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노동운동의 힘은 단결과 연대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운동은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라는 ‘1국가 2총연맹’라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또한 IMF 이후 꾸준히 늘어난 비정규직은 노동자들 사이 다원화와 양극화 현상을 가져왔다. 노동자들이 서로 마주잡은 끈은 느슨해진 것이다. 무엇보다 노동운동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그동안 양적 성장을 이끌어냈지만, 전국적이고 산업별 차원의 대응이 주를 이루면서 이른바 ‘바닥’은 무너졌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견인차로 민주노조 운동에 앞장섰던 현대중공업노조의 제명은 노조의 조직력이 어느 정도 파괴되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이런 노동운동의 위기감을 안고 이석행 5대 민주노총 위원장이 시작한 현장대장정이 한 달 여를 넘겼다. 선반공을 경험해 노동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이 위원장이지만 “나만큼 현장을 잘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교만이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노동운동 지도부와 현장 조합원의 괴리는 심각했다. 전국을 돌며 하루 600여명의 현장 노동자를 만나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그가 8일과 9일 거제도에서 기자간담회에서 반환점을 향해 달리고 있는 현장대장정의 경험과 소회를 털어놨다. ■“민주노총이 현장 목소리 너무 모르더라” 대구의 한 중소업체의 노동자는 “무분별하고 세밀하지 못한 파업지침이 부담스럽고 대공장은 파업을 해도 다양한 방식으로 임금손실분을 보전하지만 중소업체들은 그대로 수십만원이 까진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파업을 하려면 모두가 제대로 힘 있게 해야 한다. 싸우려면 제대로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조직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던 총파업으로 파업에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중소영세업체 노동자들이 민주노총에 갖는 불만이다. 노동운동의 사회적 역할이 임금이나 노동조건 향상을 위한 운동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인 이슈와 논쟁에 뛰어드는 것도 있는 부분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미FTA 등 정치적인 이슈들로 인한 잦은 정치파업은 조직과 현장이 멀어져 가는 하나의 원인이었다. 실제 이 위원장은 8일 거제도 기자간담회에서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서 결정한 지침 한 장으로 결정되는 총파업 지침 등에 현장의 불만은 대단했다”고 털어놨다. 이 위원장은 “그늘진 곳에서 소외된 채 열심히 일하면서도 민주노총 조합원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있는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앞으로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은 현장대장정을 끝마친 뒤 대장정 관련 백서를 출간하고 이를 중심으로 민주노총의 정책에 적극 반영할 계획이다. 현장의 목소리가 충실히 반영된 민주노총의 정책 변화는 약해진 노동운동의 조직력 회복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임금 투쟁만으로는 부족하다” 민주노총에 대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불만 가운데 하나는 비정규직 노동자 등 노동자들 가운데도 열악한 노동자들의 현실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투쟁을 위한 민주노총 차원의 투쟁기금 모금운동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정규직 조합원들의 이야기는 노동운동 안에서 ‘정규직-비정규직’ 연대의 끈이 얼마나 느슨한 지를 보여준다. 이석행 위원장은 현장대장정 과정에는 열악한 노동조건에 처한 이들을 찾는 일정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이 위원장은 그들에게서 단순히 임금을 올리는 것에만 투쟁을 집중할 것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용자들의 책임 회피를 위해 악용되고 있는 원청-하청의 도급체제에서, 하청기업들은 원청에서 받은 금액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이익을 남기기 위해 하청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은 보장하되 정리해고를 단행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용역노동자 10명에게 최저임금을 보장하되 3명은 해고해 기업 입장에서는 이익을 계속 보전하는 것이다. 이 위원장은 “최저임금을 받는 사업장을 방문해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는 호소를 많이 들었다”며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한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고용불안을 실감하고 “앞으로 노동운동이 살 길은 노동시장에 노조가 직접 개입해 장악력을 갖는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는 “현재 7조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이 쌓여 노동부가 어떻게 굴릴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는데 이 자금을 통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고 직업훈련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해법을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흑이냐 백이냐’는 식의 노동운동의 투쟁방식을 넘어 노동운동이 어떻게든 노동시장에 직접뛰어들어야 한다는 고민이다. ■ 재벌 회장들, 상생의 노사문화를 이야기하자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은 현장대장정 과정에서 삼성 등 재벌 회장들과 면담을 제안해 관심을 끌기도 했다. 민주노총은 지난 3월말 이들 5대 재벌그룹에 이석행 민노총 위원장과 각 그룹 회장의 면담을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했다. 그러나 현재 재벌들은 사실상 면담 제안을 거절하고 있는 상황이다. 삼성그룹과 LG그룹은 최근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와 노사 현안 등을 협의해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민주노총에 보내 사실상 회동을 거부했다. 삼성 전략기획실은 “개별기업이 민주노총을 만나 논의할 수 있는 현안이 많지 않다고 판단된다”며 “노사관계 및 경제사회 현실과 관련해 경영계의 노사관계 전담창구인 경총과 협의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LG그룹도 삼성과 같은 취지의 공문을 전달했으며 SK·롯데그룹도 삼성과 비슷한 입장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이 위원장은 “평소에 대화는 안하고 투쟁만 한다고 떠들어대던 재벌들에게 대화하자는 것인데 이를 거절하는 것이 우습지 않나”라며 “언제든지 5대재벌 회장들과 만나 상생의 노사문화 등을 공개적으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노동운동의 신뢰 회복될까 인천의 한 버스노동자는 이석행 위원장을 만나 “왜 이제 왔냐”며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지도부와 일상적인 대화가 가능한 대규모 사업장보다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이 민주노총에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 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위원장의 현장대장정은 오는 8월 마무리된다. 이제 한 달을 넘긴 이 위원장의 행보에 아직까지 시민사회나 주류 언론들의 반응은 차갑다. 그러나 이석행 위원장은 올 8월 현장대장정을 마무리하고 임기 동안 현장대장정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생각이다. 그가 현장으로부터 얻은 소중한 해법들이 현장 중심의 민주노총의 정책 변화로 이어지고, 과연 민주노총이 아래로부터 힘을 가질 수 있을지 관심있게 지켜볼 일이다. 한편 이 위원장은 취임 이후 총파업의 남발이라는 우를 범하지 않겠다는 뜻을 이날 재차 밝혔다. 파업은 늘 준비하고 있겠지만 아무 때나 칼을 휘두르진 않겠다는 것이다. 삼성·LG·SK·롯데 등 재벌그룹과 민주노총 간 회동이 무산됐다. 앞서 민주노총은 지난 3월말 이들 5대 재벌그룹에 이석행 민노총 위원장과 각 그룹 회장의 면담을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했다. 6일 민주노총에 따르면 삼성그룹과 LG그룹은 최근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와 노사 현안 등을 협의해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민주노총에 보내 양측 간 회동을 사실상 거부했다. 삼성은 전략기획실 명의로 지난 3일 전달한 공문에서 "개별기업이 민주노총을 만나 논의할 수 있는 현안이 많지 않다고 판단된다"고 거부의사를 표명했다. 이어 "노사관계 및 경제사회 현실과 관련해 경영계의 노사관계 전담창구인 경총과 협의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LG그룹도 삼성과 같은 취지의 공문을 전달했으며 SK·롯데그룹도 삼성과 비슷한 입장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월20일 박정인 수석부회장이 민주노총 이 위원장과 오찬 회동을 갖고 금속노조의 산별노조 전환에 따른 협력방안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던 현대차그룹도 정몽구 회장과 이 위원장의 회동에 대해선 발을 빼는 분위기다. 현대차 관계자는 "아직 민주노총으로부터 (정 회장과 이 위원장의 회동에 관한) 어떤 제의도 받은 게 없고, 검토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은 7∼8월쯤 계류중인 현대차 비자금 사건 재판이 마무리되는 대로 정 회장과 이 위원장의 면담을 기대하고 있지만 성사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이석행 위원장은 누구? 이석행 위원장은 1958년 충남 청양 출생. 광산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 이후 기성회비를 한번도 못내고 초등학교를 졸업했다.14세 때 광산에 들어가 아침 여섯시부터 노동자로 일하고 밤 1시까지 재건학교에서 공부한 뒤 귀가하는 생활 끝에 학비를 모아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학비를 보태주던 누나가 결핵에 걸리는 바람에 서울로 올라가 구두닦이를 했다.또다시 2년간 돈을 벌어 고향에 내려와 중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는 박정희 대통령 때 방위산업 육성을 위해 정책적으로 세운 전북기계공고(익산)를 다녔다. 돈이 안 들고 취직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977년 대동공업에 병역특례자로 입사해 이때부터 금속노동자가 됐다.1980년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위원장을 2회 지냈다. 해고된 뒤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사무차장, 전국자동차산업연맹 부위원장을 지냈고 1988년 전국금속산업연맹 부위원장을 거쳐 2004년 민주노총 4기 이수호 위원장의 러닝메이트로 사무총장이 됐다.2005년 민주노총 내 금품비리 혐의로 지도부가 총사퇴할 때 물러났다. 민주노총 내 온건파인 국민파로 5기위원장 당선. 월수 150만원 정도의 선반공 임금과 강의료, 아내가 액세서리에 구슬을 붙여주고 받는 돈 60만원으로 살아가는 노동자다. -오재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