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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기억

삼촌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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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00호 편집팀⁄ 2009.01.13 13:17:32

내 나이 예닐곱 살 무렵, 서울에서 고시 공부를 하던 막내삼촌이 아버지 앞으로 장문의 편지 한 통을 보내왔다. 크게 좋지 못한 사연이라고 생각한 까닭은 할아버지의 언성이 동네를 울릴 만큼 높았기 때문이었다. “제깐 놈이 판사는커녕 변호사 서기도 못 되는 주제에, 시방(지금) 장개(장가)를 가겄다고? 늙은 애비는 한 푼이라도 졸래킬라고 밤이고 낮이고 논두렁 밭두렁에 사는고만, 꼬박꼬박 돈 부쳐주었더니 여자나 꼬셔서 장개를 가? 내 이놈을 당장에!” 그날 할아버지는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서울행 야간열차를 타고 막내삼촌이 사는 하숙집으로 달려갔다. 나는 그날 밤 잠든 척하며 엄마 등 뒤에 누워서, 아버지와 엄마가 나누는 이야기를 모두 엿들었다. “참말로 장가를 가야 한답니까? 부모가 뭐하고 어디 사는 처자래요?” “목포 경찰서장 딸이라는디… 이화여대 다니고… 그집서는 허락을 했다는구먼. 이 기회에 혼사를 시켜서 분가를 내버리는 게 나도 편하기는 허지. 당신 생각엔 어떻소?” “참 당신도. 대린님(도련님)이 아직 고시를 합격도 못 혔는디, 누가 먹여 살린대요? 아씨는 학생이라면서…. 아무튼, 아버이 서울 댕겨오시면 무신 결판이 나겄죠.” 당시 명문대 법대를 나온 막내삼촌은 인물도 좋았다. 그런 만큼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온 집안에서 막내삼촌을 향해 거는 기대치도 높았으리라. 내가 기억하는 삼촌은 방학이면 내려와 기타 연주로 밤을 새웠고, 외모가 나훈아와 비슷하여 동네의 순진한 여학생들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러브 레터도 몇 장 받아 언니와 내가 훔쳐 몰래 읽은 추억이 있다. 나는 이내 막내삼촌의 부인이 될 서울 여인이 궁금해졌다. 서울 사는 작은엄마감은 우리 엄마와 얼마나 다를까? 읍내 군청에 다니는 둘째 작은아버지의 부인이며 혜숙이 언니의 엄마인 작은엄마와는 또 어떻게 다를지…. 둘째작은엄마는 뽀얀 분가루로 화장을 하기 전에 반드시 구루모(마사지 크림)로 반질반질 마사지를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분홍빛 연지를 뺨에 살짝 바르고는 나를 향해 상긋 웃음을 보였다. 그때 마주치는 작은엄마의 얼굴은 화사한 살구꽃 같았다. 나는 엄마에게 읍내 작은엄마처럼 한번 해보라고 권한 적이 있었다. 천성적으로 피부가 곱고 이목구비가 서구적인 엄마가 삼단 같은 검은 머리를 풀고 목욕이라도 하는 날엔 선녀처럼 예뻐서, 나는 잠시 엄마가 나무꾼의 부인으로 집을 잃고 이런 시골에서 아버지와 같이 사는 게 아닌가 걱정을 하기도 했다. 외가에 가서 약속보다 하루 늦어지는 날엔, 나는 하루종일 신작로만 바라보며 완행버스를 기다렸다. 혹 엄마가 도시의 어디론가 가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마침내 할아버지가 이틀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습관적인 헛기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 우리 가족은 모두 저녁 숟가락을 상에 내리고 일어나 나가서 할아버지를 맞았다. 나는 어리지만 눈치가 빨라서 할아버지의 누그러진 환한 얼굴색을 감지했다. 무엇인지 할아버지 뜻대로 된 것이다. 할아버지는 숟가락을 잡고 평소의 습관대로 국을 한번 휘젓더니, 이내 맛있게 식사를 마쳤다. “근디 말여…. 그 며느릿감 될라는 처자 학상이 국을 끊여서 내왔는디, 내 입맛에 딱 맞더고만. 그간에 상국이를 보살피고… 잘못혔다간 그 집안에서 고소를 하게 생겼어. 서둘러서 혼인시켜야겄다. 허허… 키는 날짝허고, 인물도 그만허고… 나를 보더니 아버님, 아버님 하는디, 싹싹허기가 깎은 배 같어…. 낼 모레 인사하러 상국이랑 내려온다니께, 에미 너는 집안 안팎으로 두루 살피거라!” 순간, 엄마의 얼굴빛에 약간 실망스런 표정이 감돌았다. 엄마는 숭늉을 떠 와야 한다며 자리를 피해 나갔고,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그만 작은방으로 건너가라며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아버지와 나눠야 한다는 암시를 주었다. 엄마는 차가움이 흐르는 서구적 인상에 자태가 고와서 다른 엄마하고는 어디에 있어도 구분이 갔는데, 또 다른 점은 성격적으로 그 누구와도 적정선을 유지하며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처세술을 지녔다. 어쩌면 두 시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종갓집 맏며느리라는 위치도 성격에 일조를 했으리라. 엄마가 거슬린 할아버지의 말씀 한마디는 ‘깎은 배’라는 표현이었다. 나는 속으로 배시시 웃었다. 깎은 배 같은 서울 여인, 작은엄마가 될 삼촌의 여인이 왠지 빨리 보고 싶었다. 처음 그녀를 만난 날, 기대 이상으로 그녀는 내게 감동을 주었다. 짧은 커트 머리에 작고 흰 얼굴, 잘룩한 허리선, 단추가 무려 스물 서너 개쯤 되어 보이는 아이보리 블라우스에 플레어 스커트를 입은 그녀는 태어나 내가 본 여인 중 최고로 아름다웠다. “이 아이가 수인이라는 조카로군요? 어머, 너무 예쁘네요. 시골 아이 같지 않아요.” 나는 수줍어서 한달음에 옆집 현화네로 도망치고 말았다. 그런데 나의 환상이 깨진 것은 그날 밤이었다. 그날 저녁에 그녀는 밥상머리에서 몇 번인가 헛구역질을 했다. 삼촌은 안절부절 못 하면서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고, 엄마도 아무 말없이 따라 밖으로 나갔다. 나는 걱정이 됐지만, 먼 길을 오느라 멀미를 하거나, 아니면 먹은 게 체했으려니 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 엄마의 등 뒤에서 잠든 척하며 나는 그녀의 멀미 난 사연을 듣게 되었다. “집안도 좋고 인물도 좋구만, 뭐가 급해서 일을 저질렀는지...어디 애기 나면 학교는 댕기기나 하겠어요? 우리 딸이 저러면 그냥 안 둘 거고만… 츳츠츠!” “그러게 이제 와 어쩌겠소. 상국이가 얼른 고시 패스를 해야 될 턴디….” 그녀는 고향인 목포로 가기 전에 내게 고운 목소리로 노래 하나를 가르쳐 주었다. 아마 제목이 요들송이었던 것 같다. -아름다운 베르네/ 맑은 시냇물이 넘쳐 흐르네- “수인이는 목소리가 삼춘하고 똑같네. 어쩜 노래도 그렇게 잘해?” 그리고 삼촌에게 귀엣말로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나는 기분이 더욱 좋았다. “우리 아기도 수인이처럼 예쁘고 똑똑했으면 좋겠어요, 상국 씨….” 하지만, 그녀는 무슨 일인지 고향인 목포로 내려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볼 수가 없었다. 아직도 가끔 내 귀에 들리는 그 옛날 그녀의 아름답고 풋풋한 목소리…. 아름다운 베르네 맑은 시냇물이 넘쳐 흐르네 새빨간 알핀 로제스 이슬 먹고 피어 있는 곳 다스 오버랜야 오버랜 베르네 산골 아름답구나 다스 오버랜야 오버랜 나의 사랑 베르네 후디리요 후디리리 후디리요 후디리리 후디리요 후디리리 후디리요 후디리리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뀐 세월은 그녀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 나는 그 시절의 나 만한 딸아이를 데리고 대도시에서 숨가쁘게 살아가는데…. 그녀가 문득 그립다. 그립다는 것은 아직 내 마음에 풀빛같은 희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순수와 고향에 대한 기억, 유년의 추억들….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아직도 내 고향집 마당가엔 수줍은 소녀 수인이가 서울 삼촌의 여인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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