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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음악의 챔피언 레니 번스타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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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11호 편집팀⁄ 2009.03.31 14:30:52

레니 번스타인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지휘자일 뿐만 아니라, 작곡가·피아니스트·음악교육가·음악학자로서 만능 음악인이라는 평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미국 고유의 음악을 전 세계에 알리고, 미국풍의 음악을 작곡하였으며, 미국 음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전 세계의 존경과 사랑을 받은 미국 음악의 진정한 챔피언이었다. 클래식 음악의 애호가라면 누구나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오케스트라와 지휘자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세계의 많은 지휘자들의 공연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DVD 같은 영상물을 통해 현재와 과거의 거장들의 음악을 보고 들을 수 있다. 이 많은 지휘자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마에스트로는 레니 번스타인이다. 나는 그의 지휘 모습을 직접 본 일은 없지만, 그가 미국에서 뉴욕 필과 같이 연주하는 모습을 흑백 텔레비전으로 즐겨 보았다. 그의 지휘 스타일은 최대한의 정열과 동작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지휘대에서 껑충 뛰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한다. 그리하여 “Lenny's jump, Lenny's dancing”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그는 지나치게 감정을 폭발시키고 억제할 줄 모른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 모습을 보면서 인생의 생동감을 느끼고 용기를 얻기도 한다. 그는 지휘뿐만 아니라 작곡, 피아노 교육까지 다양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만능 음악인이다. 그의 이름은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이지만,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를 에니(Lenny)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레니는 1918년에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러시아에서 이민 온 유태인이었다. 레니가 처음으로 음악을 접한 것은 라디오였는데, 그는 클래식은 물론 재즈까지 모든 음악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의 부모는 음악가는 아니었지만, 레니를 데리고 콘서트 장에 자주 갔었다. 그가 10세 때 그의 이모가 이사를 하면서 피아노를 레니의 집으로 옮겼는데, 레니는 처음으로 이 피아노의 키를 누르는 순간 피아노에 푹 빠졌으며, 레슨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레니가 음악가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레슨비를 잘 주지 않아서, 레니는 동네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번 돈으로 레슨비를 충당하였다고 한다. 그 후 그는 하버드대학에서 음악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지휘를 가르치는 교수는 없었다. 레니가 처음으로 지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하버드대학 2학년 때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Dimitri Mitropoulos)를 만나면서였다. 그리스 출신의 미트로풀로스는 그리스와 독일에서 유명한 지휘자였는데, 1936년 보스턴 심포니를 지휘하기 위해 보스턴에 왔다. 그때 레니는 하버드대학에서 열린 다과회에서 디미트리를 만났고, 그는 시험공부를 제치고 2주 동안 미트로풀로스의 모든 연습과 공연에 참가했다. 그 후 1949년에 미트로풀로스는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하기 시작하였으며, 1951년에는 음악감독이 되면서 보조지휘자였던 레니의 스승이자 벗이 되었다. 레니는 하버드대학에서 피아노·하모니·카운터포인트 등의 음악교육을 받았으나, 그가 원하는 것은 지휘였기 때문에, 필라델피아에 있는 커티스 음악원의 라이너(Reiner) 아래에 들어가 제가가 되었다. 헝가리 출신의 유태인인 라이너는 부타페스트의 리스트 음악학교에서 벨라 발톡(Bela Bartok)으로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지휘를 공부한 사람이다. 그는 1922년에 신시내티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었으며, 그 후 커티스 음악원에서 지휘를 가르치고 있었다. 라이너는 엄격한 교수였으며, 정확성과 최소한의 동작의 지휘자로 유명하였다. 또한, 그는 천재적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 악보 전체를 기억하였으므로 오케스트라와 연습을 할 때도 악보가 필요 없었다고 한다. 최소한의 동작으로 지휘를 하는 그는 지휘봉의 끝에서 우표딱지 하나 정도의 움직임만으로 지휘를 해도 모든 단원들은 그의 지휘를 정확하게 따랐다고 한다. 레니의 세 번째 스승은 보스턴 심포니의 지휘자였던 쿠체비츠키였다. 1940년에 그는 지금의 탱글우드에 하기 음악축제와 젊은 음악인들을 위한 음악학교를 설립하고 지휘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레니는 그의 제자가 된 것이다. 쿠체비츠키는 러시아 출신의 유태인이었으며(나중에 천주교로 전교함), 더블바순을 전공한 연주자였다. 세계의 거의 모든 지휘자는 피아노를 전공하였지만, 쿠체비츠키는 예외였다. 쿠체비츠키는 1924년부터 1949년까지 보스턴 심포니를 지휘하면서 이 오케스트라를 세계적 오케스트라로 만들었으며, 탱글우드 음악센터를 창립한 사람이다. 1951년에 그가 사망하자, 레니는 탱글우드 음악센터 오케스트라의 지휘 책임자가 되었으며, 오랫동안 제자 양성에 혼신을 다했다. 1943년에 레니는 뉴욕 필하모니의 세 사람 중 한 명의 보조지휘자가 되었다. 이때 그에게 행운의 천사가 찾아왔다. 전설적 지휘자 부루노발터(Bruno Walter)가 지휘를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고령인 그가 급격히 독감에 걸려, 레니는 한 번도 연습을 해보지 못한 채 뉴욕 필을 지휘하게 되었으며, 이 공연은 전 미국에 방송되었다. 다음날 뉴욕타임즈는 논평에서 “이것은 미국의 성공신화이다. 아주 따뜻하고 친밀감이 넘치는 공기가 카네기홀뿐만 아니라 전파를 타고 전 미국으로 퍼졌다”고 호평했다. 하룻밤 사이에 25세의 젊은 레니는 미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지휘자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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