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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그날 우리를 쏜 것은 무엇이었나

[포토칼럼] 5·18 광주 민중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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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8호 ⁄ 2007.07.03 09:13:47

올해는 5·18 광주민중항쟁 27주년이자, 6·10 항쟁 20주년이 되는 역사의 분기점이다. 지난 20년 간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이른바 ‘87년 체제’는 이제 그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아직 우리에게는 ‘5·18’이라는 지울 수 없는 현대사의 ‘빛나는 상처’가 있다. 故민족시인 김남주의 말처럼, “5월은 바람에 지는 풀잎의 낭만으로 오지 않은” 까닭이다. 그해 봄 광주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토록 오랜 세월 사람들의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하는 것일까. 그해 봄은 야수의 헐떡이는 숨소리와 함께 왔다. 그 봄은 우리의 국군이 우리의 가슴에 총부리를 들이밀고, 우리의 핏물로 거리를 적시던 우리 현대사의 가장 아픈 기억으로 왔다. 빛고을 광주의 요구는 간단했다. ‘내란음모죄’를 쓰고 신군부에 연행된 김대중 씨를 석방하라는 것이었다. 또 ‘80년 민주화의 봄’을 짓밟은 전두환·노태우 신군부 세력은 자신들의 원래 자리인 군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거리로, 거리로 몰려나왔다. 이들은 광주가 홀로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광주시민들은 미국의 항공모함이 부산에 들어온 것에 대해서도 “미국이 우리를 도와주러 온다”고 믿었다. 그러나 미국 항공모함은 이들이 아닌 신군부의 권력장악을 뒷받침하기 위해 왔다. 그러나 신군부는 광주시민의 요구에 최루탄과 곤봉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공수특전단을 보냈다. 살육의 시작이었다. 국군이 국민을 학살했다. 당시 광주에 투입됐던 공수부대원들 사이에서는 “무장간첩이 광주에서 시민들을 선동한다”는 전두환·노태우 일당의 선동이 유행이었다. 그리고 공수부대원 대다수는 이를 믿었다. 언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보도하는 언론은 없었다. 한 방송사는 광주 시민들이 거리에서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는 바로 그 시간에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내보냈다가, 분노한 광주시민들에 의해 광주지국이 불타기도 했다. ‘눈을 뜨고 볼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바로 이런 모습을 가리키는 말이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 잔인한 장면에서 눈을 돌리게 하는 것일까. 바로 우리 내면의 비겁함과 무지와 냉소다. 우리들 스스로 한국 현대사의 상처를 봉합하기에 바빴을 뿐이다. 총을 든 시민군. 이들의 손에 총을 쥐어준 것은 신군부다. 10년도 가지 못할 권력을 위해 시민을 거리낌 없이 학살한 전두환·노태우 등이다. 이들의 이름 앞에는 아직도 ‘전직 대통령’이라는 거창한 직함이 붙어있다. 광주시민의 항쟁은 결국 신군부의 무력진압으로 끝났다. 항쟁의 최후 보루였던 전남도청을 끝까지 사수하던 시민군은 대부분 사살되거나, 부상을 입은 채 잡혔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빨갱이’라는 수식어가 ‘당연하게도’ 붙었다. 죽은 이들과 살아남은 이들. 사진 속에서 아버지의 영정을 안고 있는 이는 조천호 씨다. 조 씨의 사진은 이후 ‘광주항쟁’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남았다. 조 씨는 작년 겨울 광주시민의 축복 속에 결혼했다. 그는 현재 광주시청에 근무하고 있다. 현재의 광주 금남로에는 그날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광주는 ‘민주화의 성지’라는 기존의 이름 위에 ‘문화의 중심지’라는 새로운 색채를 입히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광주’라는 이름은 ‘민주’와 ‘항쟁’을 상징하는 보통명사다. 흔히들 ‘망월동 민주화 묘역’으로 불렸던 이 묘역은 이제 ‘국립 5·18 묘역’으로 탈바꿈했다. 이한열 열사, 6월항쟁을 상징하는 민주열사다. 그러나 그 6월 항쟁 역시 광주의 피값 위에서 쟁취한 역사다. 이한열 열사가 묻힌 5·18 묘역에는 열사 외에도 수많은 민주화 열사들이 함께 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이다. 아직도 광주항쟁의 진실을 부정하는 이들을 종종 본다. 심지어 경남 합천군은 학살의 최고 책임자인 전두환 전 대통령을 기리는 ‘일해공원’을 조성하는 중이다. 고 김남주 시인은 자신의 시 ‘학살’에서 이렇게 말했다. “학살의 수괴가 지금 옥좌에 앉아 있다”고.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광주에서 죽은 사람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딱 한 마디 하고 싶다. “5·18 묘역에 가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고 말이다. 길거리에서 대통령을 개에 비유하는 욕을 하고 다녀도 아무 일 없는 세상이라고들 한다. ‘친북좌파’ 운운하는 정치인의 목소리도 여럿 들린다. 그러나 그들이 이 만큼의 민주주의를 누리고 사는 것도 지난 1980년 5월 광주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어가며 지키려했던 그 피의 대가다.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주정의당에서 국회 의장까지 했던 한 정치인은 “광주항쟁 다큐멘터리를 본 적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하도 우는 소리만 나와서 채널을 돌려버렸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집권이 유력해진 한나라당 역시 한 번도 광주와 광주시민에게 사죄한 적이 없다. 무엇을 더 말할 것인가. -유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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