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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타이어 근로자 ‘연쇄 의문사’

피해자 대책위 “노동부 역학조사 못믿겠다”
2차 역학조사 이뤄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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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8호 박성훈⁄ 2008.03.17 16:46:52

3월 초 작업복에 운동화 차림을 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여의도 국회 본관에 들어왔다. 신체장애로 다소 불편해 보이는 이도 있었으나, 보무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는 그들의 모습은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말끔한 양복 차림이 익숙한 국회에서 그들의 차림새는 오히려 두드러져 보였다. 그들은 통합민주당의 손학규 대표에게 국회 차원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찾아온 ‘한국타이어 유기용제 및 유독물질 중독 피해자 대책위원회’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대책위 위원과 현장 근로자, 유해물 중독 피해자, 목사 등으로 구성됐다. 통합민주당은 한 언론에서 한국타이어 소속 근로자의 의문사를 보도해 문제가 불거진 후로 우원식 의원을 단장으로 한 ‘한국타이어 소속 근로자 사망사건 진상조사단’을 꾸려 이에 대한 조사를 2007년 11월 14일부터 진행해 왔다. 그러나 한국타이어 근로자들의 잇단 죽음과 근무환경과의 인과관계를 찾기 위한 한국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 결과 “작업환경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며 별다른 특이성을 찾지 못했다는 골자의 노동부 발표가 나자, 답답했던 대책위 사람들이 국회에까지 찾아와 면담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대책위는 2월 25일부터 두 번의 면담 요청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손학규 대표와 만날 수 있었다. ■국회 찾은 대책위 “역학 재조사 실시하라” 손학규 대표를 비롯해 진상조사단장 우원식 의원,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심명희 의원이 배석한 가운데 약 한 시간 동안 진행된 면담에서는 긴장이 감돌았다. 대책위측은 다소 격앙된 어조로 한국타이어 사태의 본질을 벗어난 결과를 내놓은 노동부와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 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며 역학조사팀을 재구성해 다시 조사할 것을 핏대 세워 촉구했다. 박응용 피해대책위원장(45세. 95년 해고)은 “심장질환과 암으로 사망한 사람 말고도 현재 유기용제 중독으로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가 많은데도 이들은 역학조사 명단에서 빠졌다”며 역학조사의 부실을 주장했다. 대책위의 한 관계자는 “한국타이어 측이 조사에 대비해 공장의 내부를 청소하고 유해 가스를 환기해 제거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역학조사라서 작업환경의 실상이 제대로 조사에 반영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손학규 대표는 “국회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조치를 하겠다”며 계속적인 협조를 약속했으나, 당 차원의 진상조사단 활동에도 불구하고 역학조사가 졸속으로 이루어진 정황이 파악된 이상 대책위는 가시적인 협조를 요구하는 입장이었다. 박응용 대책위원장은 “신빙성 없는 결과를 가지고 나온 역학조사팀이 다시 꾸려질 것이고 결과가 엉뚱하게 나올 것인데 어떻게 또 믿겠느냐”며 신뢰의 이반을 드러내기도 했다. 손학규 대표는 “우리가 한국타이어 측에 직접적인 시정을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고, 노동부에 역학조사 및 진상규명을 명확하게 할 것을 권고하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고 설명했으나, 박응용 대책위원장은 “역학조사 기관에서 유기용제에 의한 사망이라는 사실을 전혀 밝히지 못하고 있다”며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조사를 진행할지에 대해 당에서 복안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며 논의가 고인 채로 뱅뱅 돌기도 했다. 박 위원장은 협조가 없을 때에는 총선에서 지지할 수 없다며 엄포를 놓기도 했고, 현실적 사안에서 정치적 발언은 삼가자며 손 대표가 제동을 걸기도 했다. 대책위의 한 관계자는 “15명의 사람들이 회사에 충성하며 일하다가 억울하게 죽었다. 손 대표와 당 지도부도 민주화 당시 어려운 사람들 편에 서서 싸운 동지였는데, 통합민주당의 진상조사단에서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해 달라”며 통사정을 하기도 했다.

■업무상 중독·질병 환자들이 더 문제 역학조사는 당장 발등에 떨어져 해결이 필요한 과제이지만, 현장에서 근무하다 업무상 질병을 얻은 채로 일을 계속하고 있는 근로자나 병색이 짙어 면직되는 환자들의 경우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현재 한국타이어에서 근무하다 독극물 및 유기용제 중독으로 중증을 겪고 있는 근로자들은 총 25명에 이른다. 이들은 뇌병변과 뇌경색·뇌출혈 등 난치성 또는 고액의 치료비가 드는 질병이나 후두암·백혈병과 같은 종양류, 안(眼)질환, 규폐증 등 근무환경으로 인해 발생하는 직업병을 가진 경우가 대다수이다. 1980년에 입사해 올해로 61세라는 유모 씨는 이날 손 대표와의 면담이 끝나갈 무렵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며 나섰다. 유 씨는 “나는 인생을 거의 다 살았지만,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들은 계속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입을 뗐다. 입사 이후 정련과에 소속돼 타이어 재료인 고무의 절단과 접착제를 만드는 작업만 10년 이상 해 온 유씨는 92년부터 숨이 자주 가빠지고, 어지러움증과 구토와 수전증을 겪기 시작했다고 한다. 솔벤트와 벤젠, 자일렌과 같은 유기용제를 업무상 계속 가까이 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유 씨는 병원에서 뇌병변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발기부전과 우울증 때문에 가족들과 잦은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가정이 파탄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유 씨는 “회사에서도 미친놈 취급을 받아 강제퇴직 당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저기 ‘고자 지나간다’ ‘미친 놈 지나간다’고 수군대는 소리을 참을 수 없어 집 밖에 나가기조차 싫다”고 하소연했다. 유 씨는 “나는 유기용제 때문에 성 불구자가 됐다. 젊은이들에게 유기용제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려야 한다”며 그 심각성을 주장했다. ■환기시설 요구해도 회사측 “불량 나서 안된다” 거절 통합민주당과 대책위원회의 면담에 함께 참석한 한국타이어 공장 현직 근로자 김모 씨는 15년째 타이어 제조 공정에서 일하고 있다. 타이어를 제조할 때에는 고무성형 제조공정에서 항상 고온을 유지해야 하므로, 현장의 내부 온도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영상 50도를 넘나드는 찜통이다. 여기에다 신체보호를 위해 옷을 다 차려 입어야 하므로 옷은 금세 땀으로 뒤범벅이 되곤 한다. 그러나 김 씨의 말에 의하면, 현장 근로자를 힘들게 하는 것은 50도에 육박하는 고온이 아니었다. 타이어 사출과정에서 빌생하는 증기가 문제이다. 고온으로 쪄서 나오는 타이어가 뿜어내는 증기는 눈을 자극해 점막 이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마스크도 무용지물이 돼 버린다. 김 씨는 “현장 근로자로서 상부에 건의도 해 봤지만, 환풍시설을 설치하면 타이어가 불량이 나 버려, 불량률을 최소화하려는 회사 측에서는 이 같은 어려움을 근로자가 감수하도록 눈 감는다”고 전했다. 김 씨는 “일하다가 증기에 중독돼 쓰러지면 사내 양호실에서 잠시 쉬다 오는 것이 처방의 전부”라며 “일하다가 실신하기를 반복하다 보면 몸이 다 상한다”면서 현장 근로자 건강 악화의 악순환과 증기중독의 심각성을 피력했다. 박응용 대책위원장은 “현재 근무 중인 현장 노동자들을 위한 근무환경 개선이 시급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노동부·국회 “재조사하겠다” 결국, 손학규 대표는 “의구심이 빨리 해소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노동부에 무엇을 규명해야 할지,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둬서 조사를 진행할지를 요구하겠다고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민주당의 노력이 반영됐는지는 몰라도, 노동부는 역학조사를 다시 실시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해 왔다. 대책위원회는 3월 13일 충남도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역학조사를 다시 실시해야 한다는 노동부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의지 표명을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대책위는 3월 14일 노동부 관계자들과 면담을 갖고, 역학조사 목록과 피해상황에 대한 사전 논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2차 역학조사를 통해 1차 조사에서 미흡했던 부분이 충족되고 진전이 생긴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기업 프렌들리’를 내세운 이명박 대통령과 ‘노동자 프렌들리’를 선언한 한나라당이 한국타이어 근로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작업환경을 개선하고 피해자에 대한 합당한 조치를 해 줬으면 하는 것이 국민들의 마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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