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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 석봉이와 미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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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07호 편집팀⁄ 2009.03.04 10:28:27

석봉이가 죽던 날 나는 대문 밖에서 석봉이가 두고 간 딱지 몇 장을 손에 꼬옥 쥐고 발을 동동거렸다. 싸락눈이 싸락싸락 내리는 소리가 석봉 어머니의 울음소리와 뒤섞이면서 내 몸 어디선가 소름이 오싹 돋았다. “아이고, 아이고~! 불쌍헌 내 시끼. 못난 부모 만나 약 한 첩도 제대로 못 쓰고 가는구나. 아이고, 아이고, 내 강아지~! 아이고, 하늘도 무심허오. 죄 없는 내 자슥은 왜 데려가고, 잡아가라는 저 귀신(석봉 아버지)은 쌩쌩허단 말이오. 아이고, 분허고도 절퉁혀서 못 살것네~!” 석봉이네 마당에는 불이 지펴져 무언가 타 들어가고 있었다. 대문조차 없는 석봉이네 집을 나는 종종걸음을 하고 조심조심 마당으로 들어섰다. 나를 본 석봉 어머니는 땅을 치고 더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석봉이의 헌 옷가지며 책들이 불길에 타 들어가는 것을 보자, 나도 모르게 슬픔이 북받쳐 올라 뜨거운 눈물 줄기가 내 차가운 두 볼을 타고 흘렀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석봉이의 딱지를 불길 속에 던져버리고 쏜살같이 뒤돌아 나와 뛰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 딱지를 가지고 있으면 석봉이가 하늘나라로 가지 못 할 것 같아 미련 없이 불속에 던져버린 것이다. 동네 몇몇 사람들은 혀를 차며 석봉 어머니가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느니, 아버지가 술주정이 너무 심해 어린 것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느니...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마당에 불길이 사그라지고 연기만 보일 무렵, 석봉이는 하얀 천에 둘둘 말려 지게 위에 올려졌다. 동네의 크고 작은 아이들, 어른들 모두 석봉이가 가는 마지막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나는 지게를 지고 가는 아저씨의 모습이 망귀산(부안읍내에 있는 작은 산)과 가까워져 가물가물 보일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였다. 며칠 전에 동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는 화려한 꽃상여에 수십 장의 만사가 행길에서 오리나 펄럭였는데, 석봉이는 아이라서 상여 대신 지게에 태워 장례를 치른 것이란다. 석봉에게는 두 살 아래 동생 미순이라는 계집아이가 있었다. 미순은 콧물로 범벅이 되어 매끌거리는 소매 끝으로 연신 눈물과 콧물을 닦고 닦아 코가 빨갛게 해어졌다. 나는 마당가에서 홀로 훌쩍대는 미순이의 손목을 살며시 잡고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다. 엄마가 고구마와 식혜를 가지고 와서 미순이를 달랬지만, 미순이는 한입도 대지 않고 울다가 마침내 지친 듯 쓰러져 잠들어버렸다. “지지배가 지 오래비만 졸졸 따라다니더만, 이젠 끈 떨어진 매가 되어부렀네...이를 우짤꼬...쯧쯧...수인아, 니가 당분간 미순이를 동생처럼 챙기거라.” 석봉이가 죽고 며칠이 지난 뒤, 노란 술 주전자를 들고 논두렁길을 간당간당 걸어가는 미순이를 보았다. 나는 재빨리 미순이 뒤를 따라나섰다. “미순아, 주전자 언니 줘.” 미순이는 주전자를 내 손에 넘겨주고 한 손을 꼭 잡더니, 내 얼굴을 바라보고 살풋 웃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웃는 얼굴이었다. 논두렁길을 벗어나 언덕길에서는 같이 노래까지 불렀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우네.” 막걸리 가게는 동네 삼거리에 있었는데, 미순이를 보더니 주인 할아버지가 반색을 하신다. “너그 아부지 술심부름 석봉이가 다 했는디, 인자는 미순이가 어른 되아부렀네. 가면서 논두렁에 술 찌클지 말그라, 아가!” 하시더니 측은하다는 듯 뽀얀 눈깔사탕을 하나씩 나누어주셨다. 석봉이 아버지는 술을 밥보다 더 좋아하여, 석봉이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술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나는 몇 차례 석봉이랑 같이 막걸리를 사러 간 적이 있었는데, 돌아오면서 우리는 꼭 한 모금씩 막걸리를 마시고는 했지만 그것은 둘 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미순이가 동네 숲길로 들어서자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다. “언니...막걸리 먹어보았어?” “응?...아니...” “난 먹어보았어...오빠랑 꼭 한 모금...병아리처럼...” “그랬구나...술은 난중에 커서 먹어야 돼, 미순아...” 나는 미순에게 막걸리를 먹어본 적이 없다고 거짓말한 것이 부끄러워져 발걸음을 빠르게 재촉했다. 미순네 마당 가까이까지 가서야 주전자를 미순에게 넘겨주고 나는 우리 집 대문을 열었다. 그때 미순이의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석봉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나는 미순이가 무슨 큰 잘못을 했구나 싶어 한달음에 석봉이네 집 마당으로 달려갔다. 미순이가 마당에 넘어지면서 주전자를 놓쳤는지, 막걸리가 온통 쏟아져 마당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미순 아버지는 그런 미순이를 일으킬 생각조차 않고 소리만 버럭버럭 지른다. “허이고, 쓰잘데기 없는 지지바만 살아서 속 썩이느만.” 그러더니 나를 보자 겸연쩍은 듯 방문을 휙 닫고 들어갔다. 석봉이가 죽고 난 뒤 애꿎은 미순이만 미운털이 박혀 그 아버지에게 자주 혼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석봉이가 살았더라면 미순이가 지금보다 행복했을 텐데 아쉬워하면서 죽은 석봉이보다 미순이가 한층 가엾게 생각되었다. 어쩌면 미순을 향한 나의 연민의 정은 석봉이와 재미있고 아팠던 기억들을 쉽게 지워 가는 지름길이 되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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