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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남 3400명 군경이 학살 최초확인

진실화해위원회 발표…국가 차원 직권조사 결과 집단학살 첫 공식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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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08호 박성훈⁄ 2009.03.10 13:23:54

올해 들어 한국전쟁 당시 형무소 재소자와 민간인이 무차별 학살당한 사실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 조사에 의해 밝혀져,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과 유가족들이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고 있다. 전쟁 중 발생한 민간인 학살사건은 50년 이상의 긴 세월 동안 수 차례의 진상규명 요구에도 군사정권의 완강한 묵인과 탄압으로 역사 속에 깊이 묻혀 있었다. 형무소 재소자 및 민간인 학살사건의 유족들은 1960년에 진상규명을 시도했으나, 한국전을 수행한 경험이 있는 당시 군사정권은 특별조치법을 제정해 유족회 간부들을 혁명재판소에 회부했다. 이 중 1명은 사형을, 12명은 5∼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 이후로 더 이상의 적극적인 진상규명 활동은 씨가 말라 갔으나, 2005년 들어 출범한 진실화해위의 직권조사에 의해 서서히 빛을 보게 되었다. 이번에 공개된 ‘부산·경남지역 형무소 재소자·민간인 학살사건’은 당시 공권력이 민간인을 살해하는데 최소한의 절차도 지키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양민 살해자는 육본·헌병·경찰·교도관 등 진실화해위는 3월 2일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부산·마산·진주 등지에서 형무소 등 수용시설에 수감된 재소자와 민간인 3400여 명이 불법적으로 희생됐다고 밝혔다. 그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576명 정도에 불과하다. 한국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형무소 재소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집단 학살했다는 의혹은 언론과 유가족 제보 등을 통해 꾸준히 제기돼 왔었다. 그러나, 국가 기관이 직권조사를 벌여 재소자 집단 학살 사실을 공식 확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진실화해위는 국가기록원에서 입수한 1950년 당시의 부산형무소와 마산형무소의 ‘재소자인명부’, ‘수용자신분장’, ‘교정통계’ 등의 자료에 나와 있는 명단을 일일이 대조해 희생자 수와 신원을 확인했다. 이들을 살해한 사람들은 북한군이 아니라 육군본부 정보국, 헌병대, 지역 경찰, 형무관(교도관) 등 우리 측 군경이었다. 부산 등 경남 지역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이 점령하지 않았던 지역이어서 치안이 유지된 상태라, 이 지역의 수용시설에 격리된 재소자들은 이미 신병이 확보돼 특별히 위험하다고 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부분의 전시 민간인 학살 사건이 미군에 의해 발생하거나 부대원이 제대로 통제되지 못한 상황에서 발생했지만, 이 사건은 치안이 확보된 상태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위원회는 “위험성이 없는 형무소 재소자와 민간인 수천 명을 군경이 일방적이고 임의적으로 집단학살한 것으로, 이는 사상 유례가 없는 비인도적인 행위”라고 전했다. ■사살·수장 등 무차별 집단 학살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부산형무소에서는 1950년 7월 26일부터 9월 25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부산지구 CIC(방첩대의 후신, 육군본부 정보국 소속)와 헌병대, 지역 경찰, 형무관 등 군경이 부산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을 비롯한 예비검속자 등 최소 1,500여 명을 집단 살해했다. 이 중 현재 148명의 신원이 확인된 상태이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에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들로 조직된 반공단체로, 같은 해 말 가입자가 30만 명에 달했다. 이윽고,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군경은 연맹원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검속과 즉결처분을 단행했다. 사건 희생자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른 형무소로의 이감 등을 이유로 끌려간 후, 부산 사하구 동매산과 해운대구 장산 골짜기 등지에서 집단 사살되거나 부산 오륙도 인근 해상에서 수장(水臟)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 다른 학살 발생지인 마산형무소에서는 1950년 7월 5일부터 9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최소한 717명의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 등이 총살되거나, 마산 구산면 앞바다에 대부분 집단 수장됐고, 현재 이들 중 358명에 대한 구체적인 신원이 파악됐다. 진주형무소에서는 1950년 7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최소 1,200여 명의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집단 살해됐고,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70명이다. 희생자들은 진주 명석면 우수리 갓골과 콩밭골, 관지리 화령골과 닭족골, 용산리 용산치,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 마산 진전면 여양리 산태골에서 집단 총살당했다. 위원회는 “부산·경남 지역 형무소에서 희생된 대다수의 재소자들은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살해되었다”며 “예비검속된 국민보도연맹원들과 함께 다른 형무소로 이감시킨다는 이유로 끌려가 산골짜기나 바다에서 집단 학살돼 수천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민군에 동조할까봐 살해” 특기할 만한 부분은, 살해된 재소자들은 사형수가 아니라 육군형사법이나 국방경비법 등을 위반한 징역 3년 이하의 단기수들이었다는 점이다. 재소자 중 일부 기결수들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헌병대에 인계돼 총살된 상태였다. 형이 이미 확정된 죄수를 다시 처형한 행위는 헌법이 규정한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다. 전국의 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은 한국전쟁 이전에 발생한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등 크고 작은 대공사건에 연루돼 전국 형무소 20여 곳에 수감 중이던 최소 2만여 명의 재소자들과 예비검속으로 형무소에 구금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살해된 사건이다.

진실화해위는 “비록 전시였다고는 하나, 대한민국이 통치하고 있던 비전투·비교전 지역인 부산·경남 지역에서 단순히 남하하는 인민군에 동조할 것을 우려하여 형무소 재소자들과 민간인인 국민보도연맹원들을 불법적으로 살해한 것은 범죄행위”라고 밝혔다. 위원회는 국가에 대해, 유족에게 사과하고 위령사업을 지원함과 아울러, 민간인 희생 내용을 공식간행물에 반영하고 인권교육을 강화할 것을 권고했다. 김동춘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형무소에 수감 중인 재소자와 구금되어 있던 민간인들을 집단 학살한 것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비인도적인 행위”라며 “국가가 나서서 그 진실을 규명함으로써 억울한 죽음의 영혼을 달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경상도 지역에서 발생한 양민학살사건으로는 거창 양민학살사건과 산청·함양 양민학살사건이 있다. 거창 양민학살사건은 1951년 2월 당시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을 벌이던 육군 제11사단 제9연대 제3대대가 거창 신원면 주민 600여 명이 공비와 내통했다고 판단, 집단 학살한 사건이다. 이 군부대는 산청군 금서면 가현마을과 방곡마을, 함양군 휴전면 점촌마을 등지에서 주민 386명을 학살하기도 했다. 이것이 산청·함양 양민학살사건이다. ■충청도 괴산·서산 등지에서도 보도연맹원 피살 지난 1월에는 한국전쟁 당시 충청도 지역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충북 괴산·청원 지역 사건은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에 170명의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들이 경찰과 특무대·군인에 의해 집단 사살된 사건이다. 군경이 보도연맹원에 대해 인민군에 동조할 것이라고 의심하여 이들을 선별 감금해 즉결처분했다. 이 과정에서 구체적 불법행위를 확인하거나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서산과 태안 일대 20개 지역에서는 수많은 민간인이 좌익혐의로 국군과 경찰에 의해 학살된 사실이 확인했다. 군경은 1950년 10월부터 3개월에 걸쳐 서산·태안 지역에 거주하는 민간인 1865명이 북한 인민군에 부역한 혐의를 씌워 즉결처형했다. 당시 경찰은 인민군을 도운 혐의가 있는 민간인들을 읍·면 창고 등에 가둬놓고 가담 정도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었다. 이어 경찰은 처형 대상인 ‘가’ 등급으로 분류된 사람들을 서산시 갈산리 교통호, 해미읍성 동문 밖 방공호 등지에서 법적 절차 없이 즉결처형했다. ‘나’ 등급은 재분류, ‘다’ 등급은 훈방으로 분류됐지만, 실제로는 이들 중 많은 이가 죽음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꾸리던 20~40대 남성들이었고, 여성과 청소년도 일부 포함된 것으로 조사됐다. 민간인들이 법적 절차 없이 희생된 것이다. 진실화해위는 “당시 경찰이 인민군 점령기에 좌익세력에 의해 희생된 희생자의 유가족 및 우익인사들이 주축이 된 치안대를 연행·취조·분류 과정에 개입시켜 무고하게 처형된 민간인들이 많았다”고 밝혔다. 충청도 지역에서는 미군이 피란민에게 기총소사한 노근리 사건이 유명하다. 1950년 7월 26일 미군 1기병사단 7기병연대는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4번 국도변 경부선 철교를 건너던 한국인 피란민을 전투기 기관총으로 난사해 300여 명 가량의 민간인이 피살됐다. ■진실위 시한 1년, 미확인 학살사건 ‘수두룩’ 전라도 순창·담양·장성·함평 불갑산 등지에서도 군경이 수백 명의 민간인을 처형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지역도 한국전쟁 중 군경의 부역자 색출과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민간인이 집단적으로 학살된 바 있다. 순창 사건은 군경이 50년 11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공비토벌과 빨치산 거점 제거 과정에서 129명의 민간인을 살해한 사건이다. 여성·어린이·노인 등 약자 피해자도 48%를 차지했다. 진실화해위는 군경이 토벌 과정에서 가족 전원을 몰살하거나 희생자의 귀를 잘라 빨치산 토벌전과로 보고하는 잔학함을 보이기도 했다고 전했다. 51년 2월 전남 함평군 해보면 불갑산 일대에서 군경은 주민 90명을 빨치산 협력자로 몰아 살해했다. 담양·장성 지역에서는 49년 5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민간인 57명이 경찰 특공대와 의용 경찰 토벌대에 의해 희생됐고, 비슷한 시기에 경남 함양 지역에서는 군경이 86명의 민간인을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강제 연행해 총살했다. 국가기록물에 대한 접근도가 높고 실질적 조사인력을 확보한 진실화해위는 지금까지 2877건의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을 처리하면서 2639건을 진상규명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해 왔다. 하지만 아직 조사가 진행 중인 사건이 4937건에 이른다. 진실화해위는 현재 대구·대전·청주 등지의 재소자 학살을 규명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많은 수의 희생자가 확인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확인작업이 녹록치만은 않은 상황이라고 한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앞으로 남은 시한은 촉박한데다, 인력이 많지 않아 규명사업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진실화해위의 활동시한이 1년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건은 셀 수 없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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