을 압박하는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겨우 혁신위안 원안이 통과된다. 지난 해, 한나라당이 열린우리당과 한참을 싸웠던 사립학교법 개정 문제 당시에도 홍 의원은 ‘당연히 개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렇듯 대충 살펴보면 홍 의원은 ‘합리적 개혁세력’으로 보이는 꽤 괜찮은 아저씨다. 이런 의미에서 홍 의원이 주장하는 ‘보수개혁론’이야말로 홍 의원의 원래 색깔일 가능성이 높다. 대북 정책에서도 홍준표 의원은 ‘한나라당의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와 관련해, 작년 겨울 국회 귀빈식당에서는 한나라당 송영선 의원이 주최하는 대북관련 토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홍준표 의원이 청중으로 참여했다.
그날 토론회가 대북 강경 일변도의 한나라당 정책과 같이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청중석에 있는 홍 의원에게 발언권이 주어졌다. 그런데 우리의 홍 의원, 토론회의 분위기와 다르게 “한나라당이 대북 기조를 현행대로 유지하면 다음 대선에서 또 필패한다”는 발언을 했다. “때문에 지금이라도 시대 흐름에 맞게 대북 문제에 있어 방향 전환을 해야 한다”는 입장도 밝혔다. 홍 의원의 주장에 송영선 의원이 반박하고, 다시 홍 의원이 반박하고 하는 도중에 송영선 의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래서 저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송 의원의 이런 발언은 당시 분위기상 ‘누가 그걸 몰라서 그러나? 하지만 한나라당 분위기가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냐’는 소리로 들렸다. 대북관련 토론회를 하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이런 송 의원을 홍 의원은 씁쓸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같이 망가지는 홍준표, 홍준표의 굴욕 이런 망가지는 모습(?)이 송 의원에게만 있었을까? 아니다. 홍준표 의원도 마찬가지다. 홍 의원 역시 송영선 의원이 했던 ‘그래서 저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와 같은, 아니 똑같은 말을 하는 굴욕을 당한다. 2006년, 그러니까 사립학교법 문제로 한나라당이 국회를 버리고 거리에서 전전할 때의 이야기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홍준표 의원은 원래 사립학교법 개정에 ‘찬성’이었다. 사립학교법이 국회에서 통과되기 1년 전인 2005년 3월,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사학법을 처리하지 않으면 한나라당은 ‘공공의 적’이 된다”고 당 지도부를 비판했다. 한나라당이 사립학교법 문제로 국회를 버리고 거리로 나서기 1년 전 이야기다. 사립학교법의 핵심인 ‘개방형 이사제’에 대해서도 홍준표 의원은 정확히 ‘자기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홍 의원은 “개인기업도 사외이사를 두는 마당에 공익법인이 이를 거부한다는 게 말이 되냐”며 아주 확실한 입장을 밝혔다. 이런 입장이던 그가 정확히 1년 후, 사립학교법 반대투쟁에 나선다. 홍 의원은 사립학교법이 잘못됐다는 논리와 자료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서한’을 통해 통과된 사립학교법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줄 것을 요구한다. “사립학교법 개정을 하지 않으면 한나라당이 공공의 적이 될 것”이라고 말하던 그가 사립학교법 반대의 선봉장에 선 것이다. 이에 대해 홍 의원이 말이 바뀐 것을 지적하며 따져 묻자 그는 이런 저런 말로 대꾸하다 결국 한 마디 한다. “당에서 밀고 나가는데 어떡합니까?” 홍준표 의원의 굴욕? 그렇다 분명히 홍준표의 굴욕이다. 소신을 꺾는 것이야말로 정치인들에게는 가장 큰 굴욕이다. 자신이 토론회장에서 송영선 의원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봤듯이, 이때는 그가 안타까운 사람이 된 것이다. 홍 의원을 위해 변명하자면, 그에게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가 말을 바꾼 시기는 5·31 지방선거의 후보를 결정하던 시기였고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 선언을 한 그는 맹형규, 박진, 박계동 등의 후보와 경쟁해야 했다. 이런 시점에서 당과 괴리되는 발언을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홍준표 의원이 자기 소신을 꺾으면서까지 매달렸던 서울 시장선거는 결국 어떻게 됐을까? 모두가 알다시피 홍 의원은 소신까지 버리고 나서고, 맹 의원은 의원직까지 버리고 나섰지만 오세훈 시장이 전략공천됐다. 자기 소신까지 버리고 나선 홍 의원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 격’이 된 셈이다. ■ 되지도 않는 개혁안? 처음으로 돌아가서 홍준표 의원의 ‘한나라당 혁신론’을 살펴보자. △부패로부터 해방 △특권의식 배제 △대미 자주외교 강화 △대북 유화정책 추구 △성장과 분배의 조화 △무사안일에서 탈피 △기득권 타파 이 안이 한나라당에서는 속된 말로 ‘잘 먹힐’까? 이런 혁신안은 한나라당을 혁신하자는 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나라당을 떠나겠다’는 표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홍 의원이 한나라당에서 이 안을 계속 밀어붙이고 나중에 그가 대선출마라도 하는 날엔 이렇게 바뀌어 있지 않을까? △한미동맹이 대한민국의 지상과제 △대북 퍼주기 반대 △기업규제 푸는 것만이 최선 △사립학교의 재산권 인정해야 그러고 나서는 송영선 의원처럼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라거나 본인이 말한 것처럼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그러는 걸 어쩌냐’고 변명하게 되지 않을까? ■ 언제까지 ‘나 돌아가고 싶다’만 외칠 것인가? 시간은 흘러 또 한 번의 선거 정국이다. 1년 전 홍 의원이 그랬던 것처럼 요즘 홍 의원은 여러 가지 선택을 앞두고 있다. 박근혜와 이명박 두 후보가 홍 의원을 서로 모셔가려고 하고 있고, 홍 의원은 ‘경선출마’라는 카드를 꺼낼 수도 있다. 탈당한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탈당하기 전 여러 패를 가지고 있던 입장과 비슷하다. 대선은 모든 것을 흡수한다. 본인의 의지가 강하지 않으면 자기 의지와 다르게 휘말려 들어간다. 홍 의원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자신의 소신과 시대정신을 좇을 것인가? 아니면 말 바꾸기와 소신 접는 것을 반복하며 다시 한 번 씁쓸하게 <나 돌아가고 싶다>를 외칠 것인가? 홍 의원이 주장한 개혁안이 현재의 한나라당에 먹힐 리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홍 의원이 아닐까? 홍 의원이 주장한 ‘기득권 타파’야 말로 본인에게 해당되는 이야기 아닌가? 소신을 버리고 망가지기까지 하면서 기득권 좇다가 결국 작년처럼 토사구팽당할 것인가? 홍 의원은 아직 50대다. 광장으로 나와 마음껏 달려야 한다. 자신의 의지대로 시대정신과 대의를 좇아가야 한다. 국민은 국민을 위해 자신을 버린 자에게 마지막에 수십 배의 책임을 채워준다. 정치인에게 책임이 무거워진다는 것은 그만큼 거인이 되어 간다는 의미이다. 국민은 그런 정치를 원한다. -유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