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범이 진화하고 있다. 여기서 초범의 정확한 사전적 의미는 ‘처음 죄를 짓는 사람’이란 뜻이다. 과거에 범죄자들은 가벼운 절도 등으로 유치장이나 교도소에 수감돼 또 다른 범죄자들을 접촉하며 새로운 범행을 배우는 사례가 많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초범들의 범죄가 경력(?)이 있는 사람보다 더 치밀하고 대담한 일명 ‘묻지 마 범죄’로 확산되는 양산을 보이고 있다. 특히 지난해에 일어난 조승희 씨의 미국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과 강화도 초병살인 및 총기탈취 사건은 국민들에게 충격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가져다 준 사례다. 최근에도 초범에 의한 유괴·방화·강도·성폭행·납치·살인 등의 강력 사건이 잇따라 언론의 사회면을 장식하고 있고, 초범들의 범행 수법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위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게다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잠재적 범죄자들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고, 이들의 연령대도 점점 낮아지고 있는 추세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이들을 위한 복지 장치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유는 예산 부족 때문. 결국 우리의 부모와 자녀들은 정부의 안일한 대응으로 언제 어디서 생명의 위협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전 지대에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 우울증ㆍ폭력게임ㆍ가정불화 등이 원인 전문가들은 초범이 늘고 범행 수위가 높아지는 이유를 우울증(심리상태), 폭력 게임 및 영화의 범람, 핵가족화, 가정불화 등 정신적 문제와 사회적 현상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경찰대학교 박현호 교수는 “최근의 범죄 추세를 보면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대부분 신용불량 등 채무에 시달리거나 거금이 필요한 경우가 많아 소소한 절도보다는 한 번에 일확천금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노리게 된다”면서 “초범이라도 납치·유괴·강도·살인 등의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잠재적 범죄다. 예컨대, 부모로 인해 가정불화와 폭력에 시달려 온 청소년은 성인이 되면서 사회를 비관적으로 보고 각종 미디어나 영화·게임 등의 정보를 교과서 삼아 불특정 다수에 대해 마치 영화나 게임 속 주인공처럼 아무 죄책감 없이 범행을 저지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작년에 있었던 경기도 분당 ‘홈에버 살인사건’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피의자는 분당 홈에버 지하 주차장에서 여성 회사원을 성폭행한 뒤 자동차 트렁크에 감금, 결국 숨지게 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피의자가 살해 직후 곧바로 인근 PC방으로 향했으며 게임을 통해 안정을 되찾았다고 증언한 점이다. 이 밖에 강력 범죄로 경찰에 검거된 범죄자 중에는 “영화나 방송을 보고 범행을 계획하게 됐다”고 증언한 사례가 많았다. 이에 대해 박현호 교수는 “초범자의 경우 범행에 필요한 경험이나 정보가 없어 모든 걸 스스로 판단하고 자급자족하는 경향이 많다”면서 “특별한 범죄 기술이 없어 사건 관련 뉴스나 미디어, 폭력 영화 및 게임을 보고 교과서로 삼아 무의식적으로 범행을 저지르는 사건이 많다”고 분석했다. 경기대학교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 역시 “2000년대 들어 성폭행을 비롯해 전반적으로 묻지 마 범죄가 늘어나는 추세”라며 “이는 해체되는 가정환경, 폭력을 미화하는 영화·게임 등과 큰 연관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 범죄자 연령 갈수록 낮아져 전문가들은 이처럼 강력사건 초범자들이 증가하는 원인에 대해, 일부 청소년들이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라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에 따라 청소년 복지 정책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아직 합리적인 이성관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청소년들의 우발적인 폭력이 살해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를 입증하듯, 작년 8월 10대 가출 청소년 5명이 10대 노숙 소녀를 집단으로 폭행해 결국 숨지게 했다. 경찰의 조사 결과, 피의자들이 10대 소녀를 살해한 이유는 고작 2만원을 훔쳤기 때문이라는 것. 당시 범행에 가담한 한 청소년은 “피해자가 맞은 만큼 자신도 거의 매일 맞아봤기 때문에 설마 죽게 될 줄은 몰랐다”고 증언해 청소년 선도 및 복지 문제가 얼마나 시급한지를 알려주는 사례가 되고 있다. 박현호 교수는 “(청소년들이) 자극적인 폭력에 노출돼 있는 상태에서 부모의 이혼, 폭력에 시달리게 되면 일종의 사이코패스(정신분열·공황)에 따른 범죄인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청소년 보호·선도할 사회안전망 시급 그렇다고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난 청소년들이나 범죄에 내몰린 초범들을 무조건 죄악시하여 배척할 수만은 없다. 이들 역시 한국 사회가 낳은 또 다른 피해자들이기 때문이다. ‘조승희 사건’의 경우, 그가 한국계 교포라거나, 미국 사회의 총기관리 시스템이 문제라거나, 또는 대학과 경찰의 늑장 대응 같은 문제가 아니라, 바로 소외당한 청소년에 대한 무관심이 빚어낸 참극이다.
또, 노숙 소녀를 살해한 청소년들 역시 부모 이혼이나 가정 폭력 같은 가족 내 갈등을 견디지 못해 가출한 청소년들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소년범의 범죄화 과정 및 보호방안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소년범 4명 중 1명은 과거에 폭력, 집단 따돌림, 성범죄 등의 피해를 본 것으로 조사됐다. 소년범의 절반 이상은 부모의 이혼, 가출, 사망 등 가정적인 불행을 겪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또,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부모의 폭행이나 불화 같은 가족 간 문제 때문에 가출했다는 응답이 3분의2 가까이 됐다. 가출 청소년들은 일단 집을 나와도 잘 곳이 없고 쓸 돈도 없다 보니 범죄의 늪에 빠져들기 쉽다. 또, 아르바이트로 돈을 버는 경우는 드물고, 훔치거나 빼앗은 돈으로 생활을 이어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죄의식이 무디어지면서 집단폭행 같은 공격적인 범죄도 쉽게 저지르게 된다. 이러한 흐름은 미국의 범죄학자 제임스 윌슨(James Q. Wilson)과 조지 켈링(George Kelling)이 타핑 포인트라는 책에서 주장한 ‘깨진 창문 이론(Broken Windows theory)’에 잘 나타나 있다. 깨진 창문 이론은 어떠한 일을 방치했을 때 그에 따른 범죄행위가 더욱 커진다는 주장이다. 깨진 창문을 수리하지 않고 내버려둔다면, 그 근처를 지나는 사람은 이 집을 관리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 또 다른 창문을 깬다든지 쓰레기를 투척하는 무정부 상태가 된다. 다시 말해서, 범죄를 양산할 수 있는 분위기나 여건이 허락된다면 그 범죄를 무의식적으로 용인하게 되고, 더 나아가 또 다른 범죄를 양산한다는 뜻이다. 박현호 교수는 “청소년들에게 유흥비가 필요한 환경이나 술·담배를 이용할 수 있도록 용납하면 그만큼 많은 청소년들이 그 늪에 빠지게 될 것”이라며 “이제는 정부가 나서서 강력한 제도로 사회의 흐름을 바꿔야 한다”고 조언했다. 서울 시립청소년쉼터 김기남 운영팀장 역시 “아이들이 2~3일간 집을 나오게 되면 거리에 적응하게 된다”며 “그 기간을 최소화시켜 주고 사회적인 안전망 속에서 아이들을 보호해 주는 제도적 장치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 국내 복지정책, 선진국 비해 ‘새발의 피’ 하지만 국내 복지정책은 선진국에 비하면 멀었다는 것이 전문가의 진단이다. 박현호 교수는 “청소년을 위한 복지정책은 한정돼 있고 또 이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주변 환경이 선진국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라고 단정했다. 그는 또 “범죄 예방 프로그램에서 정책과 과학 기술 등 어떤 것이 더 유력한지를 실험해야 하는데, 사실상 연구비용과 각종 실험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서, 다만 “집안의 담장을 높게 막고 길거리 CCTV를 강화하는 등 물리적 환경으로 범죄를 못하도록 막는 정도”라고 아쉬워했다. 이수정 교수 역시 “범죄는 정치·경제·사회·문화까지 연관돼 있어 광범위한 측면으로 해석해야 한다”면서 “다만 앞으로 범죄를 줄이기 위해서는 잠재적 범죄를 미리 예방할 수 있도록 청소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교수는 또 “청소년 범죄 문제는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어서 10~20년 이상 멀리 내다보고 다양한 프로그램의 개발과 함께 이들을 끌어안을수 있는 정부의 대책이 나와야 한다”고 덧붙였다. <성승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