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가 7% 성장에 4만 달러 국민소득, 7대 강국을 목표로 내세우면서 서민경제 살리기를 최우선 과제로 내걸었다. 그러나 나라 안팎을 둘러싼 경제환경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국제 유가는 100달러 시대에 진입했으며, 세계경제는 갈수록 활력을 잃고 침체되는 모습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시작된 글로벌 신용경색은 좀체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같은 상황은 그대로 우리 서민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물가상승으로 서민들은 지갑을 굳게 닫으며 씀씀이도 크게 줄이는 형편이다. 주부들은 남편의 월급은 그대로인데 물가는 20~30% 가까이 뛰었다고 푸념한다. 서민경제에 올인하는 새 정부. 그 경제정책 속에서 과연 서민들이 느끼는 체감경기가 어떤지 서울시 송파구 마천동에 위치한 재래시장에서 현장취재를 통해 장바구니를 든 주부들과 시장 상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3월 5일 오전 9시. 서울 지하철 5호선 동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마천역 2번 출구를 나섰을 때 봄바람은 서늘하게 불어왔지만 황사 때문인지 코끝은 제법 매캐했다. 하지만 서울이라는 번잡스러움보다는 한적한 시골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겨 숨통이 확 트이는 느낌이다. 마천(馬川)은 백마에게 물을 먹였다는 임경업 장군과 관련된 유래가 있다. 임 장군이 백마를 타고 천마산을 지나다 백마에 물을 먹였는데, 아무리 가뭄이 와도 그 물이 마르지 않았다는 전설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곳이 병자호란 때의 전장이었고 그 역시 호란과 관련해 비극적인 삶을 살았으므로 훗날 부회된 전설로 추정된다. 서울시에 편입되기 전에는 논과 밭이었던 마천지역이 사람들로 복닥거리게 된 것은 60년대 말. 청계천 주변 판잣집 철거민들이 대거 이주하면서부터다. 논밭이 있던 자리에 움막 같은 집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서다 보니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진창 골목길로 어지럽게 얽혔었다. 80년대 재개발 붐과 함께 빈민가 티를 벗었고, 최근에는 뉴타운 지역으로 선정되면서 벌써부터 누가 땅부자가 됐느니, 알부자가 됐느니, 소문이 돌고 있다. 누구 말마따나 돈이 없어 땅을 사랑하지 못해 아쉽다는 주부들이 있는가 하면, 월세집에서 쫓겨나는게 아닌가 걱정하는 서민들의 한숨 섞인 목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돈 많은 부자들도, 돈이 없어 땅을 못 사 아쉬워하는 주부들도, 그리고 월세집에서 쫓겨날까봐 걱정하는 서민들도 재래시장에는 발길을 끊을 수 없다.
마천역 2번 출구로 나와 왼쪽 내리막길로 200미터, 다시 왼쪽 오르막길로 200여 미터를 올라가면 사거리 지점의 모서리마다 슈퍼와 과일·야채가게 등이 밀집해 있다. 3월 5일 이곳에 위치한 ‘평강유통’에서 상인들과 동행취재를 시작했다. “왔시요~, 왔시요~. 오이가 세 개 1000원”, “알(무우)이요~, 쌈(배추)이요~, 세통에 2000원”, “오늘 상추 싸 엄니, 오늘 저녁 반찬은 쌈장에 상추쌈 어뗘!” 상인들은 이른 아침부터 야채를 진열해 놓고 오전 10시경 시원시원한 고성으로 본격적인 시장 분위기를 조성한다. 남편은 회사, 아이들은 학교에 보내고 다소 여유를 찾은 주부들이 구수하고 재치 있는 상인들의 입담에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입을 벌리며 가던 길을 멈춘다. 40대 한 주부는 뭘 살까 잠시 망설이더니, 엊그제 순이 엄마네 배추가 떨어졌다는 말이 퍼뜩 생각나 싱싱하고 값 싼 배추 세 통을 골라간다. “딱히 시간을 정해 놓고 오는 손님은 없어요. 다만, 매일 정오쯤이나 퇴근 무렵 저녁 찬 거리를 사려는 주부들이 몰리긴 하죠.” 손님들이 언제 가장 몰리느냐는 질문에 한종석(남·29) 씨는 이렇게 대답한다. 시장에서 5년째 일하고 있는 한 씨는 군대를 전역한 뒤 곧바로 이 일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현재 마천 지역에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인이다. 넉살이 좋아 먼저 장난을 걸어오는 주부들이 있는가 하면, 재미있는 입담 덕분에 20~30대 여성 고객도 많이 확보해 놓았다. 이런 재미 때문일까. 고되고 힘든 일에도 불구하고 전혀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천직으로 안다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평강유통에는 한 매장에 20~30대 상인들 4명이 있다. 이들의 하루 일과는 오전 9시에 가게를 열어 밤 10시가 넘어서야 문을 닫는다. 인근 가락시장에 새벽 6시에 나가 경매로 물건을 떼다가 야채·과일 등을 판매하기 때문에 가락시장에 가는 시간까지 셈하면 하루 5시간도 채 못 자는 셈이다. 피곤할 법도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좋고 술이 좋아 피곤한 걸 모른다고 말한다. 또 중간 유통과정을 생략한 덕분에 가격이 여느 곳보다 저렴해 장사도 잘 된다고 웃는다. 점심과 저녁은 인근 식당에 주문해 교대로 먹는다. 음식을 배달하는 김영석(가명) 씨 역시 20대로 서로 친해 보인다. 김 씨는 다음달부터 음식 배달은 그만두고 평강유통에서 같이 일하게 될 거라며 부릉부릉 오토바이 시동을 걸었다. 이곳 시장통 분위기는 조용하고 긴장감이 흐르는 사무실 분위기와는 달리 시끌벅적하고 활기차다. 손님들도 이런 시장 분위기를 좋아하는 눈치다. 단골손님이라고 소개한 박자경(가명·59) 주부는 “집에서 남편에게, 아이들에게 시달리다가 시장의 시끌시끌한 분위기가 좋아 굳이 살 게 없어도 나오게 된다”며 “상인들의 재치 있는 입담을 들으며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 보면 스트레스도 풀린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장 매출은 예전만 못하다는 것이 이곳 상인들의 말이다. 오후 3~4시쯤 되면 썰렁해지기 시작해 적막마저 흐를 정도다. 한 씨는 “예전에는 지금 시간이면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소비하는 사람들이 많이 줄었다”고 토로한다. 그는 “작년 초까지만 해도 주부들이 물건을 살 때 한두 개는 더 골랐는데, 요즘에는 꼭 필요한 물건만 구입하고 더 이상 지출은 안한다”며 “메모지를 챙겨 필요한 것만 사는 주부들도 꽤 늘어났다”고 전했다. 이처럼 소비가 줄어든 이유는 물론 경기불황과 물가상승 때문이다. 슬하에 딸만 세 명을 두고 있다는 한 아주머니는 “이번 주에 찬거리와 간식을 사려고 십만 원을 떼어놨는데 살 게 없다”며 “십만 원의 가치가 너무 떨어진 것 같다”고 푸념했다. 아주머니는 이어 “물가도 너무 올랐고, 특히 딸들이 좋아하는 야채·튀김·라면 값이 너무 올라 뭘 사야할지 엄두를 못내고 있다”며 “체감물가가 전체적으로 30% 이상은 급등한 것 같다”고 얼굴을 찡그렸다. ■서민들, 새 정부에 거는 기대 높아… 물가안정ㆍ취업난 시급 그래서일까. 서민들은 대부분 새 정부에 거는 기대가 높았다. 경제 살리기에 초점을 맞춘 정책이 나름대로 효력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이양선(45) 주부는 “새 정부에 거는 기대는 무척 커요. 지난 정권과는 달리 경제 살리기와 집 값 안정에 최우선으로 매진한다는 말을 듣고 뭔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죠. 하루 빨리 물가안정과 취업문제 등이 해결됐으면 좋겠어요”라며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이러한 기대감은 상인들도 마찬가지다. 장형철(가명·36) 씨는 “물가가 계속 오르면서 소비지출이 많이 줄었어요. 하루 매출이 200만 원은 넘었는데, 지금은 150만 원 넘기도 힘들어요. 특히, 손님들이 비싸면 안 사기 때문에 도매가격이 올라도 가격을 높이지 못하고 있어요. 그만큼 마진을 줄이는 셈이죠 ”라며 어려움을 말했다. 실제로 평강유통을 왜 찾느냐는 질문에 “다른 곳보다 가격이 싸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많았다. 장 씨는 “사람들이 매일 먹는 1차 식물성 식품까지 가격을 높이 받으면 서민들은 갈 곳이 없게 된다”며 “우리라도 최대한 손님 입장을 맞추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 때문일까. 오후 5~7시 사이에는 퇴근하는 사람과 저녁 찬을 준비하는 주부들로 평강유통은 또 다시 시끌벅적하다. 손님들은 20대 처녀·총각, 30~50대 주부. 할아버지, 할머니 누구든 가리지 않는다. 물건을 사든 사지 않든 누구나 고객이며 아버지, 엄마가 된다. 하지만 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단어는 ‘엄마’다. 한 주부가 야채가 듬뿍 담긴 플라스틱 상자에 눈길을 주자, 상인들은 곧바로 반말 섞인 구수한 말투로 저녁 찬거리를 미리 결정해 준다. “엄마, 오늘 도라지가 남아~, 한 바구니 가득 넣어, 1만2000원인데, 8000원에 줄게 가져가~.” 간혹 영어와 한글이 범벅이 된 콩글리시도 들린다. “떨이요, 떨이~. 거기 엄마, 일단 스탑(Stop), 슬로우(천천히 걸어가고)하고 미나리 좀 보고 가.” 상인들의 재치 있는 말투가 즐겁다는 듯 주부들은 미소를 지으며 야채 한두 개를 담아달라고 한다.
간혹 단골손님이 “우린 식구도 없고 입이 짧아서 많이 사 갈 필요 없어. 배추 두통만 싸줘”라고 하면 상인들은 “에이, 김치 넉넉히 담가서 우리도 나눠줘. 싸게 줄게 네 통 가져가” 하며 재치 있게 받아친다. 실제로 일부 단골고객은 이처럼 필요 이상의 야채를 듬뿍 사서 요리를 한 뒤 평강유통 직원들에게 나눠 주기도 한다. 이날은 임신으로 배가 불룩한 아주머니가 직원들 먹으라고 네모난 플라스틱 통에 듬뿍 담긴 과일 샐러드를 건네줬다. 그들은 “손님들에게 단순히 물건을 파는 상인이기보다는 한 가족이 먹을 저녁 찬거리를 건네주는 중개인으로서 가족의 화목과 정을 파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밤 9시쯤 되면 손님 발길이 뚝 끊긴다. 이때부터 야채 가격은 말 그대로 ‘떨이’가 된다. 물건을 하나하나 실내로 옮기면서 8000원이던 야채는 5000원으로 값이 뚝 떨어진다. 말 잘하면 4000원도 가능하다. 이날 역시 도라지와 우엉 등 몇몇 야채가 남아 한꺼번에 몰아 50%도 채 안되는 가격에 판매했다. 한종석 씨는 “물건이 많이 남으면 일일이 챙기기가 힘들어진다”며 “저녁 8시쯤 되면 물건 값은 우리가 마음대로 정한다”고 귀띔했다. ■힘들고 고되지만 젊은 백수보면 안타까워~ 이들은 늘 활력있고 재미있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름대로 힘든 점도 많다. 아니, 일 자체가 여느 직업보다 고되고 힘든 일이다. 기자도 단 하루 동안 현장체험을 한 뒤 지독한 감기에 걸려 지금도 콧물을 훌쩍거리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 장사만 3년째 하고 있는 박재홍(남·26) 씨는 얼마 전에 꽁꽁 얼어버린 생선을 다듬다 손을 다치는 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다. 박 씨는 “사고 이후 생선은 만지지 않기로 다짐했는데, 어느 순간 보면 또 다시 칼로 생선 머리를 다듬고 있다”며 “사실 아프고 힘들지만, 이 안에서 느끼는 재미가 그걸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3년 안에 내 가게를 차리는 게 꿈”이라며 “사람들과 호흡하고 그들이 내가 파는 물건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하는 자체가 큰 기쁨으로 느껴져 천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20대 백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한심하고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마음만 먹으면 어느 분야에서든 일할 수 있는데 지레짐작으로 힘들 거라고 생각해서 스스로 배척하는 것 같아 한심하다. 한편으로는 우리처럼 일에 대한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는 기회가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