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미래가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에 대해, ‘인류는 반드시 멸종될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커다란 운석이 떨어져서 멸망하던지, 아니면 지구의 자장이 급변하여 지구상의 생물들이 거의 멸종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면 또 우리가 상상치도 못할 어떤 재앙이 실제로 무척 많겠지요. 우리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 앞에서도 매일 두려움에 떨지 않고 태연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듯이, 지구상의 인류가 장차 멸종할 것이라는 확신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크게 불안해하지는 않습니다.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고 말했다죠. 아마 그런 식으로 살아가도록 우리 몸 안의 유전인자가 코딩되어 있는 지도 모릅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막연히 인류문명이 발전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좀 삐딱한 시선으로 현대문명을 바라본다면 진보 발전했다는 현실이 그만 허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의심될 때가 많습니다. 조선시대보다 지금이 더 발전한 것인가? 사실 이러한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비교의 척도가 있어야 하고, 이것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질 수 있겠지요. 지금은 조선시대보다 평균수명도 길고, 자동차도 있고, 더 많은 영양분을 섭취하면서 살기 때문에 더 발전한 사회라고 한다면 수긍이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행복이나 즐거움 만족도 따위의 좀 추상적이고 본질적인 기준틀을 들이대면, 현재가 과거 조선시대보다 더 나은 사회라고 엄격히 판정내리기 곤란한 측면이 있습니다. 지금의 선진국과 후진국을 비교하는 것도 마찬가지겠죠.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인 방글라데시 국민들이 삶의 만족도 측면에서 최고점을 받고 있다는 조사를 보면, 우리가 뭔가 착각을 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 지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실제로 지금은 고기도 많이 먹고, 좋은 옷을 입으며, 더 나아가 각종 편리한 문명의 이기들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조선시대와 비교하면, 그 당시의 왕들이 부럽지 않은 호사를 많이 누리고 사는 측면이 있지요. 그러나 조선시대 사람들 중에서 왕들이 최고로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듯이, 지금도 그런 누림들이 반드시 우리의 삶에 더 이로움과 행복감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평균수명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단지 더 오래 산다고 해서 더 발전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조선시대에는 이른 나이에 성인이 됩니다. 중산층의 양반집 자제라면, 열 살 전후로 이미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의 책들은 다 섭렵하지요. 지금으로 치면 대학을 졸업한 정도의 교육을 이미 마치게 됩니다. 또 결혼도 일찍 하게 됩니다. 아마 열두 살 정도 넘으면 결혼을 하게 되고 상투를 올립니다. 지금으로 치면 그 정도의 나이에 대학을 졸업하고 이미 사회에 진출하게 되는 것이지요. 실제로 결혼을 한 이 젊은이에게 나이 드신 어른들이 말을 놓지 않고 존대를 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치현실과 사상, 이념, 철학 등에 대해 서로 토론을 하였지요. 요약하자면 조선시대에는 일찍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한국사회는 어떨까요? 거의 서른 살이 되어야 학업 마치고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의대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삼십 대 중반은 되어야 실제로 독립할 수 있는 어엿한 성인이 됩니다. 요즘의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는 경우에는 아마 마흔 줄이 넘어야 제 밥벌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서른 살이 넘으면 손자를 봤습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지요. 물론 당시에는 평균 수명이 무척 짧아서 장수하는 사람들이 드물었지만,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기간이 지금과 비교해서 무척 짧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습니다. 요즘은 젊은이들의 교육기간이 너무도 길고 고통스럽다고 느낍니다. 조선시대보다 더 오래 산다고 반드시 삶의 질이 좋아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 자동차 사고로 몇 명이 죽을까요? 약 8000 명 가깝더군요.(2005년 통계수치는 7776명이었습니다. 2000년에는 1만1844명이었는데 많이 나아진 수치입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와 전쟁을 하면서 해마다 약 8000 명이 전사한다면, 우리사회는 아마 카오스 상태에 빠질 것입니다. 그리고 해당 교전국과 나라의 명운을 걸고 결전을 치를 것입니다. 하지만 교통사고로 그 정도 사람이 죽는 일은 우리 모두 익숙하게 받아들입니다. 자살하는 사람 수를 보면 더욱 경악할 일입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5년 자살로 죽은 사람 수는 1만247명이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자살률 통계는 아마 없겠지만, 지구상의 근대 이전 사회에서 자살이 크게 사회문제가 되었다는 보고는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현대사회의 삶의 질이 좋아졌다는 점에 대해서 크게 의문을 가지게 되는 부분입니다. 현대문명의 이기 중에서 가장 각광받는 것 중의 하나인 자동차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 지 따져볼 일입니다. 자동차뿐만이 아닙니다. 전화 컴퓨터 등등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에 분명한 이익을 주고 있다고 막연히 느끼지만, 그 실상을 따져보면 도찐개찐인 경우가 많습니다. 좀 뜨악한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팬티를 언제부터 입었을까요? 실제로 50년대에 들어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입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브레이저와 더불어 이 팬티도 문명의 이기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요즘 팬티를 입지 않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요. 그런데 실제로 팬티가 우리에게 이익과 만족감을 주는 물건일까요? 건강 측면에서 보면 팬티는 상당히 해로운 물건입니다. 여자들은 하루에 몇 번씩 소변을 보고는 그 때마다 휴지로 잔뇨를 닦아야 합니다. 이 휴지 또한 대부분 형광물질이 묻어 있어서 해로운 것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어떤 엄마가 항상 질 나쁜 화장지로 세 살 딸아이의 소변을 닦아준 결과, 그 어린 딸이 자궁경부암에 걸린 사례가 있을 정도입니다. 만약 여성들이 소변을 볼 때마다 휴지로 닦지 않는다면 팬티에 묻어서 하루 종일 냄새가 날 것입니다. 통풍이 안 되어 해로운 팬티를 왜 입을까요? 조선시대에는 여성들이 팬티를 입지 않았지요. 고쟁이를 입었습니다. 통풍이 잘되어 매우 건강한 의복이었습니다. 남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체온도보다 더 낮은 온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남성의 고환은 밖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남성들도 꽉 조이는 팬티를 입고 더구나 타이트한 바지를 입습니다. 갈수록 남성들의 정자수가 적어진다는 조사가 혹 팬티나 꽉 조이는 바지 때문은 아닐까요? 조선시대의 남성들 바지는 과도하게(?) 풍성했습니다. 건강한 의복이었지요. 브레이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브레이저를 하지 않는 여성은 거의 없겠지요. 하지만 브레이저를 착용함으로써 유방의 온도를 높여 유방암을 발생시킨다는 강력한 증거들과 주장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여성들이 브레이저를 반드시 해야 할 이유는 별로 없습니다만, 요즘 안하는 여성분들은 거의 없지요. 요컨데, 우리가 현재 누리는 사회적 삶과 문명의 이기들이 역사적 발전의 결과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류역사가 반드시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혹시 우리 인간의 오만과 편견, 그리고 커다란 착각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종은 악성종양인 셈입니다. 이대로 가면 언젠가는 이 악성종양 때문에 지구가 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구상의 인간들은 더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노력하고 살아가고 있지요. 만약 하느님이 계시다면, 하느님이 인간들을 보시기에 상당히 웃기거나 아니면 약간 걱정스러울 것만 같습니다. -송기삼 치과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