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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맞이하는 5·18에 희생된 영령들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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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7호 ⁄ 2007.07.03 09:32:43

1972년 10월 유신(維新)을 단행하여 영구집권을 노렸던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 궁정동 연희장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흉탄에 별세하자,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 육군 소장이 김재규를 처단하고 스스로 권좌에 올랐다. 전두환 소장은 자기보다 상급인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대장을 총장 관사에서 납치하는 사태를 벌여 총장 보좌관과 몇 명의 군인을 살상케 한 사건이 10·26사태이다. 10·26사태 이후 1980년에 맞이한 민주화의 봄이 5월 17일 계엄령의 전국 확대와 김대중 씨 등 수많은 정치인·학생·재야인사들의 구속으로 꽃을 피우지 못하고 무산되자 18~27일에 광주를 중심으로 전남 지방 곳곳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던 민주화를 위한 민중항쟁 운동이 광주민주화 운동인 것이다. 이 운동은 군부의 계엄확대조치에 따라 18일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특전사)과 전남대 학생들과의 충돌에서 비롯되어 시위 군중에 대한 계엄군의 초기 과잉 진압이 광주 시민의 반정부 감정을 폭발시켜 급속도로 확대 되었으며 27일 계엄군이 총을 난사하며 시위대가 점거하고 있던 전남 도청으로 진입하면서 유혈사태를 빚고 광주시내에 재투입된 계엄군에 의한 유혈사태로 진압은 끝났다. 운동기간 동안 시위 군중들은 「계엄령 철폐」 「김대중 석방」 「전두환 처단」등의 구호를 외쳤다.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사망자 수를 정부는 192명이라고 공식발표 했지만 지금까지도 사망자수에 대한 논란은 끝나지 않고 있다. 97년 이 운동을 민주화의 역사발전에 기여한 뜻을 높이 평가하여 법정기념일로 지정했다. 그 뒤 13대 국회에서 88년 7월 13일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가 당시 정국 상황에 관계없이 일부 정치군인들이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 정권장악을 목적으로 행한 음모인 것이 드러났다. 89년 12월 31일 여야합의에 의한 5공 비리 및 광주특위 연석 청문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은 광주사태와 관련된 15개 문항에 대한 답변을 계속하다가 군의 발포를 「자위권 발동」이라고 강변하자 야당 의원들의 거듭되는 질의에 소란이 일어나 결국 증언을 다 마치지 못한 채 청문회는 산회되고 말았다. 이로써 쟁점들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특위 활동은 사실상 마감되고 만 것이다. 당시 국회의원들의 전두환 씨에 대한 무력증(無力症)이 저지른 사건은 또 하나 불거졌었다. 5공비리특위(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 권력형 비리조사특별위원회)가 그것이다. 1차 조사 대상으로 일해재단·새세대 심장재단·전 씨 일가 해외재산도피·연희동 사저·노량진 수산시장·부실기업정리·삼청교육대·노드롭사 항공기 도입 스캔들 등 41건을 정했다. 그러나 민정당 의원들의 5공 특위 불참과 야 3당의 이해가 얽혀 청문회가 무기 연기되고 전두환 전 대통령은 비리에 대한 직접 개입을 부인함으로써 5공 비리 문제는 역사의 미제로 남고 비리 특위 활동은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공자가 말씀한 「見利思義 見危授命(이익을 보았을 때 의리를 생각하고 위험을 보았을 때 목숨을 바쳐라」은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여순(旅順) 감옥에서의 휘호(揮毫)로 우리에게 낯익은 교시(敎示)이다. 국민의 대변자로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들이 무력정권에 다칠세라 몸을 사리는 작태를 5·18 민주화 운동에 피를 흘려 민주화 기념묘지에 묻힌 영령들이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이 영령들은 국가의 『위험을 보았을 때 떳떳이 목숨을 바쳐』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 건설에 영원한 밑거름이 된 것이다. 과거사조사특위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행각을 논하기 전에 국민의 가슴에다 총탄을 퍼붓고 집권하여, 창공에 펄럭이던 새마을 기(旗)를 퇴색케 한 연유를 먼저 물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행방이 묘연한 유가족들의 눈물을 닦아줄 방도를 지금이라도 찾아나서야 할 것이다. -박충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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