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말할 때,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해 가치판단을 할 때, 우리는 흔히 저런 표현을 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저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용서’는 망각 즉, 잊혀짐을 기본 토양으로 한다. 그리고 ‘잊지 않는 것’은 가슴 저 밑바닥에 ‘분노와 슬픔’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저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굳이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홀로코스트’를 두고두고 곱씹는 유태인들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 한반도의 근현대사만 살짝 들추어보아도 저 명제 혹은 문장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거창 양민학살 사건의 경우, 4·19 직후 피해자들의 유족들에 의해 사건 당시 면장을 지냈던 사람이 산 채로 불태워지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그 전직 면장은 손가락질 하나로 무수한 사람들을 무고하게 살해당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유족들이 그 사건을 잊고 있었다면, 혹은 그의 행위를 용서했다면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 봄볕 나리는 날, 뜨거운 바람 부는 날 지난 1980년 빛고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생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모두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엄청나게 많은 시민들이 국군에 의해 학살당하고, 그 학살에 저항했다는 것을 말이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다. 한 명의 독재자가 출현할 때 흔히 써먹는 수법이, ‘전임 독재자와 자신이 다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박정희가 그러했고, 전두환이 그러했으며, 노태우 역시 그러했다. 그들은 ‘구악을 일소’한다면서 무고한 시민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했고, ‘부패를 청산한다’면서 전임자들의 재산을 가로채 자신들의 배를 불렸다. 물론 그 재산 역시 불법적으로 조성된 것임은 말 할 필요도 없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필연적으로’ 민중의 저항에 직면했고, ‘늘 해오던 대로’ 그들을 학살했다. 광주 역시 마찬가지의 과정을 겪으며 나온 ‘빛나는 상처’이다. 여기 한 권의 만화책이 있다. ‘검정 고무신’이라는 만화로 잘 알려진 이우진 씨(그림)와 도래미 씨(글)가 우리 역사의 가장 깊은 상처인 ‘5월 광주’를 형상화했다. 주인공의 이름은 ‘기영이’다. 책 이름은 〈검정고무신과 함께 하는 기영이의 5·18 여행〉이다. 책 중에서 기영이는 윤상원 열사의 사촌동생으로 나온다. 윤상원, 그는 항쟁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이자 시민군 대변인이었다. 동시에 광주의 저항을 상징하는 인물 중의 하나다. 항쟁의 중심무대였던 도청 앞 분수대에는 그날과 다름없이 물줄기가 솟구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날들을 가장 뜨겁게 보낸 이들은 어떻게 됐는가. 누군가는 망월동 민주화 묘역에 누워 있고, 누구는 행방불명자가 되어 어머니의 가슴에 굵은 대못을 박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은 그날을 증거하는 ‘거룩한 관찰자’가 되었다. ■ 멀리 오월의 하늘 끝에 꽃향기 머무는 날 내 스무 살의 시절을 잠시 돌이켜본다. 참 겁이 없었고, 뭐든지 할 수 있었고, 옳다고 믿는 것이 있다면 절대로 양보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군대를 갔다 오고 복학을 하고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적당히 굽신거리면서, 또 적당히 반항하면서 살아왔다. 올곧게 살아가는 이들도 많은데, 그들을 보면서 부러워하기만 했다. 스무 살 무렵은 라면에 깡소주를 마시면서도 당당했고, 돈 한 푼 없이 여행을 떠나도 든든한 시절이었다. 거리마다 버티고 선 가로수 잎 사이로 강림하는 최루탄에도 비굴하지 않게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시간대였다.
그때의 은밀한 맹세와 기어코 살아남아 쓰자던 ‘튼튼한 서정시’는 아직 한 줄도 쓰지 못했지만, 서른 하고도 중반인 지금에도 ‘잔치’는 끝나지 않았고, 지난날의 꿈은 한걸음씩 우리를 밀어간다. 어설픈 사랑에 무너지고 성급히 마신 술에 취해가면서도,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당당하게 나가는 사람들은 많다.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가 되기 위해 열심히 살고 싶다. 세상에 투항하는 벗들을 비난하기 보다는 내 몸의 허물을 먼저 찾아보고, 우리가 부르는 작은 노래가 세상 한 구석이라도 희미하게 밝힐 수 있는 촛불이 되기를 늘 기도한다. 어느 해인가 광주 망월동에 갔을 때, 열아홉 빛나는 청춘의 시절에 이름 없는 ‘시민군’이 되어 한 다리와 한 팔을 벗들의 무덤가에 함께 묻은 분과 소주잔을 나눈 적이 있다. 그때 그분이 하신 말씀이 밤하늘을 가르는 천둥의 빛깔로 남아있다. “내 살아보니 계절 중에는 봄이 제일 아름다웠고, 사람의 일생 중에는 20대가 가장 빛나는 시절이었다.” ■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 빛고을 광주. 애초 이 이름은 한반도 남단의 한 도시의 이름이었다. ‘빛고을’이라는 지명이 역사에 등장한 이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광주’는 흙을 일구고 그 흙으로 집을 짓고 살아가는 심성 고운 이들이 고향이었다. 반도 전체의 먹거리를 공급하는 지역의 대표도시 중 하나의 이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빛고을 광주’는 더 이상 고유명사가 아니다. ‘광주’는 이제 ‘민주’와 ‘민중’과 ‘저항’을 상징하는 보통명사이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오늘의 대한민국, 보다 자유롭고, 보다 풍요로우며, 보다 민주적인 나라의 근원정신이다. 억눌린 자에게는 헌신적이며, 억누르는 자에게 용감히 저항하는 참된 정신의 발현체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다. 왜 죽은 자는 있는데, 죽인 자는 없는가. 왜 학살의 수괴들은 단죄되지 않는가. 예전 MBC 드라마 중에 ‘제 5공화국’이라는 게 있었다. 이 드라마 자체가 어떻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드라마가 ‘제 정신이 있는’ 사람들이 제작을 했다면, 어째서 학살의 수괴들을 찬양하는 인터넷 카페가 생기는가. 역사라는 것은 무엇을 알려줄 것인가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어떤 시각과 방식으로 알려줄 것인가의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 진실은 매우 단순하다. 그러나 그 단순한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은 아주 복잡하고 다양할 수 있다. 1980년 광주를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대의 기록이 모두 공개되어야 한다. 총에 맞은 자는 있는데, 발포명령을 내린 자가 없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또 그 학살의 수괴들이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받으면서 거리를 활보한다는 게 ‘상식적인’ 국가인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문구(文句)가 있다. 지난 시기 우리는 ‘오월 광주’를 떠올릴 때마다 그 문구를 떠올려야 했다. 그러나 이제 저 말 대신 ‘살아있는 자의 역사적 책무’를 떠올려야 한다. 그 책무라는 것은 어찌 보면 간단하다. 그날의 진실을 우리의 아이들에게 ‘제대로’ 알려주는 것이다. 광주항쟁 비디오를 본 사람들은 단 한 번의 시청만으로도 온 영혼이 찢겨져나가는 고통을 겪는다. (물론 그 비디오를 보고도 ‘조작’ 운운하는 자들도 있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수구꼴통’이라 부른다) ■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여! 광주 민주화 묘역에 가면 광주항쟁 당시 고교교사이던 남편을 배웅하러 나갔다가, 계엄군이 정조준한 총탄에 죽은 최미애 씨의 무덤이 있다. 그 무덤의 묘비 뒷면에는 남편이 직접 쓴 말이 있다.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천국에서 만납시다.” 당시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장시(長詩)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쓴 시인 김준태는 그녀의 남편이 근무하던 고등학교 교사였다. 그에게 최미애 씨의 남편은 이렇게 울먹였다고 한다. “집사람이, 집사람이… 머리가 없어.” 이 외에도 많다. 그때 사망한 사람들을 아직도 ‘간첩의 사주에 휘둘린 폭도’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당장이라도 광주 민주화 묘역에 가보라.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있다. 그리고 아직도 신원이 파악되지 않는 분들이 함께 묻힌 ‘무명열사의 묘’도 있다. 그들도 폭도인가. 넝마주이, 중국집 배달원, 노동자, 고등학생. 항쟁의 마지막 날, 도청에서 죽어간 이들의 면면이다. 그 잘난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그들은 최후의 순간에 이리떼와도 같은 지식인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도망쳤다. 정작 마지막 항쟁의 불꽃을 피워 올린 이들은 ‘기층민중’들이었다. 광주는 누군가가 제 멋대로 형용사를 같다 붙일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이름이 아니다. 그러므로 길가는 이들이여 그대 비록 惡을 이기지 못했으나 樂과 마음을 얻었으니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 - 황지우 장시(長詩) ‘산경(山徑)’ 마지막 연 -유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